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딸의 개인용 컴퓨터를 알아보기 위해 여의도에 있는 다국적기업 전자제품매장에 갔다. 코로나 19 때문에 매장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제품 구경을 할 수 없었다. 지정된 곳에서 직원의 안내를 받아야 했는데, 우리를 담당하게 된 A 직원은 시각장애인이었다.
최첨단 IT 제품을 설명하는 직원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가 지금 내 표정을 보지 못해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A 직원은 풍부한 지식으로 개인용 컴퓨터 사양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곧 출시될 신제품도 꼼꼼하게 알려줘서, 우리가 신제품을 기다리기로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필요했던 디지털 펜슬 팁을 샀다. A 직원이 손으로 더듬어 서랍을 열어 기계를 꺼내고, 나에게 카드를 받아 능숙하게 결재했다. 물론 시간은 평소보다 조금 더 걸렸을지 모르지만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인을 받고 영수증을 출력하기 위해 자신의 핸드폰을 흔들어 소리로 진행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처음에는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어색했지만, 금방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매장을 나서며 딸은 올해 초, 손목에 차는 기기를 살 때 비장애인 직원이 심박 수 앱에 관한 대답을 제대로 못 해서 답답했던 일과 비교되었다고 했다. 시각장애인이 IT 매장에서 일하는 모습이 신선했다는 딸의 말에 나는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그가 잘할 수 있을까?’ 선입견이 있었다는 나의 부끄러움도 함께 고백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인생을 애니메이션처럼(2017)>이 생각났다. 제 89회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 후보에 올랐던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발달장애인 오언이다. 3살부터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반복 행동을 보인 오언은 자폐증 진단을 받는다. 유독 디즈니 만화영화를 좋아하는 오언에게 온 가족은 디즈니 영화의 대사로 말을 걸기 시작한다. 오언은 갇혀있던 자신의 세계에서 점점 걸어 나와 세상과 소통하게 된다.
영화 <인생을 애니메이션처럼>의 한 장면 [사진=왓챠 캡쳐]
오언은 주인공보다 조연인 ‘들러리 캐릭터’를 좋아한다. <알라딘>의 원숭이 아부, <라이언 킹>의 미어캣 티몬과 멧돼지 품바처럼 영웅을 돕는 캐릭터에 감정이입 한다. “들러리는 뒤에 남겨지지 않는다 (No sidekick gets left behind)”는 오언의 메모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들러리들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지만 뒤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들러리들 역시 자신의 삶을 향해 나아간다. 23살이 된 오언 역시 특수학교를 졸업하고 자립 생활을 익히며 영화관에 취직한다. 영화표를 받고 관객을 입장시키는 단순 업무였지만 사회의 일원으로 일하는 그의 환한 얼굴은 만족스럽게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 위한 ‘장애인 탈시설’에 동의하는 흐름이다. 2012년부터 장애인 거주 시설 탈시설-자립 지원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서울시를 비롯해 많은 지자체가 노력 중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일하는 장애인을 자연스럽게 만나는 일은 드물다. 어쩌면 우리는 장애인을 조연도 단역도 아닌 ‘투명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로 지워버린 것은 아닐까?
내가 전자제품매장에서 만났던 시각장애인이나 영화 속 주인공 오언처럼 우리와 일상을 함께 살아가는 장애인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불어 사는 장애인’이 관념 속이 아닌 살아있는 존재로서 직접 만나고 부딪치며 편견을 깰 때, 성숙하고 관대한 사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며칠 뒤, 매장 서비스 만족도를 묻는 메일이 왔다. 담당 A 직원의 서비스는 어땠는지, 자세히 알려줄수록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나는 5점 만점에 5점을 주며 또박또박 적었다. ‘담당 직원은 제품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친절하고 쉽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시각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함께 매장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0+에세이작가단 전윤정(2unne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