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또한 무분별하게 개발만 안했다면
경주나 안동과 같이 도시 전체가 문화재가 될 수 있을만큼 역사적인 도시일 것 입니다.
조선의 첫 번째 왕인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뒤로 현재의 서울까지
600년 이상의 시간을 우리나라의 수도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지역보다도 다양하고 많은 문화재를 보유했던 것이 분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도 경복궁, 덕수궁 등의 옛 궁궐이 있고
그 옛날 왕조 사람들의 웅장한 왕릉을 현대적인 도심이 품고 있는 근사한 야외 박물관이죠.
하지만 서울에는 이런 유명하고 화려한 문화재만 있는건 아닙니다.
소소하지만 찬란하고 소박하지만 근사한 많은 문화재들이
나도 모르게 우리 동네에서 같이 살아가고 있답니다.
몇 년 전, 영등포구 신길동 근처 길을 지나다가 대방 초등학교 담벼락에서 우연히 글씨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별 생각없이 터덜터덜 걷던 길이었는데 순간 눈에 띈 담벼락에 너무나 뜬금없이 한자가 새겨져 있더라구요.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칠 뻔 했을만큼 한 쪽에 덩그러니 글씨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모든 학교들이 갖고 있는 도시괴담같은 소문과도 비슷하게
이 곳도 그 옛날 공동묘지였던 곳이라도 갈아 엎어서 학교를 짓다가
묘지 비석이라도 하나 섞여 이 담벼락이 세워졌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왕자(王子)"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고 예사로운 비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때만 해도 스마트폰이 흔하지 않을 때라 집에 돌아와서 열심히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바로 대방 초등학교 자리가 조선의 왕이였던 숙종의 아들 연령군 이훤의 능이 있던 곳으로 그 신도비라고 하더라구요.
숙종은 인현왕후와 장희빈 뿐 아니라 이 외에도 여러 후궁을 두고 있었는데, 연령군 이훤은 명빈 박씨와의 사이에 태어난 왕자입니다.
대방초등학교 자리에는 명빈 박씨와 연령군의 묘지가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시대에 도시구획 정비과정에서 충남 예산으로 옮겨졌고
신도비는 1967년에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진 후
마을 주민들이 그 자리에 ‘숙종왕자연령군명묘비지’라는 비석을 만들어 대방초등학교 담벼락에 심어 넣었다고 합니다.
이제라도 다시 신도비 만이라도 제자리를 찾아왔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기네요.
그리고 7호선 보라매역을 지나고 신대방삼거리역을 지나면 장승배기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장승배기역에서 노량진 쪽으로 걸어가면 동작도서관 앞에 장승터가 있습니다.
일본 강점기를 거치며 다 한문화 되어버린 지명들 사이에서 장승배기라는 한글 지명은 참 정겹기까지 합니다.
문헌을 찾아보니 옛날에는 이 일대가 인가가 없고 울창한 숲이었다고 합니다.
앞서 나온 숙종의 증손자인 조선의 정조대왕이 화산(현재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으로 전배하러 가다가
이 지점에서 쉬면서 이곳에 장승을 만들어 세웠다고 하네요.
정조대왕이 장승을 세우라고 명할때
"장사 모양을 한 남자 장승을 세워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또 하나는 여자 장승을 세워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으로 하여라.” 하고 명하였다고 합니다.
어명으로 이 곳에 곧 두 개의 장승이 세워졌다고 해서 이때부터 이곳은 장승배기란 지명이 붙게 되었고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가는 길에 이 장승 앞에 어가를 멈추고 쉬었다고 합니다.
이는 왕이 안심하고 행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합니다.
하지만 이 장승들 또한 일제 강점기 시대에 서양 선교사들과 일본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동네 주민분들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1991년부터는 해마다 가을에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위하여 장승제를 지낸다고 하네요.
이렇듯 아직까지 우리 주변에는 소소하지만 찬란한 문화유산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요즘처럼 코로나19로 인해 거리두기를 지키느라고
지인과의 만남도 외출도 자유롭지 못할 때
핸드폰 하나 들고 동네 한바퀴라도 둘러보는 건 어떨까요?
검색도 해보고 사진도 찍으며 혼자만의 여행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온라인으로도 함께 즐길 수 있으면 더욱 좋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