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땡땡댕” 우렁차게 울리는 종소리는 곧 기차가 백빈건널목을 지나갈 예정이라는 것을 알린다. 용산 기찻길 백빈건널목 앞에 서면 드라마의 여운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내 생애 최고의 인생작으로 손꼽는 <나의 아저씨>. “그 드라마 너무 어둡지 않아?”라고 누군가 반문한다면 “내가 본 가장 밝고 따뜻한 작품”이라고 대답해줄 것이다.
글. 김효정 사진. 문정일 드라마 사진. tvN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용산역에 주차를 하고 <나의 아저씨> 촬영장소로 향하면서 드라마 OST가 떠올랐다. 가사가 드라마의 내용과 너무 닮아 있어서 이 노래만 들어도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Sondia의 ‘어른’.
“고단한 하루 끝에 떨구는 눈물 난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아플 만큼 아팠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한참 남은 건가 봐. 이 넓은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아무도 내 맘을 보려 하지 않고 아무도.”
-Sondia, ‘어른’
<나의 아저씨>는 ‘어른’의 가사처럼 힘들고 우울한 삶을 살던 여자 지안(이지은 분)이 동훈(이선균 분)의 인생을 도청하며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러면서 지안의 삶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시절인 20대를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던 지안에게 동훈이 사는 세상과 삶의 방식은 위로와 치유로 다가온다.
“나처럼 불쌍한데, 이 사람은 그럼에도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나의 아저씨> 이지안 대사
지안은 자신도 모르게 동훈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고 동훈도 지안의 아픔을 묵묵하게 껴안으며 착한 어른으로 지안을 지킨다. 지안의 하나뿐인 가족 할머니가 쓰러졌을 때도, 생을 마감했을 때도 지안의 곁에서 든든한 나무가 되어준다.
“네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네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모든 일이 그래. 항상 네가 먼저야. 옛날 일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
-<나의 아저씨> 박동훈 대사
“가만히 보면 모든 인연이 다 신기하고 귀해. 갚아야 돼. 행복하게 살아.”
-<나의 아저씨> 봉애 대사
“아저씨가 자주 했던 말 중에 그 말이 제일 따뜻했던 거 같아요. ‘뭐 사가?’ 집에 들어가기 전에 아줌마한테 전화해서 하던 말.”
-<나의 아저씨> 이지안 대사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네... 네!”
-<나의 아저씨> 박동훈 & 이지안 대사
용산 <나의 아저씨> 촬영지 가는 길
역에서 나와 오른쪽을 바라보면 ‘드래곤힐스파’ 건물이 보이는데 그 방향으로 놓인 횡단보도를 건너 조금 더 걷다 보면, ‘신광장’이라는 오래된 여관 건물을 만날 수 있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된 집과 건물을 볼 수 있는데, 변함없이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공간이다.
고층빌딩이 들어선 서울의 중심부와는 너무 다르다. 좁은 골목에 오래된 집이 다닥다닥 붙어서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언제 정비했는지도 모를 낮은 지붕이 보인다.
낡은 의자와 무심하게 놓인 화분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건넨다. 잠시 걸음을 멈춰서 우리를 좀 봐달라고. 볕 좋은 봄이 찾아오면 누군가 저 의자에 앉아서 고양이처럼 햇살을 만끽하고 있겠지.
<나의 아저씨>에 자주 등장한 촬영지 백빈건널목을 향해 걷는다. 이렇게 매력적인 공간인데, 머지않아 철거 딱지가 붙고 이 건물들은 하나씩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선다.
드디어 백빈건널목에 도착했다. 용산구 이촌로 29길에 있는 백빈건널목은 극중 자주 등장하는 장소로 세형제의 아지트가 있는 ‘정희네’ 가는 길목이다. 지친 하루의 끝에 동훈의 고단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장소이자 지안과 동훈이 서로의 앞날에 행복을 빌어주며 가벼운 포옹을 나누던 곳.
세형제와 스쳐지나가는 이지안
사진 출처 : 네이버 tv
모든 근심, 걱정 다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들의 아지트, 정희네
사진 출처 : 네이버 tv
아무 일도, 아무 것도 아니다
백빈건널목은 조선시대 궁에서 퇴직한 백씨 성을 가진 빈(임금이 후궁에게 내리던 품계)이 이 부근에 살면서 여기로 행차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차가 지나갈 때면 ‘땡땡’ 소리가 울리며 긴 차단봉이 내려오기 바쁘게 빨간 깃발을 든 역무원 아저씨가 나와 차와 사람의 통행을 막는다. 삭막한 고층빌딩만이 자리 잡고 있는 서울에서 몇 안남은 진풍경이다.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서는 이 인근을 ‘땡댕거리’라고도 칭한다. 드라마의 감동을 그대로 느껴보기 위해서도 찾지만, 이색적인 풍경의 출사지로도 사랑받는 공간이다.
걷다가 출출함을 느껴 뜨끈한 쌀국수 한 그릇에 마음을 빼앗겼다. 백빈건널목 인근에 자리한 미미옥은 쌀국수를 한국식으로 재해석 한 곳으로 한국에서 난 재료로만 만든 쌀국수다. 고수 대신 방아잎을 넣었고 쌀국수에서 나는 향신료도 사용하지 않아 평소 쌀국수를 즐기지 않더라도 도전해볼만 하다. 국물이 깔끔한 설렁탕에 소면을 넣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만큼 국물 맛이 진하기 때문에 국수를 먹고 난 뒤에는 밥을 말아먹는 것을 추천한다.
<나의 아저씨>를 인생 최고의 드라마로 꼽는 이유는 등장인물들의 감정 절제와 극 전개의 담백함 때문이다. 게다가 마지막 엔딩 장면은 몇 번을 다시 봐도 입가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살다보면 시간이 약일 때가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난 수많은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슬픔이 우리의 삶에 반복해서 나타난다고 해도, 이것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아무것도 아니다.’ 가끔 소설책을 읽으면서 기쁨을 공감하고 슬픔을 나누며 타인의 삶에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이 드라마가 내겐 그랬다. 위로, 치유, 그리고 좋은 어른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그 마음 하나로 나는 이 드라마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상기 이미지 및 원고 출처 : 신한 미래설계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