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꿈이 깃든 대한제국의 황궁 석조전과 정동 산책
서울 시청 앞의 덕수궁(德壽宮)과 정동은 도심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고즈넉하고 한갓지며 전통과 근대, 그리고 현대가 어우러진 매력 넘치는 곳이다. '덕수궁미술관의 기획전'들과 정동길 산책, 그것이 내가 정동을 자주 찾는 이유다. 정동을 산책하다 보면 늘 고종과 구한말의 정치 상황이 생각나 마음이 애잔하다. 그렇다. 덕수궁과 정동은 고종이 서구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치열한 시간을 보낸 공간이다. 정동에 각국 공사관이 들어선 이유가 조선이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경운궁(慶運宮, 현재의 덕수궁) 일원의 땅을 주어 그곳에 공사관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정동전망대에서 바라본 덕수궁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 당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한밤을 틈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년 후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일본을 견제하고 서양 제국의 도움을 받으려면 경운궁에 머무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고종은 1897년 환구단(圜丘壇)에서 하늘에 제사 지낸 후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고종은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은 황궁을 갖기 위해 건물을 짓기로 계획하고 영국인 하딩에게 설계를 맡겼다. 1900년에 착공해 1910년 완공된 석조전(石造殿)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좌우대칭이 돋보이는 철조콘크리트 건물이다. 궁궐의 전각들은 용도와 사용자의 신분에 따라 이름을 붙였지만 석조전은 건축 소재를 딴 이름일 뿐이다. 궁궐의 이름조차 제대로 붙이지 못했던 당시의 현실을 생각하니 마음이 쓸쓸하다.
석조전 지층은 창고와 주방, 1층은 접견실과 연회장 2층은 황제의 침실 등 개인 공간으로 꾸며졌다. 내부는 황제의 색인 금색을 주로 썼고 영국제 가구를 들여와 화려하게 꾸몄다.
▲석조전 중앙홀(좌), 석조전에서 본 덕수궁 분수대(우)
하지만 고종은 석조전에서 거하지 못했다.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 당한 고종은 덕수궁(德壽宮)이라는 칭호로 불리며 경운궁에 머물다 1919년 파란만장한 생을 마친다. 덕수궁은 본디 궁궐의 이름이 아니라 고종을 부르는 궁호(宮號)였는데 그것이 어느 샌가 궁궐의 이름으로 고착되고 말았다. 고종이 머물 수 없게 된 석조전은 일본에 유학 중이던 영친왕이 귀국할 때마다 거처로 사용했다. 덕수궁에 살면서도 자신의 꿈을 담아 지은 석조전을 그저 바라만 보았을 고종이 떠올라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석조전은 1933년 일제에 의해 미술관으로, 해방 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 UN한국임시위원회 사무실, 한국전쟁 후에는 국립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며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러던 중 2009년부터 2014년까지 복원공사를 마치고 지금은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석조전은 예약 관람제를 시행중이며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개방된 공간만 볼 수 있다. 얼마 전 석조전을 관람하던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건립 당시 갖췄던 가구들과 실내 장식을 거의 그대로 복원해 아름답고 우아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던 석조전을 보면서 '황궁을 이렇게 함부로 사용해도 되나?'하고 속상했었는데, 복원된 모습을 보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복원된 석조전이 오래오래 그 모습을 간직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석조전 접견실(좌), 석조전에서 바라본 덕수궁미술관(우)
석조전의 서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는 개관 20주년을 기념해 <내가 사랑한 미술관 : 근대의 걸작>전이 진행 중(2018.5.3~10.14)이다. 덕수궁미술관은 1938년 '이왕가미술관'으로 개관했다. 일제는 석조전에서는 일본의 근대 미술품을, 이왕가미술관인 덕수궁미술관에서는 조선의 고미술품을 전시해 식민 종주국과 식민지 간의 문화적 우열을 보여주려 했다.
그런 이유로 당시에는 미술관에 걸리지 못했던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 박수근의 '할아버지와 손자' 등의 작품들은 지금에 와서야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그밖에도 이인성, 김중현, 이마동, 오지호 등 근대 서양화가들의 작품들과 매천 황현의 초상화를 그린 어진 화가 채용신, 안중식, 이상범, 노수현 등 조선 화단의 화풍을 잇는 한국 화가들의 걸작들도 만날 수 있다. 또한 류경채, 변월룡 등의 현대성이 돋보이는 작품들과 불운의 천재조각가 권진규의 '말', '지원의 얼굴' 등 테라코타 작품들도 볼 수 있다. 덕수궁관의 건축물 자체를 주제로 삼은 하태석의 미디어아트도 관람의 재미를 더한다.
▲(좌측부터) 채용신 '전우 초상', 변월룡 '빨간 저고리 소녀', 권진규 '말'
덕수궁의 신무문을 나와 정동극장을 끼고 오른쪽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중명전이 있다. 1900년, 러시아 건축가가 벽돌로 지은 2층 건물 중명전은 경운궁 내,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다. 1904년 덕수궁에 불이 나자 고종은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기고 1907년까지 머물렀다. 1905년, 중명전에서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는데 1층에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중명전
덕수궁과 중명전 주위에는 러시아공사관 탑, 신아일보 별관, 정동제일교회, 영국공사관, 성공회성당 등 근대 건축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경향신문사에서 정동길을 따라 내려오다 언덕길을 오르면 만나게 되는 러시아공사관 터의 탑, 그 일대가 조선시대에는 경운궁의 뒤뜰이자 경희궁의 앞뜰이었다는 상림원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공터로 남아 있는 경기여고 자리에서부터 영국영사관, 성공회성당 등 지금은 궁궐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지역이 모두 경운궁의 권역이었다. 그 넓은 궁궐 터 중 일부는 조정에 의해 서구 열강에 불하되고, 건물 일부는 1904년 화재로 소실되고, 나머지 건물들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경운궁은 그 옛날의 영화와 이름마저 잃고 지금은 덕수궁으로 불리며 도시 한가운데 섬처럼 남아 있다.
덕수궁과 정동 산책의 백미는 서울 시청 서소문별관의 정동전망대에서 여행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13층 카페에서 차 한 잔 마시며, 눈 아래 펼쳐진 덕수궁과 정동을 보며 각 건물의 위치를 확인하노라면 그날 하루에 화룡점정하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