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년 전에 서른 명 남짓 되는 여행 작가 지망생들이 모여 『여행을 떠나는 서른한 가지 핑계』라는 책을 낸 일이 있었습니다. 여행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뭉친 사람들이 펼치는 여행이야기는 말 그대로 각양각색 그 자체였어요. 오죽하면 책 제목도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는 어느 아이스크림 회사의 31가지라는 콘셉트에 맞췄을까요. 출판사 입장에서 보면 대상 고객층이 모아지지 않아 효과적인 마케팅 전략을 세울 수도 없었지요.

 

그런 와중에도 자기 이야기를 오롯이 표현하려는 작가로서의 고집과 출판 시장의 구매 선호도는 팽팽하게 대립했어요. 열정이 살아있는 첫 순간이기에 한층 첨예하게 부딪혔고 협업과정의 불협화음 또한 요란했지요. 맞아요. 어쩌면 초보운전자가 도로 위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건 대형 버스나 복잡한 차선 변경이 아니라, 방어 운전 못하는 또 다른 초보운전자가 아닐까요? 그렇게 우왕좌왕 초보들끼리 부딪혀가며 간신히 첫 책을 냈어요. 많은 친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어요. 애는 애대로 썼으면서도 결과물은 기대만큼 신통치 않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책을 아직도 가장 깊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어설픈 작가들이 겪어낸 혼돈스러운 저술과정 속에서 그 어떤 교육 프로그램 보다 분명한 깨우침을 얻었거든요.

 

이제는 단독으로 책을 내야지 왜 자꾸 공동저술로 힘을 빼느냐고 하는 분이 계셨어요. 들을 때는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어 그냥 웃고 말았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저는 공동저술을 창작 활동이라고 생각지 않고, 배움 활동으로 여겼던 것 같아요. 다른 생각, 스타일, 환경, 방향이 서로 충돌하면서 생기는 불협화음과 화해의 반복 속에서 정말 살아있는 공부를 하게 되거든요. 나이 들어가며 완고해지는 자신을 돌아보고 각성하는 계기로도 삼게 되고요. 엄마학교협동조합에서 매월 여는 이야기 파티도 이런 마음에서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엄마라는 포괄적인 카테고리는 단체 이름과 연결되는 기본적인 빌미일 뿐, 다양한 인생 여정에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주고받을 수만 있으면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배움과 깨우침이 일어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식으로 수많은 엄마들을 만났는데 그들 사이에서도 여행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등장했습니다. 처음엔 제가 여행 작가라 여행에 관한 주제가 자주 나오나 싶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요. 그들은 저마다의 상황에서 갖가지 다른 이유로 부지런히 여행을 떠나더군요. 이번에는 “엄마가 여행을 떠나는 서른한 가지 핑계”라는 공동저술을 한번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요.

 

신혼여행으로부터 시작해서 부부여행, 태교여행, 가족여행, 교육여행까지 다양한 이유가 무궁무진 많잖아요. 저만해도 아이들은 오히려 만만한 앞동산이 편할 텐데 갖은 핑계를 붙여가며 사방팔방 여행을 다녔어요. 역사적인 도시를 탐방하거나, 유명 장소를 두루 섭렵하며 문화 경험을 시키고 식견을 넓혀준다는 이유로요. 그때는 그게 오로지 아이들을 위한 여행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다 제가 가고 싶어서 떠났던 건가 싶기도 해요.

 

