아무 때나 여행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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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지구는 자전하며 하루를 보낸다. 필자는 아침 해로 깨어나 해가 지면 잠에 가까워지는 하루를 살고 있다. 그런 하루 안에도 사계절이 존재한다. 새벽의 겨울을 지나면 아침의 봄이 오고, 한낮의 여름과 황혼의 가을 뒤, 한밤의 겨울로 순환되는 시간을 살고 나면 뭔가가 변한다.
하나의 씨앗이 뿌려질 때 우리는 그것이 무엇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호박씨라면 넝쿨째 열리는 호박이겠지? 필자 역시 삶 속으로 던져진 존재이지만, 씨앗과 다른 점이 있다면 얼마쯤은 변형을 가할 만한 의지를 가졌다는 정도? 우리는 자연법칙대로 살아가는 존재다. 그렇다 해도 법칙이라는 것이 사람이 발견한 관점 중 하나라면 절대적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자연법칙은 지금 수준을 반영하면서 계속해서 수정되거나 추가될 것이다.
요즘의 하루는 예전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몇 백 년 전의 하루는 어땠을까? (집콕의 하루와 시계가 없던 시절의 하루는?) 이런 생각 하나로도 필자는 과거로부터 외계인이다. 동일한 사람으로 일상을 살다가 어느 날 아침 깨어나니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가 주인공인 소설처럼, 갑자기 스스로 낯설어진 필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나의 대학 시절엔 노트에 필기하고 시험도 종이 답안지에 펜으로 쓰는 게 전부였다. 답안 내용이 핵심이지만 내용을 잘 읽히게 하는 글씨체도 중요했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표현되는 모양이 별로이면 학점이 불리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시각이 발달된 인간에게는 그만큼 외관상의 비중이 크다. 별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보는 대로 판단하기 일쑤다. 지금은 그 ‘노력’ 덕분에 PC가 손글씨를 대신하는 사이, 예전보다 공정해졌다. 이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캘리그래피나 디자인 부문에 잘 쓰이는 때가 되었다. 실력만 있으면 기술의 도움으로, 예전에는 전문가만 가능했던 일들이 조금은 수월해진 것도 사실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인간의 특성을 보여 주는 자질로, 요즘 들어 특히 요긴해 보인다. ‘1인 시대’라는 건 독립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니까. 자기 식으로 살아가면서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그만큼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더불어 사는 삶이 눈치를 보라는 말이 아니라 배려하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면, 결국 ‘제 눈에 안경’인 셈이다.
정보사회를 얘기하고, 비대면 교육을 논의하고, 아직도 코로나19 대응 단계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너나없이 밀착을 경계하는 일상을 살고 있다. 가상이나 비대면 모두 현실의 일부라는 점에서 우리의 현재이자 실제이지만, 그것만으로 지속되는 하루는 기술 발달이 미흡했던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인간은 연속성을 갖는 실체다. 그래서 요즘 같은 일상에 익숙해지기보다 잠깐이면 괜찮아질 감정의 변화 같은 것으로 여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을 수 없는데 신체와 의식이 한 몸으로 연결된 탓에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 안의 미세한 변화를 다 볼 수 없거니와, (모든 순간을 의식하지 못하기에) 본다고 해도 알 수 없다. 한순간도 같은 강물에 발을 담글 수 없듯이, 멈춘 시간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데도 습관적 의식만은 똑같은 것을 고집한다. 실제와 생각 간 괴리가 나타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년까지만 해도 필자는 시민대학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과목을 수강했다. 그때는 ‘원격 수강’이란 말이 테크놀로지와 관련된 첨단이나 미래와 연관이 있고, 그렇게 되면 편리하겠다는 생각에 ‘이상적’인 말로 들렸다. 하지만 올해 뜻하지 않게 원격 수강이 현실로 나타나자, 생각했던 미래가 실현된 것으로 여겨지기보다는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이 먼저 감지됐다. 현실에서 나아간 이상의 실현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임기응변의 자구책 같아 흔쾌하지만은 않았다.
온라인 강의를 듣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필자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있었다. 그간의 습관을 ‘뒤집는’ 일상이 지속되었고, 바깥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일상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록 무슨 일을 해도 한 것 같지 않은 탓에 분명히 일을 끝냈는데도 허송세월 한 느낌이었다. 일상에서 어떤 마디 없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타’가 왔다. 안팎이 하나의 쌍으로 있어야 공간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이치를 터득했다.
일상이 반복되면 지치거나 소진되는 느낌 때문에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게다가 금지할수록 욕망은 더욱 커지는 법이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필자는 이 사실을 거꾸로 적용했다. 여행이란 낯선 사람이나 장소, 사물과의 만남을 경험하는 일이 아니던가! 기존의 것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일이면 무엇이든 여행이라 부를 만했다. 이런 여행만으로도 일상은 생기를 띤다.
우리는 살아 움직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런 운동성이 지속돼야 생존한다. 그 동력은 무엇일까? 외부 환경이 모든 걸 결정한다면 우리는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살 것이다.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말은 우리의 내면에서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이 제각각이라는 의미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필자의 일상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건 발견하는 여행, 하루 안에서 사계절을 보고 나서였다. 똑같아서 잘 잡히지 않던 시간이 다른 방식으로 편입되고, 몇 가지 할 일이 그 안에서 역동하기 시작하자 하루에 마디가 생기고 생기가 돋아났다. 한 방향으로만 향하던 일상이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여행 지점이 되었다. 필자는 이 여행에서 우연히 어떤 사람을 만났다. 알던 사람이던가? 어제 만난 사람 같았는데, 어제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그녀는 어제의 내가 아니라 오늘의 나였다. ‘그것’ 발견으로 하루가 바뀐 사람, ‘그것’으로 일상의 동심원을 키운 사람, '그것'의 발견으로 동심원을 넓힌 필자는 사계절의 하루를 살게 되었다. 그렇게 바뀐 하루가 무게중심이 되었다. 이제 어디로든 고고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