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일제 강점기의 정점이던 1942년, 김구 선생님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중에 쓴 자서전 속 일부분이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사람이 ‘높은 문화의 힘’을 ‘부강’ 보다 앞세우다니, 백 년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여! 그에게 푹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최근 우리의 BTS(방탄소년단)가 제76차 유엔총회 특별행사인 ‘지속가능발전목표 고위급회의’(SDG 모멘트)의 개회식 연설을 했다. 일곱 청춘은 총이나 돈이 아니라 문화의 힘으로 세계를 향해 희망을 선포했다. 실시간으로 그들의 연설과 퍼포먼스 영상을 보며, ‘그래, 이것이 바로 김구 선생님이 말씀하신 문화의 힘이지!’라고 확인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BTS 관련 기사를 검색하다가 2018년 타임지에 실린 표지 사진을 발견했다. 위에서 카메라를 내려다보는 독특한 앵글의 사진 한 컷. 그들의 자신감과 자부심이 그대로 내게 옮겨 오는 것만 같았다. 벅찬 감동에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때였다. 잡지 표지 사진이 7인의 ‘BTS’ 얼굴에서 순식간에 4명의 ‘퀸’ 얼굴로 바뀌었다.

대만 대사관은 중국 대사관으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서점은 폐업했거나 다른 가게로 바뀌었다. 

그나마 철문이 굳게 닫혀 있어 골목은 다른 명동 골목처럼 을씨년스럽다. 

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다시 활기찬 골목으로 변신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도 월병 가게와 중국집은 여전히 영업 중이라 천만다행이란 생각이 자꾸 든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손이 곱아 들 지경이었다. 명동 초입, 중앙우체국과 대만대사관 사이 골목에는 칼바람이 불었다. 가뜩이나 숏커트를 해서 온몸이 덜덜 떨렸지만, 나는 외국산 연예잡지가 진열된 가판대를 뚫어져라 들여다봤다. 외국 서적 전문 서점 네댓 곳 모여 있었다. 점포 안쪽은 중국어나 일어로 된 두꺼운 책들이 점령했고 바깥 가판대는 브룩 실즈, 피비 케이츠, 조디 포스터, 레이프 가렛, 퀸 등의 스타들이 지배했다. 그들은 언제나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었고, 가판대 앞은 늘 만원사례였다. 대부분 10대나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새로운 문화를 찾아 모여든 이들, 아니, 선진 문화에 목말라 있는 청춘들이었다.

여느 10대들처럼 나 역시, 끓는 피를 억누르고 책상 앞에서만 보내던 시절이었다. 사랑 타령만 가득한 가요는 시시했고, 사랑 때문에 질질 짜기만 하는 드라마는 따분했다. 그러다 맞닥뜨린 신세계! 영화 속에서 금발을 휘날리며 파격적인 의상과 포즈로 나를 유혹하는 스타들에 빠졌다. 난 스타들의 정보에 늘 목말랐고 그 갈증을 외국산 연예잡지로 해소했다.

스타들의 사진으로 만든 코팅 책받침(캡처_ heat1234님 블로그)
 

당시, 엄마는 패션사업을 운영했고 그 덕에 난 외국 잡지를 일찍부터 접할 수 있었다. 처음엔 친한 친구들끼리만 돌려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반 전체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아이들 손을 거쳐 일주일 만에 되돌아온 잡지는 너덜거리기 일쑤였다. 고육지책으로 1박 2일간 잡지를 빌려주고 500원을 받기 시작했다. 나의 1인 대여점은 늘 대기자로 붐볐다. 고객(?) 요청이 있을 땐 스타의 사진을 코팅해 책받침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따끈따끈한 신상 책받침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잡지 한 권을 사면 새로운 잡지 두서너 권과 패션 잡지까지 살 수 있는 돈이 내 주머니에 생겼다. 덕분에 매주 대만대사관 앞 골목을 찾았고, 난 과월호 잡지를 서비스로 받는 단골이 되었다. 물론 나중에 담임 선생님한테 불려가 혼나는 참사를 겪긴 했지만, 김구 선생님의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하신 말씀을 나는 40여 년 전에 넉넉해진 주머니 사정으로 증명해냈다.

내가 속한 ‘참별난극단B2S’가 제작한 공연 ‘강 여사의 선택 2021’이 불과 2주 앞으로 다가왔다. ‘2021년 시민청 공간지원사업’으로 선정되어 지금 밤낮없이 연습에 매진 중이다. 오십이란 애매한 나이에 연극에 뛰어들었다. 어느새 5년 차인 문화예술인의 세계는 결코 만만치 않다. 하지만 잘리지도 질리지도 않고 지금까지 이 세계를 내가 즐길 수 있는 것은, 그 시절 내 집처럼 드나들던 명동 대만대사관 앞 골목길 잡지가게에서 시작된 건 아닐까?

⁺틴팝 : 10대들을 타깃으로 한 대중음악 장르. 팝, 알앤비, 힙합, 록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생산되며 청소년의 일상과 사랑을 다룬 노랫말과 밝은 분위기의 곡이 특징이다.

50+에세이작가단 정호정(jhongj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