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중건과 흥선대원군
-
경복궁 중건 감독
흥선대원군의 흔적을 찾아 경복궁을 방문했다. 현대화된 도심에 전통을 지닌 경복궁이 있다는 것은 자랑스럽다.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이자 정궁이다. 1395년 건립되어 임진왜란 시 소실되었다. 국가 재정의 여유가 없어 270여 년간 폐허로 방치되다가 고종 시 중건했다. 대원군의 과감한 개혁정치와 쇄국정책(통상수교거부정책)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료로는 확인되지 않고, 경복궁 중건은 승정원 일기와 고종실록, 경복궁 영건일기에, 경복궁중건천일의 기록에 의해 확인된다.
대원군의 공식적인 업적은 경복궁 중건 감독이라고 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수렴청정을 하는 조대비의 명에 의해 중건 총 책임자가 되었다. 1865년 4월에 시작하여 40개월이 지난 1868년 7월에 완성해 고종이 창덕궁에서 이곳으로 이어했다. 중건된 규모는 7,700칸, 9,000칸 등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1395년 완공 당시의 755칸에 비해 10배 이상으로 커졌다.
왕권강화와 왕실 권위 회복을 위한 중건 당위성에 대해 모두 공감하여 초기에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금전을 내고, 노역에 참여했다. 궁 주변 수용된 민가 보상, 대규모 토목공사의 자재비, 인건비 등으로 비용이 천문학적 규모(정조 때 화성 건축비의 9배)로 늘어나 나중에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국방이나 민생을 위한 지출이 불가능할 정도로 한 것은 문제이다. 하지만 화마, 병인양요, 바로 인한 지연에도 불구하고 경복궁 완공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대원군은 중건 내내 감독 역할에 충실했다. 전반적인 사안은 조정에서 결정했다. 원납전(기부금) 징수로 모자라 당백전 발행을 하여 물가상승의 원인이 되었다. 새로운 화폐 발행은 국가에서 결정하고 주전소에서 주조했으니 책임이 석파에게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중건 공사는 궁성, 내전, 외전, 경회루, 별전, 행각의 순서로 진행했다.
일제에 의한 경복궁 훼손과 복원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을 위해 근정문 남쪽의 흥례문과 영제교 주위의 모든 시설이 철거되었고, 1914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전각 대부분을 헐어버렸다. 4,000여 칸의 건물이 방매되거나 철거되어 그 규모가 10분의 1 정도로 축소되었다. 홍문관, 비현각, 자선당, 선원전과 같은 중요전각은 경매되어 일본인 개인 집이나 요정, 사당, 개인박물관, 사찰을 짓는 데 쓰였다. 철거된 빈터에는 조선박물관과 미술관, 박물관 관리사무소를 세웠고 아무 상관없는 불탑과 부도 같은 유물을 배치했다. 본격적인 경복궁 복원은 1990년부터 추진되어 강녕전, 교태전 등과 자선당(동궁) 소속의 비현각이 복원되었다. 1995년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였으며, 2001년 그 자리에 흥례문 일곽과 영제교를 복원했다. 광화문과 이어진 담장 동서쪽 끝 모서리에 있던 망루 서십자각은 아예 사라져버렸고 동십자각은 도로 위에 놓여있다. 복원작업은 1990년부터 2030년까지 중건 시 규모의 75%를 목표로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근정전
경복궁 관람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성실하게 감독해서 성공적인 중건을 한 대원군에게 감사하며 천천히 관람했다. 대원군이 추락한 왕실 귄위를 회복하기 위해 건물 하나 하나에 신경을 쓴 흔적을 찾아보았다. 효과적으로 돌아보기 위해 외전, 내전, 후원 순으로 정했다. 외전 영역에는 근정전, 사정전이 포함된다. 내전 영역은 왕과 왕실 가족이 생활하던 공간으로 강녕전, 교태전, 자경전, 자선당이 있다. 후원 영역은 왕실 가족의 휴식공간으로, 큰 연회를 베풀던 경회루, 왕실 정원 향원정이 해당한다. 경복궁의 전각은 정-루-헌-재-각-합-당-전의 순서로 주요성이 커진다. 최고 높은 단계의 전각은 전이다. 3시간 이상 왕궁 건축의 아름다움에 빠져 정신없이 관람했지만 너무도 많은 문과 전각이 있어 주마간산으로 보았다. 경복궁 전각을 감상하는 데에는 유래, 기능과 특징에 대한 조사 연구가 필요하다. 지식이 부족해 감상의 한계를 느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생각났다. 공부하고 다시 와서 제대로 관람하겠다고 다짐했다.
