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동명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고 함께
■ 일시 : 2024년 2월 5일(월) 16:00 ~ 19:30 ■ 장소 : 명와 고문댁
■ 참가자 : 강성자 회장, 강옥순 고문, 임영신, 마정숙, 차은경, 김기수
■ 주요내용
- 명와(강옥순 고문)님이 다산의 생애를 설명해주고, 도서를 편역하신 박석무 선생님과 전화 통화(참가자 모두 감동과 감사의 말씀)를 하다
- 지니(임영신)님이 회원들에게 책 선물을 하다~~ 『파란달의 시네마 레시피: 영화 속 디저트부터 만찬까지 한 권에!』, 파란달 정영선, 글.요리
■ 향후 계획
▶ 3월 독서모임 : 4일(화), 로엘파스타(강서구 방화대로...)
▶ 은둔의 즐거움, 신기율, 웅진지식하우스
1. 다산의 생애
* 1762년(영조 38)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 아버지 정재원, 어머니 해남 윤씨 대대로 대제학을 지낸 명문가이다. 어머니 가계 역시 윤두서 등을 배출한 명문가. 강진에서 유배살이를 할 때 윤씨 일가의 도움을 받는다. 다산초당도 윤씨 소유.
* 1789년(28세)에 과거에 수석합격하여 벼슬살이 시작. 예문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병조 참의, 승지, 곡산 부사 등을 역임하고 1799년(38세)에 물러남. 정조와는 1783년(22세)에 조우.
* 1800년에 정조가 죽고 1801년 황사영백서 사건 등으로 강진으로 유배되어 18년을 보냄. 이곳에서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저서 집필
* 1818년(57세)에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836년 회혼일에 75세로 서거. 1910년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을 추증하고 문도공이라는 시호 내림.
2. 아들에게 보낸 편지
* 큰아들 학연(6품인 사옹원 주부)과 작은아들 학유(농가월령가)_ 추사는 두아들 모두 박학하고 시에 뛰어났다고 평했다.
* 우리는 폐족이다! 그래서 더 스스로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 폐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독서와 농사일
3. 둘째 형 정약전과의 형제지기
* 약현, 약전(흑산도로 유배), 약종(신유옥사로 순교, 주교요지 저자), 약용, 약횡(서자)
* 약전과 약용은 학문적 동지임
2024년 02월 05일 책 읽는 풍경_엘리
도서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by 정약용(1762~1836) 향년 73세
-프롤로그-
톤 다운된 녹색, 고급 재질의 하드 커버 첫 장을 넘기자 바로 다산 정약용의 초상이 나왔다. 상투 위로 다소 높은 갓을 쓰고 흰 마고자를 입은 다산이 옆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깍지 않은 수염이 가늘고 곱슬거린다. 다문 입술에는 단호함이 서려있고, 길고 높은 코를 중심으로 큰 두 눈이 형형하다. (보통 1800년대 조선의 사내들의 작은 눈에 비하면 상당히 큰 편이다.) 서문을 지나쳐 차례를 살핀다. 1부<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2부<두 아들에게 주는 교훈>, 3부<둘째형님께 보낸 편지>, 4부<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 한 손으로 책장을 대충 넘겨본다, 책장이 손안에서 빠르게 넘어가다가 우연히 163페이지에서 멈췄다.
‘무룻 부귀하고 권세있는 집안은 눈썹을 태울 만큼 급박한 재난을 당해도 느긋하게 걱정 없이 지내지만, 재난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시골 깊은 산속에 들어가 사는 몰락한 집안은 겉으로는 태평스러운 듯하지만 마음속에서는 항상 근심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대개 그늘진 벼랑 깊숙한 골짝기에서는 햇볕을 볼 수가 없고 함께 어울려 지내는 사람들은 모두 버림받은 쓸모없는 사람이라 원망하는 마음만 가득하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견문이란 실속없고 비루한 이야기뿐이다. 때문에 한번 멀리 떠나면 영영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된다. (..............)
천리(天理)는 돌고 도는 것이니 한번 넘어졌다고 반드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 |
1810년에 아들에게 쓴 편지다. 214년전, 다산이 48세 때다.
‘실속없고 비루한 이야기’, ‘천리(天理)는 돌고 도는 것...’ 다산이 가까이 나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이제 다시 책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260년이라는 세월을 지나 나에게 다가온 다산을 차근차근 읽어나갈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1. 독서와 효제(孝悌)
1) 효제(孝悌) =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를 통틀어 이르는 말.
