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중 한양대학교 무용학과 교수
몸짓으로 그려내는 존재의 뒷모습들
춤꾼에게는 몸이 최고의 의상이라 말하는 손관중(孫官中·58) 교수. 10여 년 전 언더 하나만 걸치고 무대 위에 섰던 무용수는 이순(耳順)이 가까운 나이에도 여전히 군살 하나 없다. 자기관리의 혹독함이 미루어 짐작됐다. 남자가 무용을 한다면 다들 괴이하게 바라보던 시절, 그는 운명처럼 춤에 이끌렸다. 그리고 무용학과 교수가 됐다. 남자 무용수로는 국내 최초였다.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아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우연’이라는 말도 자주 했다. 40여년간 한길만 걸어온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는 표현들이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세상의 우연이 다 필연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게다가 우리 춤을 한 번 보고 푹 빠져버리는 남자 아이도 흔치 않다. 그것도 1970년대에.
“고2 때 매형을 따라 공연장에 갔다가 한국무용을 보게 됐는데 춤추는 무용수들이 너무나 아름다운 거예요. 10대 사춘기에 감수성이 예민할 때라 더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날부터 무용을 배우고 싶어 안달했고 아는 분이 채상묵 선생님을 소개해주셔서 한국무용에 첫발을 들였어요.”
남자 무용수가 많이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딸도 아닌 아들이 무용을 배우겠다고 하자 부모님은 내심 놀랐지만 한동안 그러다 말겠지 하고 내버려뒀단다. 그러나 그 후로도 춤을 멈추지 않았다. 무용인으로 살아온 지 올해로 41년째.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손 교수의 눈빛이 아득했다.
“사실 제가 중학생 때 복싱을 했어요. 홍수환 선수가 밴텀급 챔피언에 올라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하고 외쳐, 온 국민을 흥분시켰던 그 무렵이었죠. 아마추어 선수로 뛰다가 고2 때 김명복박사배 학생선수권대회까지 출전했는데 준준결승전에서 상대 선수에게 왕창 얻어맞고 졌어요. 그때 제가 결승전까지 가서 이겼다면 한국체대를 가지 않았을까요. 무용학과는 상상도 안 해봤어요.”
초등학생 때 허들, 태권도 선수로 지낸 이야기도 슬쩍 털어놓는다.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니 한시도 자신의 몸을 가만히 두질 않았던 아이였다. 폭발하듯 들끓던 에너지, 왜 그랬는지 이제야 증명이 된 셈이다. 우연과 필연은 그렇게 겹쳐지고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그가 가야 할 길을 터주었던 것이다.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사연
채상묵 선생에게 1년간 한국무용을 배우던 그는 1979년 겨울, 돌연 국립발레단 연수생으로 들어간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채 선생님이 어느 날 제게 그러시더군요. 너는 키도 크고 몸도 유연하고 마스크도 서구적이니 우리 춤보다는 발레를 하는 게 좋겠다고요. 꽤 적극적으로 권유를 하셨어요. 그때 마침 국립발레단에서 연수생을 뽑길래 지원해봤습니다. 운 좋게 발탁이 됐고 다음해인 1980년 5월, 국립극장 설립 30주년 기념 공연작 ‘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 정식으로 무대 데뷔를 했습니다. 제 나이 스무 살 때였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발레단에서 활동하던 그는 1981년 5월 군 입대를 한다. 지금이야 권위를 자랑하는 콩쿠르에서 1등을 하면 군 면제라는 특혜 제도가 있지만 당시에는 아무런 혜택도 없었다. 한창 매진해야 할 시기에 병역 문제로 활동을 중단했다가 아예 무용을 그만두는 이도 많았다. 몸을 다시 회복하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남자 무용수들에게는 그만큼 척박한 환경이었다. 하지만이번에도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강원도 화천 백암산 앞에서 철책근무를 서던 그에게 육군 본부(현 국방부)에서 군악병을 뽑는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원을 했는데 합격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육군 본부로 전
출 가서 장구를 쳤어요. 우리 음악의 가락과 장단을 배우며 지낸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훗날 창작활동을 하는 데도 상당한도움이 됐고요. 제가 만약 화천에서 계속 철책 근무를 했다면 무용학과에 응시할 생각을 못했을 거예요. 다행히 군악대는 3주에 한 번씩 외출이 가능했습니다. 밖으로 나갈 때마다 채상묵 선생님 학원을 찾아가 굳은 몸을 풀었고 근무할 때도 외야부대에 있는 식당에서 식탁과 의자를 밀어놓고 혼자 발레 연습을 했어요. 물론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이라서 가능했던 일이죠.”
늦은 나이에 무용학과에 도전
군대에 가서도 춤 생각밖에 없었던 그는 제대하자마자 한양대학교 무용학과에 입학원서를 냈고 수석 입학을 한다. 그러나 친구들보다 5년 늦게 공부를 시작한 만학도는 주변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한다. 심지어 “남자가 무슨 무용이냐”라는 비웃음도 들려왔다.
