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이 넓은 2층 창가에 앉았다. 쏟아지는 햇살과 지나가는 자동차 말고는 거리가 한산하다. 어쩌다 전봇대 위에 앉은 새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1초, 2초.. 새와 같은 눈높이로 바라보는 경우는 살면서 드문 일이다. 늘 내려보거나 올려보았고 새 역시 그랬다. 보고 있으니 새가 나를 보고 웃는 것 같다. 웃을까 말까 하다 살짝 웃어준다는 것이 입꼬리만 올라가 어설픈 웃음이 되었다. 웃는다고 생각하고 보면 웃는 것이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슬퍼서 우는 소리인지 즐거워서 부르는 노래인지는 나는 짐작만 한다. 내가 느껴지는 것이 어떻게 다 맞을까. 그저 새에게도 생각을 주고 웃는 얼굴을 주고 싶을 뿐이다. 나는 유리창 밖에 있고 너는 안에 있구나. 새가 생각을 한다. 그래 세상밖에 있는 네가 나보다 낫구나. 새와 나 사이에는 유리창이 있고,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나보다 새의 시선이 더 자유로울지도 모른다.
어제저녁 거실에 있던 남편이 뜬금없이 검은색을 살까 감색을 살까 물어왔다. 무슨 소리인가 보니 홈쇼핑에서 방송하는 소가죽 로퍼를 보고 있었다. 살면서 남편이 홈쇼핑을 보다가 물건을 사는 일은 거의 없었고 특히 신발을 산다는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그 순간 뭔가 찜찜하고 불편한 예감이 엄습했다. 조용히 현관에 벗어놓은 남편의 신발을 들어보았는데 이런, 이마 옆으로 식은땀이 났다. 신발 뒤축이 너덜너덜하게 해져있었다.
올 추석 때는 시댁에 남편만 다녀왔는데 혹시 남편의 벗어놓은 신발을 어머니께서 보신 건 아닐까. 그래서 한소리 들은 남편이 조용히 신발을 사려고 한 것일까. 문득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시댁을 갈 때는 아이들의 옷보다도 남편의 옷과 매무새에 신경이 많이 쓰였다. 젊은 시어머니셨던 어머니를 뵐 때면 그야말로 한소리 듣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다. 시댁에 내려갈 때마다 남편의 말짱함이 내게는 숙제 같았다. 그런데 내 나이가 그때의 어머니 나이가 되어 가다 보니 무엇을 장담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나라고 자식 일에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와 새처럼 사람들과 나 사이에도 유리문이 있다. 시멘트 벽이 아닌 표정과 모습이 훤히 보이는 유리벽. 나는 유리벽 너머의 모습을 보고 상대방을 읽는다. 웃고 있네. 별일 없구나. 표정이 어두워. 때로는 보이지 않았으면 좋을 순간들도 유리벽을 통해 환하게 읽힌다. 웃고 있잖아, 뭐지 저 웅얼거림 복잡한 일이 있나. 물어볼까 말까.
그런데 말을 한다고 해도 유리벽으로 말이 넘어가지 못한다. 상대방의 눈과 입으로 말하는 것을 내식대로 보고 넘기게 된다. 유리벽이란 것이 환히 보여서 좋을 수 있지만 자칫 감정의 파동이 커져버리면 깨져 버릴 수도 있기에 물어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규정짓는다. 관계가 깨질까 봐,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버릴까 봐 유리문 사이에 멀찌감치 서있게 된다. 유리문을 걷어내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는 일이 오히려 익숙해졌다. 말해 뭐해 바뀌지도 않을 것을, 기분만 상하겠지.
나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은 일들도 많았다. 그런데 문제들에서 미리 도망치려고 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사람들과의 다름에 유리벽을 만들고 보이는 대로만 믿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사람 간의 대화에서 오는 소리의 높낮이와 떨림도 기꺼이 함께 주고받았어야 했다. 부딪히면 피하는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었다는 걸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럼에도 살다 보면 영원히 치우지 못하는 유리벽이 있다. 내 의지로 걷어낼 수 없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관계도 분명 있다. 하지만 적어도 가까운 이들과의 관계에서는 부딪히고 바꿔가며 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생각해 볼 일이다.
유리벽 너머에서 웃고 있는 남편의 마음이 괜찮은지, 나에게 서운한지, 아니면 화가 났는지에 대하여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할 듯싶다. 해진 것도 모르고 신고 다녔을 남편의 마음에도 난지도 모르는 상처가 아물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도. 나도 슬슬 유리벽이 답답해지는 것을 보면 나이가 드는 것인지, 없던 용기가 생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50+에세이작가단 리시안(ssmam9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