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자 외 출입금지'  딸은 중학교 1학년이 되면서 자신의 방문 앞에 작은 팻말을 붙여 놓았다. 나는 고민했다. 관계자라면 누구까지 해당될까? 나는 엄마니까 관계자에 해당되겠지.

 

맞벌이 부부였던 우리는 자식을 낳지 말자고 결심했다. 그러나 시부모님의 생각은 달랐고 간절한 설득 끝에 딸을 낳았다. 그러자 자식은 둘은 되어야 한다는 주위의 끊임없는 설득이 있었지만 우리 부부는 단호하게 자식 하나로 만족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는 슈퍼우먼 엄마가 모든 스케줄을 짜고 앞장서서 진두지휘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팻말이었음을 어리석게도 뒤늦게 깨달았다. 차분하고 여유롭고 부드럽지만,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딸은 슈퍼우먼이 무척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슈퍼우먼이 아닌 엄마는 대학교 2학년이 된 딸과 방문에 붙여 놓았던 팻말을 보며 키득키득 웃곤 한다.

 

사실 요즘도 팻말이 붙은 방문을 열 때마다 다짐을 한다. 자식의 삶에 사랑으로 포장된 간섭과 헌신을 하지 말자고. 가끔 사랑의 충고-딸에게는 잔소리이겠지만-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고 할때면 혀를 깨물어 보기도 한다. 자식을 위한 기도는 조용한 곳에서 혼자 한다.

 

 

 

 

나의 엄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엄마는 자식 셋을 낳아 기르며 학교를 그만두셨지만 엄마 친구들은 세월이 흘러 교감, 교장이 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가정주부로만 살아온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를 내조하며 자식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시던 엄마의 삶에서 엄마는 없었다. 남편 사업이 잘되기를 바라고 자식들이 공부 잘해서 성공하기를 바라며, 그것이 곧 본인이 행복해지는 것이라 믿고 한평생을 살았다. 성모상과 예수님 상 앞에 놓인 커다란 초에 불이 켜지면 시작되던 엄마의 기도. 가끔은 그 기도가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기도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린 나는 죄책감마저 들었다.

 

엄마는 자신의 삶에서 실현하지 못한 것들을 자식들이 이루고 누리고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사춘기는 고등학교 때 찾아왔고, 난 엄마처럼 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본인의 삶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엄마에게 가슴 아픈 이야기도 많이 쏟아내었다.

 

 

 

 

나는 결혼 후 딸을 낳고서야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었다. 실제로 맞벌이 부부가 누군가의 도움 없이 아이를 키우며 생활하기는 불가능하다. 오빠네 아이를 봐주시던 엄마는 내가 아이를 낳자 손녀를 한없이 예뻐하시며 키워주셨다.

 

한평생 가정주부로 자식과 남편을 위해 살아오다가 손주들을 위해 다시 희생하신 엄마는 손주들이 성장해서 사회인, 대학생이 되고 나니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다. 그때부터 엄마는 외로움과 지독한 싸움을 벌이며 삶을 견뎌내지 않았을까?

 

 

 

나는 엄마의 희생으로 아이를 낳고도 계속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엄마가 살아온 희생적인 삶이 싫다. 누군가 한사람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따뜻한 동화같은 삶은 정중히 거절하고 싶다.

 

또한 엄마를 생각하면 명치 끝이 아려오는 저릿함을 내 딸은 겪지 않기를 희망한다. 나도, 딸도 삶의 주체가 각자이기를 바란다. 엄마를 생각하면, 즐겁고 유쾌할 수는 없을까 고민해 본다. 딸이 결혼을 하고 또 자식을 낳아 키울 때, 나는 나의 삶에 충실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나를 버리고 손주를 키우며 그것이 내 인생의 즐거움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이제 엄마에게서 떠오르는, 명치끝에서 느껴오는 저릿함의 대를 끊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