흥례문, 근정문을 지나면 근정전이 나타나고, 바로 뒤에 사정전이 있다. 경복궁의 법전인 근정전은 상징적 통치 행위와 법령 공포와 같은 중요행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용상 뒤에 일월오봉도가 걸려있다.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사방의 회랑 중간에는 문이 하나씩 있어서 정전으로 향하는 통로 구실을 한다. 사정전은 왕의 집무실인 편전이다. 사정전의 부속건물인 동쪽의 만춘전과 서쪽의 천추전에는 구들이 놓이고 온돌이 깔린 것을 보아 겨울에는 이곳에서 집무를 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정전
강녕전은 국왕의 처소로 쓰이던 건물로, 강녕전 앞 월대는 왕실 가족이나 측근 관료들과 함께 사적인 행사 시 사용되었다. 경회루는 경복궁에서 사시사철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국왕이 사신을 접대하거나 공신을 위한 연회 장소로 사용한 일종의 영빈관이었다. 경회의 의미는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서로 만난다는 것이다.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면서 내명부를 비롯해 왕실의 각종 업무를 주관하는 공간이다. 아미산은 경회루 연못을 파면서 나온 흙으로 쌓은 화계로, 붉은 굴뚝과 함께 사철 아름다운 모습을 이룬다. 자경전은 고종이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인 조대비를 위해 옛 자미당터에 지은 건물로, 여성을 위한 공간답게 건물 곳곳에서 은근하면서도 화려한 장식을 볼 수 있다. 자경전의 뒤에 십장생 굴뚝이 있다.
강녕전
교태전
아미산
향원정은 왕이 휴식과 풍류를 즐기거나 신하들과 간소하게 시 모임을 즐기던 곳이다. 섬의 남쪽으로는 취향교가 놓여 있다. 경복궁 후원 영역의 중심점을 이루면서 백악의 수려한 모습 등 주변 경관과 썩 잘 어울린다. 공사 중이어서 과거 모습을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건청궁은 고종이 명성황후를 위해 지은 별궁이다. 이곳 곤녕합은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된 비극적인 장소이다. 중건된 경복궁에는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덕수궁)을 지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당대 최고의 건축공법과 미감이 잘 나타나 있어 그 시대의 문화적 역량을 엿볼 수 있다. 백악산(북악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향원정을 거쳐 경회루로 보내 청계전으로 흘러가게 했다. 침수피해가 없는 과학적 배수체제이다.
경회루
광화문
도로에 놓여있는 동십자각
문화가 경쟁력이다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상징이다. 상징은 국민을 단합하는 힘이 있어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왕조체제를 좋아하지 않는다. 왕조를 오래 유지한 나라는 대부분 서구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왕조체제는 효율성이 떨어지는 정치 시스템이 아닐까. 하지만 태어난 나라와 부모를 부인할 수 없듯이 조선문화가 우리의 뿌리인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어느 나라나 왕조시대를 거쳐 왔다. 경복궁은 고급스러운 왕조문화의 결정체이다. 문화와 전통을 기반으로 창조가 가능하다. 문화가 경쟁력인 시대이다. 우리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켜 후손에게 전달할 책임이 있다. 경복궁의 복원은 중요하다.
50+시민기자단 최원국 기자(hev5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