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노년유니온의 터무늬있는집 시민출자 약정 모습
터무늬있는집 출자기금은 얼굴 있는 돈입니다
시민출자 청년주택 터무늬있는집의 핵심은 돈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한 사람의 출자자는 가족, 친구, 동료들에게 출자를 권유하기도 하고 직접 청년들과 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따져보니 160명(곳)의 출자자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금액으로 치면 725,300,000원이 지난 3년간 모였습니다. 1인 평균 출자액은 440만 원 정도가 됩니다. 금액별로 가장 많은 단위는 100만 원 이상 ~ 500만 원 미만 사이입니다. (20년 11월 말 기준)
또, 출자한 분 중에는 속한 회사나 단체와 함께 출자하는 분들도 꽤 여럿 있습니다. 그중 한 분이 고현종 출자자님입니다. 2018년 출자 운동을 막 시작할 무렵 터무늬제작소는 노년유니온 어르신들이 회비로 모은 기금을 출자해 주신다고 해 고현종 사무처장을 처음 만났습니다. 다음 해에는 본인 이름으로 출자와 유관한 단체의 출자로 한 번 더 뵈었고, 출자자모임과 집들이 때까지 포함하면 출자자님을 족히 예닐곱 번은 뵌 것 같습니다.
또 출자하시게요?
2019년 말, 작년 단체 출자에 이어 개인출자를 하게 된 계기를 물었을 때 출자자님은 이런 답을 해주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옷을 화장실에서 입고, 벗습니다. 한 방에서 아내와 딸이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생활했습니다. 부부간 애정 표현도 못 했습니다. 아이들도 자매간 수다를 떨지 못했습니다. 늘 저와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소곤댔습니다.
22살, 20살이 된 두 딸은 집에서 독립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들만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전화하고 떠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람에도 딸 들은 독립할 수 없습니다. 알바해서 버는 돈으로는 방을 얻어서 월세를 부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딸 또래의 아이들도 사정은 비슷하겠지요. 부모로서, 기성세대로서 미안함이 출자를 이어지게 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들은 출자자님의 ‘주거여정’
터무늬있는집 담당자인 저는 때때로 출자자님들께 청년시절 어떤 주거 여정을 겪었고, 왜 출자자로 함께하게 되셨는지 나눠주셨으면 좋겠다고 실례를 무릅쓰고 묻습니다. 그렇게 들은 50+ 출자자 고현종님의 집, 가족, 삶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제 마음에 남아 ‘넉넉한 어른’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했습니다.
50+ 독자님들과도 이 따뜻한 이야기를 함께 나눕니다.
겨울이면 생각나는 우리 집 냄새, 풍경이 있습니다
그 시절 집에서 수공업을 하던 작업 풍경
‘또 쓰러졌다. 벌써 세 번째다.’
첫 번째는 본드에 취해서, 두 번은 고무풀에 취해서 쓰러졌습니다. 제 부모님은 가방을 만드는 가내 수공업을 하셨습니다. 가방을 만드는 과정에서 본드와 고무풀을 이용해서 원단과 내피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었지요. 그날도 제 방에서 가로세로 1미터 되는 원단 100장에 고무 풀칠하다가 사달이 난 겁니다. 한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방문을 열고 환기하며 고무풀 칠을 했지만, 많은 양의 고무풀 냄새에 몸이 버텨내질 못했습니다.
나와 동생들에게는 ‘집’이었지만, 동네 사람들은 ‘공장’이라고 불렀습니다
1983년 서울시 동대문구 골목의 한 풍경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저는 낮에는 부모님 일을 거들고 저녁에는 학교에 갔습니다. 점심시간에 공장의 형들과 같이 밥을 먹고 대문 밖에서 앉아 쉬고 있는데,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초등학생 아이 등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지나가면서 저를 가리키며 이런 말을 했었지요.
“너 벌써 학교 안 가고 그러면 저기 앉아 있는 형처럼 공장에서 일한다.”
나는 그저 집 앞에서 앉아 있었는데, 그 엄마 눈에는 공장 앞에서 쉬고 있는 공돌이로 보였나 봅니다. 제 옷차림을 생각해보았습니다. 티셔츠와 운동복 바지에 군데군데 붙어있는 본드, 고무풀 자국. 송충이처럼 구불구불 붙어있는 실밥. 낮에 이런 차림으로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소년을 학생으로 볼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일하는 형들을 나와 동생은 형이라고 불렀고, 남들은 공돌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집은 방이 3개였습니다
1983년 서울시 동대문구 골목의 한 풍경
그 시절 안방은 엄마, 아빠가 주무시고, 마루가 있고 마루와 연결된 곳에 공장의 형들이 자는 방이 있고 마당을 지나 화장실 가는 길에 제 방이 있었습니다. 제 방은 동생 둘과 함께 공부하는 방이었고요.
