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뢰엔 산(Mount Fløien)에서 항구 도시 베르겐(Bergen)을 한 눈에 내려다본다. 천년의 역사를 가진 베르겐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드넓은 바다가 앞마당처럼 펼쳐져있다. 수평선 위에 띠를 이룬 뭉게구름이 산맥을 이루며 떠다니고, 발아래에는 뾰족 지붕 건물들 사이로 구부러져 이어지는 골목길이 손에 잡힐 듯하다. 일몰을 조망하기 좋은 장소지만 언덕 끝자락 너머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푸른 바다만 이어진다. 밤은 어디에도 없고 그저 달빛보다 부드러운 빛들만 사방팔방 흩어진다.
베르겐은 두 발로 걸으며 여행할 수 있을 만큼 소박하고 아담한 도시다. 기차역에서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숙소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순간 이미 ‘베르겐이다’ 싶은 건축물들이 구석구석 나타난다. 옛 건물의 고풍스러움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브뤼겐(Bryggen)지구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의 모티브가 된 곳이다. 붉고 노랗게 색칠한 뾰족지붕과 창문들로 화려해보이지만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그 옛날 부두의 활기와 치열했던 삶의 냄새가 배어나온다. 삐거덕거리는 창고바닥에 고리타분한 생선 비린내가 풍길 것만 같다. 크기가 아니라 뭉근한 시간의 깊이가 느껴지는 그곳에서는 수백 년 시공간의 경계가 단숨에 허물어진다.
내가 아이였을 때 소원을 빌고자 첫 별을 기다린 적이 있었다. 초저녁 하늘은 언제나 환해서 별은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다 잠깐 고개를 들면 마치 그 자리에 늘 있었던 것처럼 첫 별이 반짝거렸다.
“어디 숨었다 온 거야?”
내게 기별도 없이 불쑥 나타난 별에게 눈을 흘기면서도 나는 고향집 마당에 다리를 뻗고 앉아 여름밤을 보내곤 했다. 그 후로도 제대로 된 첫 별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밤은 항상 느닷없이, 내가 눈치 채지 못할 순간에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어둠이 쉬이 오지 않는 백야(白夜) 속을 거닐다 광장으로 나오니 노천 어시장이 즐비하게 들어서있다. 바다를 접한 항구도시 특유의 밝고 활기찬 분위기가 마치 부산 자갈치 시장을 방불케 한다. 오래된 어시장답게 북적대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친다. 새우, 바다가재, 연어 온갖 해산물들이 없는 게 없다.
빨간색 포장마차로 들어가 연어샌드위치와 생선 수프를 시켰다. 저녁도 못 먹은지라 그 유혹은 참기 어려워 하나를 얼른 집어 들었다. 눈으로 보이는 식감 이상의 맛이 입속에 가득했다. 긴 옷을 미리 준비해서 꺼내 입었지만 한여름인가 싶을 정도로 쌀쌀한 바닷바람이 옷섶을 파고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낭만이 넘치는 식사였지만,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서둘러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맨 꼭대기 층에 있는 방이다. 날마다 허탕을 치면서도 첫 별을 기다렸던 마음처럼, 나는 따스한 침대에 누워 천창 너머로 훤하게 밝은 도시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이 보이는 창문이라니, 이게 웬 호사인가’ 하며 거리를 내다보니 옆집도, 아랫집도 지붕마다 제각각의 천창을 매달고 있다. 좁은 골목은 건물 안에서 새어나오는 오렌지색으로 물들고 있다. 밤바람이 불기 시작하지만 대체로 고요하고 잔잔하다. 어디선가 버터로 마늘을 튀기는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거리에는 인적이 끊긴 듯 한산하다. 무척 낯익은 풍경이다. 어디서 보았을까…….
밤인데도 어둡지 않은 골목 풍경과 거리를 물들이는 황금색 불빛, 파랗게 물든 하늘은 고흐의 그림 ‘밤의 카페테라스’를 떠올리게 한다. 저 노란 불빛, 달도 별도 숨어드는 푸른 밤하늘, 베르겐에서는 그 끝없는 오렌지 빛 여름밤이 골목마다 색다른 풍경을 펼쳐 놓아 지루할 틈이 없다. 새벽이 되어도 어둠이 내리지 않는 백야, 그 뿌옇고 하얀 밤의 심사는 여행자의 감성을 섬세하고 예민하게 만든다. 밤새 창문을 열어두기로 한다. 서늘하고 조금은 촉촉한 바람의 질감이 좋다. 긴 침묵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시간이 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오렌지 빛들이 모여 별이 빛나네. 별이 반짝이네. 아! 한여름 밤 내가 본 첫 별이라네.
50+에세이작가단 김혜주(dadada-boo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