(p.36) 폐족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가지밖에 없다. 독서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깨끗한 일일 뿐만 아니라,(.....)중간에 재난을 만난 너희들 같은 젊은이들만이 진정한 독서를 하기에 가장 좋은 것이다.
(p.39) 독서를 하려면 반드시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일컬음인가. 오직 효제(孝悌)가 그것이다. 반드시 효제를 힘써 실천함으로써 근본을 확립해야 하고, 근본이 확립되고 나면 학문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들고 넉넉해진다. (p.41~42) 마음에 항상 만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야겠다는 생각과 만물을 자라게 해야겠다는 뜻을 가진 뒤에야만 바야흐로 참다운 독서를 한 군자라 할 수 있다.
(P.42~44)어버이를 섬기는 일은 그 뜻을 거역하지 않는 것. 부엌 살림은 잠깐 연기를 쏘이는 일, 연기 좀 쏘이고 효부가 되고 법도있는 집안을 꾸려야. 방에 몸소 불을 때드리되 종에게 시키지 않도록 해라. 온갖 방법을 다 짜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라. 두 아들이 효자가 되고 두 며느리가 효부가 되면 이대로 죽어도 아무 유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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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하려면 먼저 근본(효제)을 확립하라는 다산의 가르침에 나는 충격을 받는다. 나 자신이 근본을 확립하지 않았기에 더 없이 가차없는 채찍으로 와 닿는다. 이미 작고하신 부모님에게 불효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살아있는 나의 형제 자매에게 효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책을 덮고 형제자매와의 우애부터 키워나가라는 매서운 질책을 다산은 나에게 던지고 있었다.
2) 독서의 효능과 가치
(p.283)그러나 독서 한가지 일만은, 위로는 성현을 뒤따라가 짝할 수 있고 아래로는 수많은 백성들을 길이 깨우칠 수 있으며 어두운 면에서는 귀신의 정상을 통달하고 밝은 면에서는 왕도와 패도의 정책을 도울 수 있어 짐승과 벌레의 부류에서 초월하여 큰 우주도 지탱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해야 할 본분인 것이다. 만약 따듯이 입고 배불리 먹는 데에만 뜻을 두고서 편안히 즐기다가 세상을 마치려 한다면 죽어서 시체가 식기도 전에 벌써 이름이 없어질 것이니, 이는 금수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같이 살기를 원할 텐가? |
‘독서는 위로는 성현과 벗할 수 있고 아래로는 가르침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니 독서야말로 우리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본문인 것이다.’ 라고 다산의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해 본다.
*다산의 <논어> 예찬 (p.273 ~274)
-<논어>만은 종신토록 읽어야 한다.(p.292) -<논어>를 가르치려다 보니...... ‘여기에도 떨어진 볏단이 있고 저기에도 남은 이삭이 있으며, 여기에 거두지 않은 볏단이 있고 저기에 거두지 않은 늦벼가 있어서, 전도가 낭자하여 다 수습하지 못할 지경입니다. 어린 시절 새벽에 동산에 나갔다가 갑자기 난만히 땅에 흩어져 있는 붉은 밤알들을 만나 이루 다 주울 수 없는 격이니 이를 장차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
*<주자전서>에 관하여 (p.76)
<주자전서>가운데는 기굴하고 돌올하고 참담하고 맹렬하며, 놀라서 공포를 느끼게 하고 희열하게 하는 말이 부지기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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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굴: 외모가 남다르고 허우대가 크다.
*돌올: 두드러지게 뛰어나다.
*참담: 가슴 아플 정도로 비참함.
* 다산이 생각하는 시에 대하여
p.41~42 마음에 항상 만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야겠다는 생각과 만물을 자라게 해야겠다는 뜻을 가진 뒤에야만 바야흐로 참다운 독서를 한 군자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이 된 뒤, 1) 안개 낀 아침 2) 달 뜨는 저녁 3) 짙은 녹음 4) 가랑비 내리는 날을 보고 문득 마음에 자극이 와서 한가롭게 생각이 떠올라 그냥 운율이 나오고 저절로 시가 될 때 천지자연의 음향이 제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제 역할을 해내는 경지일 것이다. |
다산의 감성이 어찌나 나의 것과 유사한 것인지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다. 안개, 달, 녹음, 가랑비 등등은 종종 나의 심상을 뒤흔들어 시를 쓰도록
추동한다. 특히 ‘짙은 녹음’을 지칭한 것에 나는 다산이 모던한 시인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p.157 시에는 반드시 정신과 기맥이 있어야 한다. 시가 산만하고 쓸쓸하기만 하여 잘 묶이고 짜인 묘미가 없으면 그 사람의 운명은 곤궁하거나 현달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수명조차 길지 못할 것이다. 이 점은 내가 몇차례 증험한 바이다. |
‘운명이 곤궁한 것도 모자라 수명조차 길지 못할 것이라고 증험한 바’가 있다니, 모골이 송연해지는 대목이다.
