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추석은 엄마, 아내, 며느리로서 역할 외에 ‘시어머니’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달고 맞이한 첫 명절이었다. 이제 겨우 쉰다섯 살인 나를 향해 생글거리며 ‘어머님~!’ 이라 부르는 20대 여성이 생긴 것이다. 신입 부부 한 쌍과 같이 추석 쇠러 찾아간 시부모님 집은 복잡하고 부산스러웠다. 작년 설 때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다.
명절을 맞이하는 내 마음은 늘 가볍기 그지없었다. 호텔 뷔페식당에서 시댁 식구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일평생 삼시 세끼 밥상을 차리신 ‘시어머니를 해방시켜 드리자’라는 취지에서 시작한 이벤트가 이어오면서 당연한 연례행사로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내가 청년 시절에 호텔에서 근무했던 인연이 있어서인지 명절이면 드나드는 호텔이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지난여름에 난 호텔에서 한 달 살기, 아니 한 달 글쓰기를 경험했다. 어떤 동화공모전을 앞두고 용감하게 출사표를 던진 직후였다.
사무실로 변신한 호텔 객실
우연히 객실 일부를 공유사무실로 개조한 호텔을 발견했다. ‘인세 받는 작가 아내’를 기대한다며 경비를 지원해준 남편 덕분에 명동 소재의 P호텔에서 한 달을 보냈다.
사무실로 탈바꿈한 객실은 책상과 의자, 작은 냉장고가 전부였다. 하지만 호텔 서비스나 시설 등은 나무랄 것이 없었다. 일상에서 뚝 떨어져 나와, 내 꿈에 한발씩 다가가는 시간은 제법 근사했다. 다만, 늘 그렇듯, 끼니를 챙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도시락이나 김밥으로 가볍게 해결했다. 그런데 먹을수록 속이 허해지는 진기한 현상이 일어났다. ‘맛있는 한 끼’ 후에 글도 잘 써졌다. 그걸 밥심이라 부르나 보다. 한낮에 내리쬐는 태양을 피하지 않고, 갈수록 기세가 커지는 코로나도 무릅쓰고! 맛있는 한 끼를 위해 식당을 찾아 나섰다.
오랜만에 들어선 명동 한복판. TV 뉴스나 신문 기사를 통해 익히 짐작은 했지만, 한산하다 못해 황량한 한낮의 명동은 너무 낯설었다. ‘휴업중’이라는 팻말을 붙인 식당이 명동 골목에 가득했다. 다행히 칼국수로 유명한 한 식당을 포착했다. 몇 년 전쯤, 밀려드는 중국인 관광객들 틈에 끼어서 엄청난 대기 시간과 홀대를 겪은 후로는 발길을 끊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입구에서부터 친절한 직원의 안내를 받았다. 다행히 내 기억 속의 걸쭉한 고깃국물, 얇고 보드라운 완당과 국수는 물론 마늘 양념이 독특한 김치까지 그대로였다.
여유롭고 시원한 식당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아서인가, 명동 거리가 삼십 분 전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잠겼던 유리문이 활짝 열린다. 덜렁거렸던 간판은 화려하게 빛난다. 사라졌던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온다. 명동이 반짝거린다. 그래! 이래야 명동이지!’ 사십 오 년 전, 열 살의 내 눈에 명동은 그렇게 보였다. 거기에 하나 더, 노란 바나나가 나를 유혹하던 곳!
뜨거운 한낮의 황량한 명동 골목
그 시절의 바나나는 지금의 바나나와는 처지가 전혀 달랐다. 쉽게 볼 수 없는 귀한 몸이셨다. 한 송이가 아니라 낱개로 하나에 천 원씩 하는 엄청 비싼 과일이었다. 방학 중에 또는 일요일이면 난 엄마 손에 이끌려 명동에 나가곤 했다. 당시 엄마는 코스모스 백화점에서 속옷 가게를 운영했었다. “네 뒤꽁무니가 달아서 네가 가게에 있으면 손님이 끊이질 않아.”라면서 엄마는 그 비싼 바나나 하나를 내 품에 안겼다.
나는 속옷이 잔뜩 쌓여있는 매장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바나나를 영접하는 시간, 거룩하게 의식을 거행했다. ‘우선, 천천히 바나나 껍질을 깐다, 조금만. 껍질 안쪽에 붙은 떨떠름한 속살을 앞니로 긁는다. 더는 긁을 속살이 없어지면 이제 하얗고 폭신한 알맹이를 반입 베어 문다. 씹지 않고 혀를 굴려서 녹여 먹는다. 아니, 녹여 먹기도 아까워 그저 입안에 머금고만 있다.’
엄마는 밀려드는 손님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매장 한 귀퉁이에서 야금야금 바나나를 음미했다. 아주 느리게 흘러도 좋은 시간, 넘치는 손님들로 풍성한 공간. 열 살의 내겐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롭고 달콤한 명동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틴팝 : 10대들을 타깃으로 한 대중음악 장르. 팝, 알앤비, 힙합, 록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생산되며 청소년의 일상과 사랑을 다룬 노랫말과 밝은 분위기의 곡이 특징이다.
50+에세이작가단 정호정(jhongj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