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더운 날씨에 자주 찾는 수박을 보면 ‘이우경’ 선생님의 <당나귀 알>이 생각나 절로 웃음이 난다.
20여 년 전 쯤(어느 새 그렇게나 오래됐나 싶어 놀랍다.) 몇 년 동안 시립 도서관에서 친구와 함께 ‘빛그림책’을 만들어 견학프로그램을 운영했었다. ‘디지털 카메라로 그림책을 찍고 편집한 후 빔 프로젝트로 크게 보여주는 책을 우리는 ’빛그림책‘이라고 말했다. 책의 글은 내용에 맞는 음악을 배경으로 직접 읽어주거나 테이프에 녹음을 해서 들려주기도 했다.
그때는 빔 프로젝트의 화소도 좋지 않아서 불을 끄고 두꺼운 암막커튼으로 유리창을 다 가리고 보여줘야만 했었다. 요즘에야 그림책을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것도 아주 쉬운 일이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아이들도 엄마들도 신기하다며 좋아했다. 그 당시에 우리가 자주 보여줬던 책 중에 옛 이야기로 만든 그림책 <당나귀 알>과 <꿀꿀돼지>도 있었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옛이야기들은 그림책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갖고 있다. 옛이야기에는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인간내면의 깊은 심성 같은 것이 담겨있기도 해서 심리학을 하는 사람들이 신화나 옛이야기를 공부하기도 한다.
어떤 옛이야기에는 해학이 넘쳐 웃음을 주고, 권선징악 같은 교훈이 담겨 있어서 삶을 되돌아보게도 한다. 옛이야기 자체는 이미 오랜 세월 검증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거기에 알맞은 그림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된다.
<당나귀 알>에 나오는 영감은 바보인 데다 게으르기까지 해서 늘 낮잠만 자고 부인이 베를 짜서 먹고 사는 형편이다. 어느 날 영감은 부인이 장에 가서 베를 팔아 오라고 심부름을 시켜 장에 갔는데, 처음 본 수박을 당나귀 알이라 말하는 수박장수에게 속아 수박을 산다. 아내 역시 수박을 본 적이 없어 당나귀 알이라 믿고 방에 불을 때고 포대기 밑에 묻어둔다. 며칠 후 곯아버린 수박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자 밖으로 나가 덤불 속에 던진다. 때 마침 그곳에서 쉬고 있던 당나귀 새끼가 놀라 튀어 나왔는데 영감은 그 당나귀가 알에서 나온 줄 알고 집으로 데리고 온다. 그러나 곧 당나귀 진짜 주인이 나타나고 옥신각신 하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 그 후 게으름뱅이 영감은 여전히 낮잠을 자고 아내는 다시 베를 짜며 살아간다.
아이들이 보기에도 바보도 그런 바보가 없다. 어떻게 당나귀가 알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 한심하다는 거다. 아내입장에서 보면 정말 화를 낼만도 하건만 아내의 화내는 모습은 수박을 내다버리라고 소리치는 정도뿐이다. 이야기의 결론도 영감이 반성을 하고 뭔가 애쓰며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으련만 다시 낮잠이나 자는 걸로 끝난다.
그런데도,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도 나도 이 책을 좋아하는 지도 모르겠다. 이우경 선생님이 그린 사람들의 모습은 예쁘지도 않고 반듯하지도 않다. 약간 흐물거리는 느낌마저 있다. 정성스레 그린 그림 같지도 않고 그냥 쓰윽쓰윽 간결한 선 몇 개씩으로 그려놓은 거 같다. 그렇지만 못생긴 얼굴이나 차림이 재밌는 표정과 성격을 보여준다. 매력이 있다. 그래서 바보 같고 게으른 영감마저 미워하기 어렵다.
하기야 어쩌겠는가, 타고나기를 어리석고 게으른 사람을 누가 바꿔놓을 수 있을까? 영감의 아내처럼 그러려니 하고 사는 것이 본인에게 훨씬 더 이로울 것이다. 미운 짓을 하는 사람들도 이런 맘이 되고나면 원망할 것도 잔소리 할 것도 없어진다. 내 맘에 맞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욕심을 내려놓고 그림 속 배경들이 보여주는 간결함과 화사한 색채들을 마음속에 들여놓으면 시끄러운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꿀꿀돼지>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꿀이 많이 나는 마을에 새로 부임한 사또가 꿀을 엄청 좋아해서 욕심을 부리고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다가 벌들에게 쏘여 죽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산신령에게 찾아가 사또가 다시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하게 해달라고 빈다. 할 수 없이 산신령은 사또를 동물로 태어나게 하겠다고 약속을 한다. 그런데 소도, 말도, 개도, 닭도 다 싫다고 난리를 친다. 다만 돼지는 그냥 꿀꿀거리며 먹이만 먹고 있었다. 그래서 산신령은 사또를 새끼 돼지로 태어나게 했고, 사람들은 그를 ‘꿀꿀돼지’ 또는 ‘꿀돼지’라 부르게 되었다는 얘기다.
이 책도 그림이 참 재미있다. 동물들 표정과 욕심 많은 사또를 싫어하는 분명한 의사전달 몸짓은 무척이나 역동적이라 재미있다. 특히 사또의 죽은 후의 모습이나 새끼 돼지로 태어난 후의 모습은 그야말로 빵 터지게 한다.
<당나귀 알>에 나오는 영감과 <꿀꿀돼지>에 나오는 사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영감은 게으르고 어리석기는 하지만 남을 괴롭히는 사람은 아니다. (물론 아내를 고생시키는 크나큰 잘못을 저지르고는 있지만...) 그런데 사또는 자기 욕심 때문에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고 사람들을 매로 때리기도 한다. 그러니 동물들조차 그가 자기들 모습으로 환생하는 걸 싫어하는 것이다. 그는 벌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어쩌면 선량한 돼지들이 새끼돼지로 태어난 사또 얘기를 알게 된다면 촛불집회를 하고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내가 옛이야기에서 늘 배우게 되는 공통점 하나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 좋다는 것! <당나귀 알>도 <꿀꿀돼지>도 나에게 욕심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나중에 누군가가 같은 옛이야기를 다르게 해석한 그림책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는 욕심은 뭘까? 말이나 글이 표현하지 않는 느낌을 전혀 다른 그림으로 그려낼 작가가 있다면 비교하며 보는 맛도 있을 거 같은데... 이런 욕심은 내가 버려야 하는 욕심과 다른 거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