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천장을 깨뜨려라'--빌리 진 킹 테니스 선수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여성차별과 성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져 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보다 앞선 미국에서도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어왔다. 그 중에서 미국이 자랑하는 세계적 여자테니스 스타였던 빌리 진 킹(75세)은 선수 생활을 마친 후에도 현재까지 인생 2막을 통해 여성차별 및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깨트리는데 전념해 왔다. 그 때문에 빌리 진 킹은 지난해 미국의 유력한 월간잡지 LIFE가 선정한 「20세기 100년 동안에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100인」 중에 한 사람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1943년 11월22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롱비치에서 태어난 빌리 진 킹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2살에 아버지의 권유로 테니스 라켓을 처음 잡은 후, 1980년 세계 최정상의 선수로서 현역을 은퇴하기 까지 테니스코트에서의 성차별에 맞서왔다. 당시만해도 여자테니스 선수는 시합에서 으레 스커트유니폼을 입어야만 했는데, 킹은 어머니가 만들어준 반바지를 입고 LA테니스클럽 토너먼트에 참가했다가 옷차림 때문에 참가선수 단체사진 촬영에서 제외되는 설움을 겪어야만 했다. 소녀시절 테니스선수로서 그녀가 겪었던 첫 번째 성차별이었다.

 

<바비 릭스와 성대결로 여성위상을 높이다>

 

1958년 전미 아마추어 테니스대회를 평정한 그녀는 1959년 프로선수로 전향했다. 1961년 윔블던대회 여자복식에서의 우승을 기점으로 하여 1966년에는 윔블던 단식에서 우승한 후 U.S.오픈, 호주 오픈 등을 연달아 석권함으로써 1968년부터 세계 랭킹 1위 자리를 고수했다.

빠른 서브, 강력한 백핸드, 재치 있는 네트 플레이를 무기로 그녀는 1983년 은퇴할 때까지 여자 단식에서 12회, 복식에서 16회, 혼합복식에서 11회 등 모두 39개 메이저대회에서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1973년 그녀는 남자선수에 비해 보잘것없는 상금을 여자선수에게 주는 임금차별에 대항하기 위한 조직으로 여자테니스연맹을 만들었고, 여자테니스가 남자 테니스에 비해 월등히 낮은 수준이라고 비아냥대는 남자 테니스 챔피언 바비 릭스와 공개 리에 벌인 「성 대결」에서 그를 패배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1973년 9월20일 휴스턴에서 벌어진 세기의 성대결은 전세계 9천만 명 이상의 테니스 팬들이 TV로 경기를 시청했는데, 29세의 그녀는 55세의 남자 테니스 전 챔피언 바비 릭스를 3대0 스트레이트로 제치고 낙승했다. 1973년의 성대결은 지난해 헐리우드에서 「성의 전투 Battle of the Sexes」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남녀 주연배우 모두 골든 글로브를 수상했고, 국내에서도 상영되었다.

"이 경기를 통해 여성에 대한 편견을 부숴버리겠다는 각오로 나는 철저히 준비했지요. 바비 릭스의 경기를 연구했으며, 특히 상대방을 얕잡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조언에 충실했던 결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성대결의 승리로 그 당시 전세계 모든 여성들이 자신감을 갖고 스스로의 능력을 신뢰하면서 각 분야에서 여성들도 남성들과 동등한 처우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12 살이었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이 경기를 시청했는데 나의 승리 덕분에 지금 자신의 딸 2명을 더욱 편안하게 양육하게 되었다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1973년 U.S.오픈이 임박하자 그녀는 성 대결 승리의 여세를 몰아 자신이 창설한 여자 테니스연맹 조직을 무기로 활용하여 남녀 간에 격차가 심한 대회상금의 균등배분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 해 U.S.오픈에서 남녀 우승상금을 동액으로 하지 않으면 여자 선수들은 대회 참가를 보이콧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때문에 그해 U.S.오픈은 남녀 우승상금이 동일한 최초의 대회가 되었고, 그 후부터 모든 테니스대회에서는 남녀 선수들의 상금이 같아졌다.