2. “나같이 강직한 사내......” (p.47) 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들
탐진악부를 네가 이토록 칭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칭찬하는 법이 아니다. (p.47)
너는 왜 <마과회통> 홍씨본 한질을 사서 집에 있는 책과 분명히 대조하여 그 책이 내 책을 통째로 인용했는지 부분적으로 인용했는지를 밝히지 않고 늘 전해들은 이야기만 가지고 애매모호하게 내게 알려오느냐? (p.47)
-내가 일찍이 <성호사설>에 대해 후세에 전할 만한 정본이 못된다고 말한 것은, 이 책이 옛사람이 지은 글에다 자기의 논의를 뒤섞어서 책을 이루었기에 올바른 체계를 갖추지 못한 때문이다. (p.48)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을 인용한답시고 걸핏하면 중국의 일이나 인용하고 있으니 이것 또한 볼품없는 짓이다. 아무쪼록 <삼국사기>, <고려사>, <국조보감>, <여지승람>, <징비록>, <연려실기술> 및 우리나라 다른 글 속에서 그 사실을 뽑아내고 그 지방을 고찰하여 시에 인용한 뒤에라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가 나올 곳이며 세상에 명성을 떨칠 수 있을 것이다. (p.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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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뼈 때리는 일갈 (p.59~61)
-모든 일은 안방 아낙네들로부터 일어나니 유심히 살펴서 조치하고 마음속으로 남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린다면 저절로 마음이 평안하고 기분이 화평스러워져서 하늘을 원망한다거나 사람을 원망하는 그런 병통은 사라질 것이다. (..........)남이 어려울 때 자기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서 남이 먼저 은혜를 베풀어주기만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지닌 그 나쁜 근성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평상시 일이 없을 때라도 항상 공손하고 화목하며 삼가고 자기 마음을 다하여, 다른 일가들의 환심을 얻는 일에 힘쓰되 마음속에 보답받을 생각을 갖지 않도록 해라. (........) ,가벼운 농담일망정 “나는 전번에 이리저리해주었는데 저들은 이렇구나!”하는 소리를 입밖에 내뱉지 말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말이 한번이라도 입밖에 나오면 지난날 쌓아놓은 공과 덕이 하루아침에 재가 바람에 날아가듯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p.59~61) -아내가 게으른 것은 가산을 탕진시킬 근본이다. 사경도 못되어 촛불을 끄고 아침해가 창에 비치도록 이불을 개지 않는 것은 모두 게으른 사람이니, 경계를 주어도 개전의 정이 없다면 버려도 괜찮다. (p.289)
-벗을 고르는 일에 대하여 이 늙은 아비가 세상살이를 오래 경험하였고 또 어렵고 험난한 일을 고루 겪어보아서 사람들의 심리를 두루 알게 되었는데, 무릇 천륜에 야박한 사람은 가가이해서도 안되고 믿을 수도 없다. (......) 무릇 불효자는 가까이하지 말고 형제끼리 우애가 깊지 못한 사람도 가까이해서는 안된다. (p.143~144) |
3. 정신적인 부적 두자_근(勤)과 검(儉) (p.171~173)
내가 벼슬하여 너희들에게 물려줄 밭뙈기 정도도 장만하지 못했으니, 오직 정신적인 부적 두자를 마음에 지녀 잘 살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도록 이제 너희들에게 물려주겠다. 너희들은 너무 야박하다고 하지 말라. 한 글자는 근이고 또 한 글자는 검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 |
-부지런함이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검이란? 의복이란 몸을 가리기만 하면 되는 것,....
-음식이란? 목숨만 이어가면 되는 것,...
단 한가지 속일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건 자기의 입과 입술이다. 아무리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생각하여 입과 입술을 속여서 잠깐 동안만 지내고 보면 배고픔은 가셔서 주림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이러해야만 가난을 이기는 방법이 된다.
