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나 삶의 터전을 떠나는 것은 크게 가출(家出), 출가(出家), 방출(放出)이 있다. 가출은 가족에 대한 불만이나 외부의 유혹에 끌려 집을 나가는 것이고, 출가는 수도자의 길을 걷기 위해 집을 나가는 것이다. 방출은 계약 관계 종료전이나 종료 때 타의에 의해 직장을 나가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집 떠나는 세 가지 방법으로 효과적인 국정운영을 했다. 왕은 스스로 왕궁을 떠나는 가출을 했고, 백성들의 승려 출가를 억제했고, 능력 없거나 적극성이 떨어지는 관리를 방출했다. 이중에서도 가출을 습관적으로 했다.
경복궁 전경. 경복궁은 세종이 법궁으로 사용했다. <출처: 문화재청>
세종은 특히 재위 27년부터 승하하는 32년까지 대궐을 나가 이집 저집을 전전했다. 27년과 28년의 2년 동안에는 정궁인 경복궁을 아예 비우다시피 했다. 730일 중 임시거처인 시어소(時御所)에 머문 날이 무려 690일이다. 시어소로는 연희궁, 희우정, 양녕대군가, 효령대군가, 수양대군가, 임영대군가, 광평대군가, 금성대군가 등 왕족과 관련된 곳은 물론이고 조대림, 신자근 등의 대신의 집도 이용됐다.
역대 왕들이 거처를 옮기는 주된 이유는 피병(避病)이다. 세종도 온천 요양 등의 이유로 궁을 비울 때가 있었다. 말년에는 몸도 약해지고 광평대군 등의 가족을 거푸 잃은 심리적 충격도 커 휴식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기간의 직접적인 피병은 27년 4월 연희궁 이어 정도다.
세종의 가출 속내는 세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다. 대리청정 하는 세자에게 선양하겠다는 복선도 깔려 있다. 세종의 이어가 양위 선언과 함께 계속된 점에서 유추할 수 있다. 신하들은 이를 염려해 이어를 반대했다. 30년 7월 임금은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경복궁에 내불당을 지으려고 했다. 신료들은 결사반대를 했고, 임금은 임시거처로 나갈 의사를 밝히며 물러서지 않았다. 사관은 신하들의 행동 배경을 다음처럼 적었다. “정부와 육조에서 이어 정지를 청하였다. 이는 동궁에게 선위할까 두려워한 까닭이다.”
경복궁 경회루. 책을 좋아한 세종은 경회루에서 신하들과 출판기념회를 열기도 했다. <출처: 문화재청>
세종은 세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대리청정, 초법적 권한부여, 선위의 3단계 조치를 취했다. 첫째, 대리청정이다. 임금은 27년에 아들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다. 세종이 격무와 질병에 시달린 탓도 사실이지만 세자가 정국을 장악할 시점으로 파악한 이유가 더 크다.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에 불구하고 관리 임명, 형벌, 군사 등 극히 중요한 사안을 제외한 일체의 업무를 세자에게 맡겼다. 또 5일에 한 번씩 동궁에서 조참(朝參)을 하도록 했다. 조참은 문무백관이 임금에게 문안드리는 것이다. 세자로 책봉된 지 25년이 된 아들은 31세의 장년이었다. 아버지를 빼닮은 아들은 정사를 무난하게 처리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신하들의 반대 속에 세자의 정치참여는 아버지의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했다.
둘째, 초법적 권한부여다. 대리청정 성격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실무를 익히는 인턴이고, 또 하나는 뭇 신하를 통솔하여 국정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것이다. 세종은 왕이나 다름없는 절대 권력을 세자에게 주려고 했다. 임금은 대리 청정하는 세자에게 대신들은 신하의 예를 갖추도록 했다. 구체적으로 세자는 조회를 받을 때 남면하고, 신하들은 칭신(稱臣)과 4배(四拜)를 하라고 했다. 우주의 중심인 북극성을 상징하는 왕은 신하를 맞을 때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자리한다.
세종대왕 태실. 세종의 태를 봉안한 태실은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에 있다. <출처: 이상주>
이것이 남면으로 왕권을 의미한다. 세자가 남면하는 것은 왕권을 행사한다는 의미다. 임금의 교지에 대해 의정부와 육조 사헌부 등에서 ‘하늘이 두 동강 날 일’이라며 반대상소를 올린다. 남면의 엄청난 상징성 때문에 결사반대를 한 것이다.
‘신’을 칭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왕과 세자는 부자지간이지만 공적인 관계에서는 군신 사이다. 따라서 세자는 왕에게 ‘전하’라고 호칭한다. 조선에서 신이라는 자칭을 받는 존재는 오로지 왕밖에 없다. 그런데 세종은 신하들에게 세자에게도 ‘신’을 칭하라고 했다. 이는 임금으로 대우하라는 뜻이다. 김종서 하연 등이 29년 9월3일 아침부터 해가 기울 때까지 반대한 명분도 하늘에 두 해가 없다는 것이다.
사배도 왕권의 상징이다. 임금은 29년 9월 11일 좌의정 하연 등에게 지시했다. “세자가 국정을 통섭한다. 여느 때의 세자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신하들로 하여금 칭신(稱臣)하게 하였다. 신하들이 왕에게 네 번 절하는데, 동궁이 조회를 받는 데 두 번만 절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세종은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면과 칭신은 5년 만에, 사배는 곧바로 관철시켰다. 이 과정에서 세자는 군왕에 버금가는 존재로 떠올랐다.
셋째, 선위다. 세종은 27년과 29년 세 차례에 걸쳐 선위를 시도했다. 임금은 27년 1월 18일 수양대군을 통해 대신들에게 양위의 뜻을 전했다. “세자로 하여금 왕위에 나아가서 정사를 다스리게 한다. 다만 군사에 관한 국가의 중대한 일은 내가 장차 친히 결정하고자 하노라.”
세종은 질병으로 인해 공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함을 들어 선위를 밝혔다. 그러나 국가 중대사는 세자를 도와 국정에 흔들림이 없도록 할 뜻도 말했다.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할 때와 똑같은 방법이다. 깜짝 놀란 신하들은 이틀간 울면서 만류했다. 한 발 물러났던 임금은 3개월 후인 4월 28일 같은 이유를 들어 다시 선위를 선언했다.
세종대왕자 태실. 세종의 아들과 손자 19명의 태를 봉안한 세종대왕자 태실은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있다. <출처: 이상주>
양위는 현실적으로 설득력이 약했다. 세종이 막 50줄에 접어든 나이인데다, 정국 운영이 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도 있었다. 조선이 4대 연속 선위를 하는 점을 중국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따라서 강력한 의지가 아닌 한 실천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선위를 선언했고, 철회를 했다. 선위의 진정성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세자의 위상은 예전과 천양지차임은 당연하다.
임금은 양위가 이뤄지지 않자 방랑 생활을 시작한다. 선위를 진정으로 추진했거나 최소한 선위와 같은 효과를 보려고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임금이 없는 궁에서는 아들이 그 역할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종은 아들을 위해 출궁했다. ‘집 버린 천사’ 역할을 한 것이다. 임금은 이미 양위 선언 한 달 전에 연희궁을 고치도록 했다. 세상을 잊은 사람처럼 이 집, 저 집에서 생활하던 임금은 소헌왕후 사이의 막내인 영응대군 저택에서 승하했다. 아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떠돌이 생활을 한 세종대왕은 진정, ‘가출 천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