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여행, 50일 인생

홀로 중남미, 이탈리아 기행

 

홍윤오 (전 국회홍보기획관‧언론인)

 

 

‘여행은 인생 그 자체이다.

50년 살아온 것이나,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50일 여행한 것이나 같다는 생각이다.

만남과 헤어짐이 있고,

소유의 기쁨과 상실의 아픔이 있다.

희로애락이 있고 기승전결이 있다.’

 

 

중년의 비망록이자 인생 반성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자기위로의 책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것은 누구나의 소망일 것이다. 그것도 아주 먼 곳, 쉽게 갈 수 없는 곳으로.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경제적 형편이 되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경제적 여유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저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길을 나선다. 인생이 곧 여행이니까.

누구나 할 수 있는 여행, 그러나 막상 하려고 하면 쉽지 않은 여행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이 있다. 한국 최초의 아프가니스탄 종군기자로, <아프간 블루스>의 저자이기도 한 홍윤오 씨가 재작년에 펴낸 <50년 여행 50일 인생>(나눔사 펴냄)이 그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책 제목이 50+재단과 딱 들어맞는다. 주인공 나이도 그렇다. 저자는 말한다.

‘Now or Never’라는 말이 있다. 지금 실행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 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나이 50이면 어떻고 60이면 또 어떤가. 더 늦기 전에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으면 그 사람이 곧 행운아가 아닐까.

 

이 책은 홍만식이라는 3인칭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 형식의 여행수상록이다. 어느 독자는 이를 가리켜 ‘여행 소설(Travel novel)’이라고 명명했다. 한편으로는 저자의 여행 일정과 경로, 각종 여행 팁을 소개한 일종의 여행안내서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50줄에 접어든 주인공이 갑자기 닥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홀로 중남미 및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여행하는 동안 넓은 세상을 보면서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고 결국 삶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은 나의 비망록이자 인생 반성문이다. 한편으로는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자기 위로의 책’이다” 면서 “살면서 이런저런 상처를 입고도 함부로 말도 못 한 채 가슴앓이를 하는 분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상처 입고도 함부로 말 못 할 사연이 자못 궁금하다. 저자는 그러나 끝내 밝히지 않는다. 어차피 함부로 말 못 한다고 하지 않았나. 50+세대들 치고 그런 사연 한두 개쯤 없는 사람이 있으랴. 억울한 일이 있어도 어디 가서 하소연조차 할 수 없는 신세. 이 책은 그런 세상 그런 50대가 모든 걸 떨쳐버리듯 여행을 떠나 마음의 안식을 얻는다는 얘기이다.

 

 

홍만식은 항용 자신을 북악산에 올려놓았다.

 

한 중년의 홀로 중남미 여행기는 김성한의 소설 <방황>의 첫 구절로 시작한다. 저자는 본디 ‘홍’가는 맞지만 이름은 ‘만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행을 떠날 즈음 자신의 처지를 소설 속 주인공에 빗대어 스스로를 ‘만식’이라 칭하고, 그 ‘만식’을 내세워 마치 소설처럼 여행기를 풀어나간다. 좀 생뚱맞으면 어떤가. 어차피 인생은 소설과도 같고, 여행 역시 하나의 스토리인 것을.

소설 속 ‘만식’은 백수건달이지만 스스로는 두 가지 직업을 지녔다고 자부한다. 그 하나는 정거장에서 석탄을 상습적으로 훔쳐내는 일이니, 그의 명명에 의하면 ‘석탄반출작업’이었다. 또 하나는 공상이다. 이것도 그가 붙인 독특한 명칭이 있으니, 그것은 ‘사고구축작업’이라 했다. 그는 항상 ‘반출’에 용감하고 ‘구축’에 심각했다. 현실 속 ‘만식’ 역시 여행을 떠날 즈음 6개월째 백수였다. 신문기자를 거쳐 대기업 임원으로 있던 그는 묘한 악연에 뒤통수를 맞고 끝내 거리로 내몰리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런데도 취직은 재껴두고 여행이란다. 그것도 중남미란다.

저마다 여행을 떠나게 되는 이유와 사연이 있게 마련이다. 목적지를 정하는 것도, 여유롭게 혹은 급히 떠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만식’은 정신적, 현실적으로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중남미 나 홀로 여행을 급히 결행했다. 하지만 현실도피라기보다는 자신과의 대화를 위해서였다. 일종의 일시적이고 내면적인 망명이었다. 50년 인생과도 같은 50일간의 여행길에서 중년의 ‘만식’이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망루를 내려와 다시 방파제를 따라 걷는다. 방파제의 끝에는 낡은 잔교(棧橋)가 놓여 있다. 어쩌면 이 풍경은 옛 모습 그대로이리라. 평생을 모험과 이벤트로 살아온 작가는 이 다리 끝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갔다. 그 그림자를 밟으며 다리의 끝에 선다. 만식의 살아온 삶 역시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간다. 문득, 수평선 위로 거대한 청새치 한 마리가 포말을 일으키며 솟구쳐 올랐다가 다시 바다 깊숙이 가라앉았다.