-집안을 다스리는 요령으로 새겨둘 두 글자가 있으니, 첫째는 근(勤)자요, 둘째는 검(儉)자다. 하늘은 게으른 것을 싫어하니 반드시 복을 주지 않으며, 하늘은 사치스러운 것을 싫어하니 반드시 도움을 내리지 않는 것이다. 유익한 일은 일각도 멈추지 말고 무익한 꾸밈은 일호도 도모하지 말라. (p.291) |
4. 학문하는 데 있어 가장 우선적으로 마음을 기울여야 할 세가지 (p.71)
1) 몸을 움직이는 것
2) 말을 하는 것
3) 얼굴빛을 바르게 하는 것
‘비스듬히 드러눕고 옆으로 삐딱하게 자거나,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경건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된다.’는 교훈은 참으로 큰 용기가 없으면 실천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이가 40,50이 된 사람은 도리어 할 수 있다. 혹 고요한 밤에 잠은 오지 않고 초연히 도를 향하는 마음이 생겨나거든 이 기회에 더 학충하여 용감히 나아가고 곧게 전진할 것이지, 노쇠하다고 주저앉는 것은 옳지않다. (p.306) |
-기록의 중요성
오로지 역경, 서경, 시경, 예기, 논어, 맹자 등은 마땅히 숙독하여야 한다. 그러나 모름지기 뜻을 강구하고 고찰하여 그 정밀한 뜻을 깨달았으면 깨달은 바를 수시로 기록해두어야만 바야흐로 실제 소득을 얻게 된다. 진실로 외곬으로 낭독하기만 한다면, 실제 소득은 없을 것이다. (p.309) |
-다산의 교수법
고문, 이문, 과문 순으로 글이 어려운데 가장 쉬운 고문에서 시작하면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이문, 과문에 통달할 수 있다는 것을 비유로 들어 한 말 (P.294)
가을이 깊으면 열매가 떨어지고. 물이 흐르면 도랑이 이루어짐은 그 이치가 그러한 것이다. 제생들은 반드시 가기 쉬운 지름길을 찾아서 갈 것이요, 가기 어려운 울퉁불퉁한 돌길이나 뒤얽힌 길을 향아여 가지 말라. (p.295) |
- 가열찬 정신의 다산 (p.150~151)
<주역사전> <상례사전>
-만약 내가 사면을 받게 되어 이 두가지 책만이라도 후세에 전해진다면 나머지 책들은 없애버린다해도 괜찮다. 나는 임술년(1802)봄부터 책을 저술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여 붓과 벼루를 옆에 두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해왔다. 그 결과 왼쪽 팔이 마비되어 폐인이 다 되어가고 시력은 아주 형편없이 나빠져 오직 안경에만 의존하고 있는데,,.....
-나 죽은 후에 아무리 청결한 희생과 풍성한 음식으로 제사를 지내준다 하여도 내가 흠향하고 기뻐하기는 내 책 한 편 읽어주고 내 책 한 구절이라도 베껴두는 일보다 못하게 여길 것이니,.... |
5. 남새밭 가꾸는 일 (p.65~66)
시골에 살면서 과수원이나 남새밭을 가꾸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버림받는 일이 될 것이다. 만송, 전나무, 뽕나무, 배나무, 능금나무, 닥나무, 옻나무, 석류, 포도나무, 파초, 버드나무, 소나무, 국화 (너희들이 국화를 한이랑 심었다고 들었는데 국화 한이랑은 가난한 선비의 몇 달 식량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니 한낱 꽃구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 생지황, 끼무룻, 천궁, 쪽나무, 꼭두서니 등에도 모두 마음을 기울여 잘 가꾸어보도록 하여라. (......) 절약하고 본농사에 힘쓰면서 부업으로 아름다운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이 남새밭 가꾸는 일이다. (p.65 ~ 66) |
6. 놓치고 싶지 않은 다산의 면모들
-p.211 밥파는 노파에게서 “천지간에 지극히 정밀하고 오묘한 진리”를 듣고 크게 깨달아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다.
-p.218 서로 감응하는 재료의 성질들에 대해 알다.
-p.189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한때의 재해를 당했다 하여 청운의 뜻을 꺽어서는 안된다.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항상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듯한 기상을 품고서 천지를 조그마하게 보고 우주도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옳다.
