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꾸려 기차에 올랐을 때 하늘에 검은 구름이 늘여놓은 엿가락처럼 뻗쳐오르고 그 위로 잔잔한 못물 같은 트인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희지도 푸르지도 않은 그곳은 실밥이 삐져나온 무명 천 조각처럼 하늘 한쪽에 걸쳐 있었다. 팔월이었는데 목젖 아래로 스멀스멀 기어드는 바람이 차갑고 비까지 뿌리고 있었다. 노르웨이의 긴 일정을 마친 탓이었을까.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정지된 사진처럼 고요하게 느껴졌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고요해서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까 초조하고 설레었다.
스웨덴에서의 일정을 국경 도시 스톨리엔(Storlien)을 거쳐 외스테르순드(Östersund) 스톡홀름(Stockholm)으로 정했다. 내 마음 속 나도 모르는 내가 벙어리 입모양을 지으며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직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들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의 의식을 흔들어 댔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는 길목에 보라색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낮과 밤, 사람과 사람, 도시와 도시의 경계가 슬로우 비디오로 흘러내렸다. 분명히 나무들의 잔가지까지 보일 만큼 어둡지 않았는데 먹구름 탓인지 깜깜해지기도 했다.
두 시간이 채 안 되게 이동하는 동안 어디를 보아도 비슷비슷한 풍경이 펼쳐지고 상상했던 삼엄한 초소도 안보였지만 자동 로밍 안내 문자가 휴대폰에 쏟아지는 걸로 보아 스웨덴에 닿은 듯하다. 국경을 넘는 일이 처음이 아닌데도 매번 긴장을 한다. 삼면이 바다이며 나머지 한쪽도 막혀 있는 나라에서 평생 살아온 터라 국경이라는 말만 들어도 늘 낯설다. ‘동네에 놓인 다리 건너듯 국경을 넘다니’ 놀랍고 싱거운 기분이 든다.
해발 592m, 스톨리엔(Storlien)역은 시골 간이역처럼 아담하다. 키 작은 소나무 두 그루가 서있는 고향의 기차역이 떠오를 정도로 살굿빛으로 칠한 목조건물은 빛바랜 사진에서 튀어나온 듯 낯익다. 스톨리엔은 노르웨이와 접경지역에 위치한 곳이라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 곳이다. 겨울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스키를 즐기려고 이곳을 찾지만 지금은 한여름이라 한산하다. 외벽에 스키장 슬로프를 그려놓은 조감도가 붙여진걸 보니 겨울스포츠의 규모를 알 것만 같다. 트론헤임에서 내가 타고 온 두량짜리 빨간 기차를 배경으로 철길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있다. 대여섯 살 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노르웨이로 곧 돌아갈 기차를 타고 출입구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안개 자욱한 하늘에서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진다.
스웨덴 기차로 갈아타려고 기다리는 동안 생각에 잠긴다. 도망치듯 떠나온 일상이 코앞으로 다가오는 것은 여행이 끝나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차례로 넘어지는 볼링 핀처럼, 혹은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여행 중에 만난 장면과 장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광경을 만날 때마다 글로 남겨보려 애쓴다. 세상에 아무도,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는데 나의 글쓰기가 진전이 없다면 그건 오로지 나의 탓이다. 기필코 한 건 올려야겠다는 철벽같은 각오와 집념이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하고 무리한 동작을 낳는다는 건 어느 스포츠에서나 있는 일 아닌가. 애원하고, 다짐하고, 협박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어둠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상책인 것처럼 진전 없는 글쓰기에 조바심치지 않아야 할 일이다. 가스는 올라오는데 불이 켜지지 않는 라이터, 지금 내 처지가 그와 다름이 없다. 본래의 시간과 장소로 돌아가기 위해 나는 국경에 이르러서야 여행 내내 들고 다니던 노트를 버리기로 마음먹는다. 남루하고 부끄러운 그것, 써야한다는 강박관념의 지겨운 노동으로부터 나를 풀어버린다. 그리하여 비로소 빗물을 흠뻑 머금고 있는 꽃들 앞에 다가서게 된다. 작은 밤송이만한 보라색 꽃 주위에 은은한 향기가 퍼진다. ‘아! 꽃의 말이다.’ 꽃잎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받아 적는다. 이상한 일이다. 내 의식의 벌어진 상처에서 새어나오는 방언 같기도 한 꽃말을 껴안고 국경을 넘어 여행길에 오른다.
50+에세이작가단 김혜주(dadada-boo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