우리 집을 떠올려보면 만화영화 마징가 Z에 나오는 아수라 백작이 생각납니다. 아수라 백작은 남자 반, 여자 반의 모습을 했습니다. 밤에는 잠을 자거나 공부하는 방. 동생들 학교 가고 엄마, 아버지, 공장의 형들이 일어나면, 일어난 자리가 바로 공장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밥상을 놓으면 집이요, 상을 치우고 앉은뱅이 작업대를 놓으면 공장이었습니다.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엄마는 제 이마에 수건을 올려놓고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셨습니다. "온전히 공부시키지도 못하고, 공부할 환경도 마련해 주지 않고, 집인지 공장인지 모를 곳에서 참으로 미안하다…”
엄마의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흘러내리며 내 눈물을 끌어당겼습니다.
일하는 공간과 집이 달랐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가방공장이 망하고 나서 일하는 공간과 집이 구분되었습니다. 구분은 되었지만, 사실 집이라는 공간은 아늑함을 주지 못했습니다. 결혼해서 까지도요.
화장실이 바깥에 있던 신혼집에서
어린시절 아이들과 함께찍은 고현종 출자자님의 가족사진
대, 소변을 보거나, 샤워할 때면 마치 해수욕장에 있는 간이 화장실, 샤워장에서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갓난쟁이 딸 둘을 번갈아 화장실에서 목욕을 시키고, 타올에 감싸 집으로 향하는 길이 왜 이리 긴지, 타올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터뜨리는 딸의 울음이 제 눈물을 끌어당겼던 기억이 납니다.
결혼생활 6년 만에 화장실이 실내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화장실만 안에 있을 뿐 딸 둘과 아내와 나는 한 방에서 먹고 잤습니다. 큰딸 중학교 일 학년, 둘째 딸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한 방 생활이 이어졌지요.
아침, 저녁으로 가족이 번갈아 가며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부부간의 애정 표현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도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지 못했고요. 아내와 나는 아이들 눈치를 살폈고, 딸들도 우리를 조심스러워했던 때였습니다.
결혼생활 20년 동안 5번의 이사 후 입주한 공공임대주택
그때마다 집주인은 말했습니다. “전세금 올려 달라고 안 할 테니, 집 사서 나갈 때까지 편히 있어.” 하지만 2년마다 전세금을 올려줘야 했고, 월세 전환까지도 요구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겨우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했습니다. 두 딸의 방이 생겼고, 나와 아내의 공간도 생겼습니다. 주거는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을 때, 그때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할 때가 우리가 보수화되고 있다는 증거야. 아직도 방 한 칸에서 네 식구가 생활하고, 창문 없는 고시원 방에 빨래를 널고, 밥 먹고 자는 사람이 많아. 모든 사람이 최소한 우리같이 공공임대주택에서 주거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때까지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아!”
내가 출자자가 되고, 함께 출자 운동을 하게 된 건
아내의 말을 들었을 때 고무풀 냄새를 맡고 쓰러졌던 내 방에서 흘리던 엄마의 눈물, 한겨울 집 바깥에 있던 화장실에서 큰딸을 씻기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울던 딸과 내 눈물이 되살아났습니다.
저는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최소한 나만큼의 주거 안정을 이루도록 뭐라도 하자!” 이 생각이 제가 어르신들과 청년 전세보증금 출자를 조직하고, 개인적으로도 터무늬있는집에 출자한 이유입니다.
아직 세상은 선한 의지를 갖고 행동하는 사람이 있어서 살만합니다.
사진 및 글 l 터무늬있는집 출자단체 노년유니온 고현종 사무처장
터무늬있는집은 도시 청년들의 열악한 주거실태와 과다한 주거비 부담 등, 터무니없는 청년들의 주거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 이를 빗대어 만든 세대 협력형 청년주택으로, 시민이 자발적으로 출자해 설립한 기금을 바탕으로 전세보증금을 조성하고 입주 청년들은 별도의 보증금 없이 저렴한 월 사용료를 내고 거주하는 청년주택입니다. 기존 임대주택·사회주택과 달리 입주자로 개인이 아닌 청년 단체를 선정하고, 청년들이 지역사회에서 창업, 공동체간 교류 등의 지역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