7.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이렇게 훌륭한 다산이 있는데 왜 후대 사람들은-특히 근자에 - 연암을 추켜세우고 띄우는 것일까? 두 사람은 거의 비슷한 연대에 살았었다.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없었을까. 이런 의문이 들기 시작해서 네이버에 물어보았다. 이 질문은 나만의 궁금증이 아니었다. 이미 고미숙은 <두개의 별 두 개의 지도> 2013년 (p.13)에서 이 질문에 호쾌한 답을 주고 있었다
연암과 다산의 나이차는 25세,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연암이 한창 청년기의 방황을 겪고 있을 때, 다산은 갓 태어난 어린아이였다. 연암이 거리에서 벗들과 어울려 중년을 통과하고 있을 때, 다산은 과거의 문턱을 넘기 위해 분투하는 수험생에 불과했다. 연암의 명성과 의론이 장안을 뒤흔들고 있을 때, 다산은 성균관 태학생으로 정조대왕이 제출하는 과제들을 수행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p.13-14)
...그리고 더 결정적으로 서로 엇갈리던 둘의 동선이 마침내 교차하는 순간이 온다. 연암이 쉰이 다 되어 늦깍이로 생게형 관직에 나섰을 때, 그때 다산은 왕의 남자로 승승장구하던 중이었다. ....그들은 주요 사건들에 직,간접으로 연루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만나지 않았다. 더 놀랍게도 서로에게 노코멘트했다. 연암의 글 속에 다산의 흔적이 없다, 다산의 글 속엔 <열하일기>에 대한 언급이 더러 있지만 연암 사후 한참 시간이 지난 뒤다.
둘의 초상화를 보라. 한 사람은 거구에 비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작고 단단하다. 내뿜는 아우라와 카리스마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 신체적 차이만큼이나 둘의 인생궤적도 또한 판이하다. 문체와 세계관, 사상과 윤리 등의 차이는 마치 평행선처럼 팽팽하다. (p.16) |
*고미숙의 결론
연암과 다산은 우리들의 창공을 비추는 살아있는 별이다. 이 두 별을 하나의 자리로 연결하려고 애쓰는 일은 부질없는 노릇이다. 지금 중요한 건 이 두 개의 별을 각자 빛나게 해주는 일이다. 두 개의 별은 두 개의 지도다, 두 지도는 리듬과 강밀도가, 행로와 과정이 전혀 다르다. 이 다름에 눈뜨는 그만큼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질 것이다. (p.410)
*국문학자 박희병의 답;
연암과 다산은 상당한 기간 동안 동시대를 함께 살았으므로 서로 그 이름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암은 당색이 노론이고 다산은 당색이 남인이었기에 서로 만나거나 접촉한 일은 없었다. 당시는 당색이 다르면 보통 사귀거나 접촉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다산은 유배기에 쓴 <목민심서>의 몇 군데에 연암이 쓴 <열하일기>를 인용해 놓고 있다. <열하일기>를 읽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연암의 문집 <연암집>에는 일절 다산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풍편에 이름을 들어 서로 알고는 있었을 테지만 살아생전 서로 교류를 하지는 않았던 거다.
8. 다산과 연암의 편지 _ 박희병
나는 다산과 연암을 더 비교해 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연암에겐 60세 되던 1706년(정조20) 정월에 시작되어 이듬해 8월에 끝낸 가족과 벗에게 보낸 편지 33통이 있었다. 2백여년이 지난 <연암선생 서간첩>(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박희병역)을 읽으며 다산의 편지글과 비교해 보았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다산이 48세 때인 1810년대에 쓴 것. 이 과정에서 연암을 번역한 박희병을 다시 만났다.
* 박희병
박희병은 <엄마의 마지막 말들>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후로 그의 저서들 중 읽기 수월해 보이는 책들을 무작정 빌려와 더러는 읽고 더러는 목차만 바라보며 곁에 두었었다. <엄마의 마지막 말들>을 통해 그의 글과 인간 됨됨이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간간이 드러나는 그의 학자적 면모에도 매료되었었다. 다산을 읽으며 연암을 찾고 연암의 책을 찾다가 다시 박희병의 근황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21년 8월 정년을 앞두고 줌으로 마지막 강의를 하였고 녹화한 강의를 책으로 출간했다. <한국고전문학사 강의 1, 2, 3>. 그의 마지막 강의라는 소식에 수강인원은 배로 늘어났고 그 수강생 가운데는 일본에서 듣는 수강생, 다른 전공 분야의 학생들과 교수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돌베개에서 연두, 옥색, 파랑의 표지로 3권의 책을 펴냈다. 3권 제27강 추방된 자의 글쓰기-정약용 편에 내가 알고 싶었던 정약용에 관한 소상한 이야기가 나온다. 연암도 같은 책 제24강 조선의 문호 박지원 편에 실렸음은 물론이다. 난 가슴이 뛰고 왠지 벅차오른다. 이 세 권을 완독하리라.고 마음 먹는다.
*3권의 마지막 단락을 마음속에 새겨둔다.
Q : ...학생들에게 바라는 연구 태도를 한 가지만 꼽는다면?