오십 줄에 들어선 엄마들은 또 다른 이유로 여행을 떠납니다. 당장 돌봐야 할 아이들이 없다는 해방감과 언제 또다시 손주나 어르신을 돌봐야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사이에 놓인 엄마들은 웬만한 여행 작가가 무색할 정도로 폭발적인 여행 계획을 잡기도 합니다. 집에만 있었던 엄마는 그게 갑갑해서 친구들과 삼삼오오 떠나기도 하고, 직장에서 은퇴한 엄마들은 그동안 얽매였던 사슬에서 벗어난 해방감 때문에 다시 떠나고요. 가정을 이루고 사는 엄마들에게 집이란 어쨌든 끊임없이 일거리가 생산되는 작업장 같은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은연중 집이라는 장소를 떠나야만 진정한 쉼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젊은 나이에 남편 여의고 홀로 아이들을 키우던 한 엄마는 장모가 되기 직전에 딸 시집보내고 나면 여행이나 떠나겠다고 아예 가게를 접었어요. 홀연히 세상을 돌아다니며 두 번째 인생을 구상하겠대요. 어떤 엄마는 시집살이 울화를 꾹꾹 참다가 갱년기 화병으로 터질 지경이 되어서야 매일 새벽 집을 나서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대요. 6개월 만에 겨우 제 정신으로 좀 돌아오더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저는 여행만큼 사람을 다방면으로 성장시키는 장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엄마들이 그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각자 홀연히 떠나는 것에 매우 찬성하는 쪽입니다. 우리 시대 여자들은 젊었을 때는 아가씨라서 위험하다고 못 가게하고, 결혼해서는 아이 엄마가 어딜 나다니느냐고 눌러 앉히는 바람에 마음대로 떠나보지도 못했잖아요. 더 이상 미적거리다간 건강이 따라주지 않아 영영 못 떠날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마지막 기회라는 비장한 각오로 여행을 감행하려는 분도 있습니다. 갈까 말까 망설일 땐 무조건 떠나는 게 답이죠. 언제 또 가겠습니까.

 

그런 엄마들의 다양한 일상 탈출을 여행 핑계 목록으로 헤아리던 어느 날, 친정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저희 어머니는 자타가 공인하는 건강 체질입니다. 여든을 넘기신 후부터는 한 해가 다르게 기력이 쇠해진다고 안타까워하시지만 제 보기엔 아직 또래의 다른 분들보다 훨씬 씩씩하세요. 평생을 바삐 사셨던 분이라 하루 종일 늘어져 있는 것을 제일 견디지 못해요. 늘 빡빡한 계획을 세우고 자식보다 더 살가운 옛 직장동료와 모임, 제자들과 친구 사이에서 활발히 지내시는 것 같아 별 걱정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랬던 엄마가 몇 년 째 아프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더니 마침내 전화로 그러시는 겁니다.

 

친구 분 아들이 전라도 쪽에 요양 병원에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데 한 1-2주일 그 친구와 여행하는 셈 잡고 따라가 그 병원에서 지내다 오겠다고요. 여기저기 아픈 곳은 많은데 정신없이 바쁜 시내병원에서는 노환이라며 자세히 듣지도 않고 고쳐줄 생각도 없이 밀쳐내는 것 같아 영 야속했던 모양입니다. 가서 아는 의사에게 아픈 하소연도 좀 하고, 차려주는 밥 먹으면서 쉬고 싶으셨나 봐요.

 

"집에 있으면 매일 해야 하는 집안일과 삼시 세끼 밥 장만하는 것도 큰일이라. 이번에 친구 따라가서 일주일이라도 내 몸만 좀 생각하면서 쉬다 오면 조금 안정이 될 거 같다. 요즘은 네 아버지도 홀로서기 잘하고 계시니 그리 염려들 말거라. 너희도 바쁘겠지만 시간나면 잠깐씩 아버지 잘 계시나 들여다봐주면 더 고맙구~!"

 

붙잡지 못했습니다. 중년의 나이인 저도 세상일 툴툴 털고 남이 해주는 밥 먹으면서 며칠만 온전히 쉬고픈 마음이 이렇게 굴뚝인데, 온 몸이 뻐근지근 늙어가는 엄마는 오죽하랴 싶어서요. 매일 찾아오는 세 번의 끼니가 얼마나 귀찮고 고되셨을까요. 직장 은퇴와 동시에 또다시 부엌으로 재취직해야 했던 엄마의 평생 노동을 생각해보니 안타깝기만 합니다. 어느새 지팡이가 필요한 나이인데도 자식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홀로서기'만 시켜대니 잠깐이라도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고 싶으셨나 봅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해보니 아마도 이게 엄마들이 여행을 떠나는 서른한 번째 핑계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마음이 짠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