 

<그림 1> 쿠바 아바나 부근 코히마르의 바닷가에서 주민들이 평화롭게 낚시와 휴식을 즐기는 모습.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모티브가 됐던 곳

 

 

그것은 ‘희망’이었다. <노인과 바다>의 배경지인 쿠바의 코히마르에서 만난 헤밍웨이는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는 명제를 일깨워준다. ‘희망을 버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고, 더욱이 그것은 분명한 죄’라는 사실도.

……

 

누구나 이런저런 이유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미리 계획을 하고 떠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뜻하지 않게 갑작스레 길을 나서야 할 때도 있다. 그 여행 또한 즐거운 마음으로 떠나자. 언제 올지 모를 갑작스런 여행을 위해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좋다. 삶을 마감하는 여행길도 마차가지일 터.(본문 中)

 

꼭 한번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다시는 못 갈 줄 알았는데 또 가게 되는 곳이 있다. 우연한 방문에 뜻밖의 감동을 받는 곳도 있다. 다시 가고 싶지만 한 번 간 그것이 마지막인 곳도 있다. 인연은 사람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소와도 있다.

……

여행도 젊어서 해야 한다. 일도 젊어서 해야 한다. 두 가지 모두 가급적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해야 한다. 그럼 방법은? 두 가지를 적절히 병행하는 수밖에. 그 중에서도 여행은 특히 가슴 떨릴 때 해야지 다리 떨릴 때 하면 그 만큼 힘이 든다.

……

 

 

<그림 2> 폐루 마추픽추

 

 

낯선 곳에서 위험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먼저 말을 거는 것이다. 겉으로 착해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물론, 다소 무뚝뚝하고 험상궂게 생긴 사람들에게도 말을 걸어보자. 혼자 여행하면서 곤경에 처해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인간사의 모든 갈등과 전쟁은 문화와 언어의 차이, 그에 따른 소통의 단절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소통만 할 수 있으면 누구나 다 똑같은 인간이다. 싸움을 피할 수 있다.

 

부풀려지거나 과장된 이야기만 듣고 함부로 사람을 의심할 게 아니다. 어디를 가나 악인들은 있을 뿐이지 세상은 다 똑같다. 그곳 역시 사람 사는 곳이고, 대부분은 착한 사람들이다. (본문 )

 

 

<그림 3> 페루 쿠스코 부근 성스러운 계곡(sacred valley)의 안데스 평원. 끝없은 밀밭위로 마치 동화속 기차같은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있다

 

 

새는 자유롭지만 그 또한 하늘에 갇혀 있는 것과 다름없다.

자유는 아무 것에도, 아무 데도, 누구에게도 없는가.

외롭지 않고 자유로울 수는 없는가.

……

먼 길을 무작정 걷는 것은 답답한 가슴을 어찌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체력이 아니라 끓어오르는 분노의 힘 때문이다. 걸으면서 화를 삭이고 냉정을 찾고 용서하게 된다. 분노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든 타인이든. 걷다가 지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쯤 비로소 다른 길이 보인다.

……

나 홀로 여행에서 변수와 해프닝은 반드시 생기게 마련이다.

항공편, 교통편이 변경되거나 다치거나 아프거나, 또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된다. 아무리 조심해도 그런 일들은 생긴다.

가능성이 아니라 필연이다. 인생 여행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여행자가 되면 좋은 것 중 하나가 현지의 관습과 문화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살아가면서 많은 눈치를 보아야 하고 남을 의식해야 할 일이 많다.

자기 인생을 사는 건지 타인을 위해 사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 없이 자유 의지에 따라 행동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본문 )

 

 

 

<그림 4>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의 예수상. 마치 하늘 나라 구름위에 서 있는 듯한 신비로운 장면.

 

 

멋진 풍경들이 많지만 자연이 만들어낸 장면만큼 걸작은 없다.

그것은 목격한 사람에게만 내린 축복이다.

그 날,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기에 가능한 기적이다.

……

여행을 하다보면 그냥 스쳐 지나가기엔 너무 아까운 곳이 있다.

단 며칠이라도 눌러 앉아 쉬면서 경치와 정취를 만끽하고 싶은 곳들이다. 하지만 여행은 늘 시간에 쫓긴다. 여유롭고 품격 있는 여행을 부러워만 하지 말고 주어진 여행이나마 열심히 즐기자.

……

혼자 걸어도 혼자 걷는 것이 아니다. 곁에는 늘 동행이 있어 대화를 나누니 그는 또 다른 자아이다. 그러니 외롭다 하지 마라. 나를 제일 잘 알고, 이해해줄 수 있는 또 다른 내가 함께 있으니까.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더라도 심하게 티를 내면서 중얼거리지는 말자.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

길은 사연을 남긴다. 거기엔 수많은 만남과 이별이 있다.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고, 잊을 수 없는 길이 있다. 사람도 길도 인연이 있다. (본문 )

 

 

여행에서 돌아온 ‘만식’은 ‘인생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지만, 그러나 세상은 공평한 것이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고 사불범정(邪不犯正)’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어느 날, ‘만식’은 뜻밖의 인물로부터 전화를 받은 후 아내에게 조용히 말한다.

“내일은 사람을 좀 만나야 하니까 양복 입고 나갈게.”

 

그리고 <방황>의 마지막 문구로 여행기의 끝을 맺는다.

어쩌면 무슨 변통이 있을 듯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