A : 한국고전문학 공부뿐만 아니라 공부하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실존이 개입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엇보다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지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진실한 마음이기도 하고, 살뜰한 마음이기도 하죠. 건성건성 길 가는 사람 보듯 텍스트나 작품을 대하지 말고, 이것이 ’나‘의 삶, ’나‘의 실존과 관련되는 일이라고 여기며 정성스런 마음으로 연구를 하는 것이 자기 향상에도 도움이 되고 텍스트의 깊은 이해에도 도움이 되리라 봐요.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학문 행위도 재미가 있어야 지속될 수 있습니다만, 단순한 재미를 넘어서는 자세와 태도를 저는 극히 어두웠던 대학 시절에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나의 국문학 연구, 나의 글쓰기와 사유 행위, 나의 학문 행위는 한갓 도락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통해 나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한편 이 세상에 뭔가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거죠. 이런 생각이 지금까지 제 공부의 원동력이 되어 오지 않았나 합니다.’ (p.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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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나’의 실존을 텍스트에 개입시켜서 나대로는 새로운 진실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드러내려는 작업을 일관되게 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국문학 연구라는 것은 결국에는 나와 작가 간의 대화이기도 하고, 나와 텍스트의 대화이기도 한데, 거기서 새로운 것이 창조되죠. 그래서 ‘나’를 어떻게 만들어 나가는지가 우선 중요하고, 또 하나는 텍스트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둘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삶에서 나를 어떻게 만들어 나가고 나의 실존을 얼마나 깊이 있게 만들어 나가는지가 텍스트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데 관건이 되며, 거꾸로 텍스트의 깊은 이해는 나를 그런 인간으로 만들어 나가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죠.’ (p.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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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책 말미에 김소월의 <산유화> 전문을 한 페이지에, 다른 페이지에는 2021학년도 1학기 한국고전문학사 수강생 및 청강생 명단을 수록했다. 박희병 교수의 따뜻하고 섬세한 마음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9. 다산과 비유로 말하기
다산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성경의 몇몇 구절들을 떠올렸다. 단호함과 쩌렁한 호령으로 때로는 적절한 비유를 통한 다산의 가르침은 예수의 독특한 비유법과 닮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다산은 천주교 세례를 받지 않았던가.
저 사람이 나에게 돌을 던지면 아름다운 옥으로 갚아주고, 칼이나 창을 들이대도 맛있는 술로 대접해주면, 눈을 흘기고 화를 내며 다두고 소람을 피워 집안을 뒤엎은 뒤에야 끈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p.160)
가난을 걱정하는 제자에게; “가난한 선비가 정월 초하룻날 앉아서 일년의 양식을 계산해보면, 참으로 아득하여 하루라도 굶주림을 면할 날이 없을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그믐날 저녁에 이르러 보면, 의연히 여덟식구가 모두 살아 한 사람도 줄어든 이가 없다. 고개를 돌려 거슬러 생각해보아도 그러한 까닭을 알 수 없다. 너는 이러한 이치를 깨달았느냐? 누에가 알에서 나올 만하면 뽕나무잎이 나오고,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울음소리를 한번 내면 어머니의 젖이 이미 줄줄 아래로 흘러내리니, 양식 또한 어찌 근심할 것이랴?” (p.315)
“도에 대한 근심을 지녀야지, 가난에만 근심을 두어서는 안되네. 어떤 사람의 예를 들어보세. 그가 일생 동안 아름다운 옷에 맛있는 음식을 먹고 거대한 집과 성대한 장막 속에서 살면서도 도를 듣지 못하고 죽었다면 죽는 그날로 몸과 함께 이름도 없어져버리네. 그런 사람이야 동물과 같아서 공작, 비취, 법, 표범, 황새, 두루미, 거미 등의 무리와 다를 게 없는 것이네.” (p.327)
천리 먼 곳에서 찾아 온, 문장에 뜻을 둔 제자에게; “그날 아이 학유가 나무를 심었다. 심어놓은 나무를 가리키면서 비유하여 설명해주었다. 사람에게 있어서 문장은 풀이나 나무로 보면 아름다운 꽃과 같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나무를 심을 때 그 뿌리를 북돋아주어 나무의 줄기가 안정되게만 해줄 뿐이다. 그렇게 하고 나면 나무에 진액이 오르고 가지와 잎사귀가 돋아나면 그때에야 꽃도 피어난다.”(p.329)
매양 봄바람이 불어 초목이 싹트고 범나비가 홀연히 꽃다운 풀에 가득 모여드는 때, 법승들과 엣 무덤사이를 노닐면서 무덤이 연달아 총총히 있는 것을 보고 술 한잔 따라붓고 한 말(p.317~318); “무덤에 묻힌 사람이여, 이 술을 마셨는가? 그대, 옛날 세상에 있을 때 조그만 이익을 다투고 시시각각으로 재물을 모으느라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부릅뜨며, 애쓰고 허덕이며, 오직 손에 움켜쥐려고만 했는가? 또한 이성을 그리고 고운 짝을 찾아 욕정은 불타고 음욕은 치솟아 여색이 노닐며 따스한 보금자리에서 단꿈을 꾸느라 천지간에 다른 일이 있는 줄 알지 못했는가? 가세를 빙자하여 남을 오만스럽게 대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에게 으르렁거리며 스스로를 높인 적은 없는가? 그대가 이 세상을 떠날 때 한꾸러미의 돈이라도 가지고 갔는지 모르겠네. 그리고 지금 그대는 부부가 한무덤 속에서 능히 예전처럼 즐기고 있는가? 내가 지금 그대를 이와 같이 괴롭혔는데 그대는 능히 나를 꾸짖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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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쓰면서 나는 4대 복음서 중 하나라도 다시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성경과 다산의 어투, 비유적 가르침의 유사성을 찾고자 함이었다. 재미있게도 고미숙의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부분을 만났다.