 

 

<자유의 메달 수상 후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솔직하게 표현하는 성격의 킹은 레즈비언으로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커밍아웃하는 최초의 프로여성 운동선수가 되었다.  .

그녀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재학시절인 22살 때인 1965년, 학교에서 만난 래리 킹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으나, 얼마 뒤 킹은 동성인 여성들에 대한 자신의 성적 지향을 깨달았다. 이후 그녀의 비서였던 마릴린 바넷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다 1981년 바넷이 동거 수당을 달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자신이 양성애자임을 인정하게 됐다. 그 소송에도 불구하고 래리와는 여전히 결혼 생활을 유지했으나 그녀가 다시 복식 파트너와 사랑에 빠지면서 1987년에 이혼하게 됐다.

 

그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청소년일 때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지만 자신은 매우 늦은 나이에 깨달았으며, 만약 자신이 레즈비언이었단 사실을 더 일찍 깨달았다면 21살에 래리 킹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그녀의 전 남편에게 사과했다. 그래도 둘의 이혼 과정과 이후의 관계도 좋아 빌리 진은 래리가 재혼으로 얻은 아들의 대모가 되었고, 두 사람은 여자 테니스협회(WTA)와 여자 스포츠 연맹 (WSF), 월드 테니스팀 등의 단체를 함께 설립한 친구사이다.

 

이혼 후 빌리 진 킹은 그녀의 복식 파트너였던 일리아나 크로스와 함께 뉴욕과 시카고에 거주하면서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싸우고 있고, 인종차별의 현장에는 여지없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또한 TV등 매스컴에 출연하여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입법안 통과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있다.

 

2006년에 간행된 킹의 자서전 「압박감은 특권이다」 라는 저술에서 "인생의 연결고리가 바뀜에 따라 자신의 역할 변화를 알고 이를 수행하는 것이 값어치 있는 삶이다." 고 강조한 그녀는 "우리 모두는 다음 세대 젊은이들이 더욱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고 하면서 사재를 털어 자신의 이름을 붙인 빌리 진 킹 지도력 강화기금(the Billie Jean King Leadership Initiative) 을 2014년 창설했다. 이 단체는 차세대인 밀레니엄 세대들에게 소통과 참여를 통한 열린 리더십을 교육시켜 사회의 다양성을 확보하자는 운동을 벌이는 비영리 사회단체이다. 킹은 12살 때 테니스를 배우면서 모두가 흰색 테니스화를 신고, 흰색 유니폼을 입고, 흰색 공을 치고 있는 백인들만의 테니스장 풍경에서 획일성만을 보면서 진저리를 쳤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테니스코트에서의 획일성이 선수나 참가자 개개인의 개성을 말살하고 차별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했다고 강조한다.

“2025년이면 전 세계 생산현장에서 노동력의 75%가 젊은 밀레니얼 세대로 구성되는 만큼, 열린 지도력으로 서로 다른 모두를 포용하여야만 차별을 없앨 수 있고 사회의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 킹은 바쁜 매일을 보내고 있다.

 

1987년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1990년대에는 TV해설을 하면서, 1996년과 2000년 하계올림픽대회 미국선수단 단장직을 맡았다. 2006년에는 U.S.오픈이 열리는 뉴욕시립 테니스코트의 이름이 빌리 진 킹 국립테니스센터로 개명되었다.

2009년에는 미국정부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 노익장인 킹은 자신이 현역시절 창설했던 여자스포츠기금의 이사로서, 앨튼 존 에이즈기금과 국립에이즈기금 상임이사로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2013년 12월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빌리 진 킹과 함께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한 아이스하키 선수 케이틀린 캐호우를 2014년 동계 올림픽의 미국 선수단 공동대표로 임명하였다. 러시아의 반동성애적인 정책과 혐오 범죄에 항의하기 위한 일환이었고, 킹은 현지에서 러시아의 동성애 억압정책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양국간의 정치적 입장에 미묘한 간극을 만들기도 했다.

 

참고사이트: www. billiejeanki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