“남자 무용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형편없었던 시절이었어요. 하루는 학교에 전
화를 걸어 ‘무용학과’를 바꿔 달라 했더니 잘못 알아듣고 무역학과를 바꿔주더군
요.(웃음) 남자가 찾는 학과이니 당연히 무역학과일 거라 생각했던 거죠.”
발레로 실기시험을 치고 입학한 그는 1985년도에 현대무용으로 전공을 바꾼다. ‘한국적 현대무용’을 고집스럽게 추구해온 김복희 선생과의 만남이 그의 진로 방향에 큰 영향을 줬다. 학부를 졸업한 뒤에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학부를 졸업하니 스물여덟 살이더라고요. 나이는 먹고 취직은 힘들고 대학원 진
학 말고는 딱히 갈 곳이 없었어요. 당시 남자 무용수가 돈벌이로 할 수 있는 일은 입시생 레슨밖에 없었죠. 물론 민간단체에서 만든 무용단에서 학부 졸업생들이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긴 했지만 경제 사정에 큰 보탬이 되지는 않았어요. 할 수 없이 집에서 용돈을 받아쓰곤 했는데 그나마도 곧 끊겨버리고 말았어요.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시는 바람에 거의 폐인이 되셨거든요. 그때부터 가장의 짐까지 짊어져야 했어요.”
몇몇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모교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그는 차차 안정을 찾아갔다. 학과 조교생활 4년, 모교에서 시간강사 6년, 그리고 전라도, 부산 등지까지 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강사생활을 했고 마침내 37세에 모교 무용학과 교수가 된다. 그때까지 4년제 대학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한 남자 무용수가 교수가 된 사례는 단 한번도 없었다. 그가 국내 1호 교수였다.
“무용학과는 1963년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처음 만들었습니다. 이전에는 체육학부에 속해 있다가 예술학부로 분리가 된 거죠. 한양대학교는 그로부터 1년 뒤인 1964년도에 무용학과를 개설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 자랑을 하곤 합니다. 남녀공학에서 무용학과 개설은 한양대학교가 최초라고요.(웃음)”
그는 무엇이든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다. 그러한 성향이 결코 녹록지 않았을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한눈 팔지 않고 걸어가게 했을 것이다. 지금은 강단에서 제자들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이라 이전만큼 창작활동을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3일은 늘 무용단 연습에 참여한다. 벌써 30년이 넘은 약속이라는데 아직도 지키고 있다니 대단하다.
영원한 주제, 회한과 분노와 사랑과 연민
손관중 교수의 주요 작품으로는 ‘자유, 해방과 나비’, ‘육바라밀’, ‘적(跡)’, ‘족보’, ‘인간나무’, ‘검은 소나타’ 등이 있다. 주로 인간의 고뇌를 주제로 한 내용들이 많은데 이중 ‘적(跡)’은 서울무용제 안무상을 받은 뒤 뉴욕 연수를 다녀와 만들었다. 연작으로 발표했을 만큼 애정이 많은 작품이다.
“1995년 서울무용제 안무상을 받았을 때 문화예술진흥원에서 주는 300만 원의 연수자금이 손에 쥐어졌어요. 3주간 의무적으로 연수를 다녀와야 했는데, 제 돈을 더 보태 한 달 반 일정으로 뉴욕엘 갔습니다. 마침 동기생이 유학 가 있는 상황이라 얹혀지내면서 돌아다녔죠. 배가 고플 때는 1달러짜리 햄버거를 사먹으면서요. 그런데 거리에 휑한 눈빛의 무표정한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뉴욕 같은 화려한 공간에서 말이죠. 좀 충격적이었어요. 문득 인간이라는 존재가 너무 보잘것없어 보이더군요. 그날 낯선 거리에서 하염없이 걸었어요. 5시간 정도 지났을까… 브로드웨이 링컨센터쯤에 도착했을 때 비가 막 쏟아지더라고요. 그 비를 맞으며 무엇에 홀린 듯 계속 걸어 다녔어요. 그리고 돌아와 만든 작품
이 적(跡)입니다.”
입을 닫으면 몸의 언어가 들려올 때가 있다. 그 말들을 받아 적으며 그는 회한과 분노와 사랑과 연민으로 뒤범벅된 존재의 뒷모습을 몸짓으로 그려낸다.
어느 날부터 비타민을 챙겨 먹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나이를 실감했다는 손 교수. 학교, 무용단, 춤협회 일로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두 번씩은 꼭 헬스장에 간다. 낙낙하던 허리띠가 조여 오는 듯 불편해지면 철저히 몸 관리에 들어간다. 아직도 32인치 허리를 유지하는 비결이다. 몇 년 후에는 그도 퇴직자가 된다. 영화도 실컷 보고 사진도 찍으러 다니고 요리도 배우고 싶다 하더니 그 말끝에 한마디 더 툭 던진다.
“이젠 오지랖도 내려놓고 싶어요. 저 없어도 잘 돌아가더라고요.(웃음)”
글 전경심 교열위원 ohbomnal@naver.com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