‘다산 사상은 기독교와 구조적으로 참 닮았다. 그는 분명 선진고경을 말하고 있는데, 왜 그 목소리는 신약성서의 울림을 지닌 것일까. 목민관의 소명을 말하는데 왜 양떼를 기르는 목자의 실루엣이 느껴지는 것일까. 상제와 요순을 말하는데 왜 천지를 창조하고 심판하는 여호와의 거룩한 음성이 느껴지는 것일까.’ (p.400~401) |
그리고, 박희병에게서 해답을 찾았다.
...정약용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귀국한 지 한 달 뒤인 1784년 4월 15일에 이벽에게서 <천주실의>와 <칠극> 등 천주교 서적을 빌려 읽어 봤습니다.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은 이때부터 비롯되죠. 이로부터 7년 뒤인 1791년 진산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때까지 정약용은 7,8년간 천주교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는 사실입니다. 정약용 스스로도 그 점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약용은 진산 사건 이후 천주교에서 완전히 손을 뗐습니다. 이는 <돌아가신 둘째형님 묘지명>과 <자찬묘지명>에서 확인됩니다. 정약용은 그답게 오직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p.208) 박희병의 <한국고전문학사 강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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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8년간이라면 짧지 않은 시간이다. 22살에서 30살 사이, 청년기에 천주교에 빠져있었다면 상당히 집중해서 성경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온전히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청년기에 가슴속에 새겨진 성경이 이후로 글쓰기에서 발효하여 정약용만의 창의적인 비유들로 나오지 않았을까.
* 진산사건
1791년(정조 15년) 전라도 진산(珍山)에 사는 윤지충(尹持忠), 권상연(權尙然)이라는 두 선비가 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운 사건이다. 윤지충은 정약용(丁若鏞)과 외가 친척간이었으며 정약용은 진산사건으로 노론의 정치공세를 받았다.
10. 박희병이 보는 다산
정약용은 학자로서 그리고 사상가로서 정직성과 양심이 보통 사람을 훨씬 능가하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정직성과 양심을 빼면 정약용이라는 인간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정약용의 학문과 사상과 글쓰기는 정직성과 양심이 그 기초가 되고 있거든요. 그러므로 정약용이 천주교도이면서 그것을 숨기고 글쓰기와 사상 행위를 했다고 한다면, 이는 심중한 자기기만이고 사상가 혹은 학자로서의 중대한 결격사유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실제에도 맞지 않지만, 정직성과 양심을 중시한 정약용이라는 인간의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정약용이 죽을 때까지 천주교 신자였다는 일각의 주장은 정약용에 대한 오독을 넘어 모욕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p.209) 정약용은 자신의 본래 공간에서 추방되어 유배지에서 17년의 긴 시간을 어떻게 벼터 낼 수 있었을까요? 자신의 전 존재를 건 학문적 글쓰기를 통해서, 그리고 백성의 고통을 대변하는 글쓰기를 통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글쓰기가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한 정약용을 살아 있게 한 원동력이자 그를 구원으로 이끈 빛이었습니다. (P.225) |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정약용의 경학 연구는 시대를 선취하거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의의를 갖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런 지적과는 별도로 정약용이 경학 연구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있던 자신을 부지하고 자신의 실존을 떠받치는 행위였다는 점에 유의해야 하지 않을까. 정약용은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 자신이 살아갈 근거를 바로 이 경학 연구에서 찾았으리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그리 힘든 여건에서도 목숨을 걸고 거기에 골몰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정약용의 경학 연구는 추방된 자의 글쓰기로서 양면을 보여 준다. 한 면은 자기 존재를 건 혼신의 글쓰기라는 점이다. 이 점에서 비장미가 느껴진다. 다른 한 면은 자신의 처지에 제약되어 경학 바깥을 사유하며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p.213~214) *경학=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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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풀어보고 싶은 대목;
(p.270~271) 이제 ... ~ 본심이겠습니까?
