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식을 묻는다. 주연이냐, 조연이냐?
「우리는 자신에게 주인공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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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가 나에게 물었다. “형! 난 늘 자신이 없어. 왜 그런지 몰라. 형은 당당해 보이던데, 난 늘 위축되어 있는 것 같아. 나름대로 전문 영역의 길을 걷고 공부도 했는데”
후배에게 난 그렇게 말했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라. 그냥 갖고 있는 걸 그대로 표현해. 주위를 너무 의식하지 말고. 그러면 좀 나아질 거야. 나아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감도 생길 거고. 자신감은 연습의 결과야”
한참 후에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형! 내가 주재하는 발표가 있어. 형이 좀 와줬으면 해서” 난 그날 연차를 내고 후배가 좌장을 맡은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늘 긴장하여 제 실력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해 안타까웠던 후배는 그날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었다. 놀랍게 변해 있었고 자신감은 물론이고 여유도 있었다. 가끔은 청중석에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기까지 했다.
▲ 때론 무대를 지켜볼 줄 알아야 한다.
그날 후배와 나는 기분 좋은 마음으로 한잔 술을 나누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물었다. “짜식! 많이 달라졌는데, 진행도 매끄러웠고 전체 흐름도 참 좋았어. 언어도 자신감이 넘치고, 그 사이에 뭔 변화가 있었던 거냐?”
후배가 말했다. “형과 만난 이후 나 자신을 한번 돌아봤지.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 하고 말이야! 생각해보니 답은 간단했어. 내가 상황을 늘 피했기 때문이란 걸. 그게 길게 쌓인 거지. 내가 해야 할 것을 남에게 맡겼던 거야. 형이 말한 연습의 결과라는 말이 마음에 훅 들어왔어. 한동안 의도적으로 피했던 나의 역할을 내가 한다고 자원했지. 그랬더니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어. 자신감도 생기고” 이후 후배의 행보는 말하지 않아도 알 일이다.
▲ 우리의 무대는 크고 또 넓다.
한 끗 차이라는 말이 있다. 된 것과 안 된 것, 이룬 것과 못 이룬 것, 자신감과 패배감. 이 간극의 다리를 건너는 것은 자신의 발걸음에 달려 있다. 앞으로 향하느냐! 뒤로 물러서느냐! 이다. 이 한 끗의 차이가 세상을 바꾸게 한다. 아니! 자신을 바꾸게 한다. 무대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무대의 중앙에 서야 하는 거다. 무대를 피하는 순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다.
▲ 자신의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살기
학창 시절 읽었던 책 중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있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만 한다.” 인구에 회자 되는 이 글귀를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할까 말까, 그러면 해라. 후회하지 말고. “그때 할걸” 하지 말고.
뭐! 다 아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내가 그렇게 걸어왔으니까! 지금도 계속 그러하니까! 내 삶의 궤적이 그러했으니까!”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안다. 삶을 나의 것으로 가져가느냐, 아니면 묻혀 가느냐? 내 일처럼 하느냐, 남의 일처럼 하느냐? 답은 자신이 찾을 일이다. 주연으로 사는 삶과 조연으로 사는 삶은 다르다. 그렇다고 조연이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주연이어야 할 때 주연으로 나서야 한다는 거다. 무대를 피하지 말고. 그래야 웰-비잉이 되고 웰-다잉이 된다.
▲ 선택의 길은 늘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오늘 아침에 받은 글이다. (두 번은 없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이하 생략)
그러니 자신에게 때때로 자신의 삶의 방식을 물어보라. 살아 있는 동안 지금 넌 주연이냐? 조연이냐? 50플러스 세대의 삶에도 이 물음은 끊임없이 유효하다.
50+시민기자단 안종익 기자 (try3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