유배지에서 풀려나 돌아가고픈 마음 : 주역과 음악공부가 가능한 유배지에 남아있기
* <사암 정약용 전기> 정해렴, 창비 (2022)
정약용의 후손이자 수십년간 도서편집 분야에 종사하며 ‘전설의 편집자’로 알려진 정해렴 전 창작과비평사 및 현대실학사 대표의 역작이다
-에필로그-
다산은 정확히 262년전 태어나 활동한 인물이다.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배운 핏기없는 종이속 인물이 아니라 200여 년 전에 죽었으되 형형히 살아있는 최고의 정신! 그토록 위대한 인물과 처음으로 대면하는 엄청난 경험을 한 느낌이 든다. 그의 치열함과 강직함에 압도당한다. 그러나 ‘그의 신발끈도 맬 자격이 없는’ 나는 아주 미시적으로 그가 한 말 하나를 붙잡고 있다.
자주 내 입속을 맴도는 다산의 말은;
‘단 한가지 속일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건 자기의 입과 입술이다. 아무리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생각하여 입과 입술을 속여서 잠깐 동안만 지내고 보면 배고픔은 가셔서 ......’
‘소식과 절식’을 시도해보려는 나에게 아주 도움이 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 요한복음을 읽다가 만난 시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1
무엇이 착함이고 무엇이 악함인가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려
나는 천수경을 외었다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해주소서
훈제 통닭의 일생이여
나는 영원히 사람이다 바퀴벌레조차도
자신을 사람으로 의식한다
누가 손가락질하랴
나는 어질지 않았다
나는 꿈을 밀수하러 부둣가를 서성거린다
낡은 비유만이 내게 허용되어 있어라, 바람 없는 바다의 돛배처럼
바다도 없이, 바다도 없이, 나는 항해한다
아버지, 알고 보니 제가 주였나이다, 나의 십자가는 정전되었다
심심산골의 푸른 구름을 부러워하지 않으리
망망한 저 바다의 물, 나는 그 맛을 아네
그 맛의 이름은 적멸이다, 나는 적멸로 궁궐을 짓고 아예 들어앉는다
나는 지옥을 믿어, 쾌락과 나라는 존재를 믿듯이
저 저 미륵전이 내 의식의 그림자라니
그럼 나는 의식을 버리리라, 미륵전이 갈 곳, 알지 못해도
아버지, 저는 당신의 가스와 기름과 향로로 만들어졌나이다
하느님은 딴따라다
남사당 가락을 듣자마자 가출해 버린 소녀의 후손?
할아버지는, 그 소녀를 영영 이해하지 못한다
할아버지도 그 소녀 의식의 그림자이다
그림자와 의식은 동일하니?
그럼 나는 뭐니? 나는 아귀의 마음을 이해해
배가 고파
한강이 푸른 사파이어 같다는 자는
이 거대한 배고픔을 이해 못해
나는 하도 급해 불을 마셨다, 다행히 비유적으로 뜨거웠다
나도 네게 비유로만 말하리라
달은 노래한다, 구름에 나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상형을, 나는 고슴도치 시절에 만난 적이 있다
시간 있으세요, 장미 한 송이의 욕정이랍니다
내 예쁜 가시를 보아주세요
고드름의 일생은 내 적성에 맞아
아버지, 제가 주였나이다, 제 십자가 때문에 열대 우림이 잘리고 있어요
나는 운수를 믿는다 바다 없이 항해할 때처럼
눈물도 없이 나는 운다 울었다
너무 팔아먹을 것이 없었으므로
거꾸로 서 꿈의 세상에서, 가끔 나는 바로 선다
깜박 꿈이란 걸 잊은 채 말이다
깜박 꿈이란 걸 잊은 채 말이다
허나 고런 때래야,
겨우 시가 되는 것이다
진이정 시인 (1959년생 33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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