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도 길이 있다

[함철훈의 사진 이야기]

 

 

 ▲동백

 

 

미국에 있을 때 청년층이 모이는 한 단체로부터 리더십에 대한 강의를 요청받았다. 그 모임에는 나 말고도 여러 분야의 강사들이 있었지만 사진가로서 할 수 있는 얘기를 준비해야 했다. 주어진 날이 다가올수록 리더십을 어떻게 사진에 담아낼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초조해졌다. 그러다 청중의 나이 삼십대 젊은 나이에,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죽은 한 시골 청년이 떠올랐다. 사람에게 목숨보다 더한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리더로서 예수를 얘기해도 무리가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사진으로 어떻게 그의 젊은 리더십을 담아낼 수 있을까?

 

먼저 예수의 서른셋이라는 꽃다운 나이 때문인지 동백꽃이 얼핏 지나간다. 동백은 한창 화려하게 피어나는 순간, 절정에서 꽃이 상하지 않은 채 아름다운 모양 그대로 떨어진다는 것을 막연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 최고의 시기에 남을 위해 죽은 리더십.

 

그렇게 동백을 찍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겼다. 내가 동백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서 볼 수 있는지, 언제 피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겉멋과 제멋에 겨운 무식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동백은 한국에만 있지 미국과는 어울리지 않는 꽃이라는 선입견도 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가 살고 있는 어바인 근처에 동백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의외로 멀지 않은 곳에 동백 정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카메라를 챙겨 동백 정원으로 유명한 데스칸소가든이라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정원에 도착해 한 나무 아래 서서 직원에게 동백꽃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가 “당신이 지금 동백나무 아래 있습니다. 그 나무가 바로 동백이에요”라며 웃었다. ‘낫 놓고 기역자’를 물어본 격이었다. ‘아, 이게 동백이구나!’

 

가까운 쪽에는 하얀 동백꽃이, 멀리 분홍 동백이 있었다. 저마다 키도 다르고, 꽃잎도 은은한 색부터 짙은 색까지 다양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누구나 보고 있던 동백꽃이 이제야 무지한 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나무 木에 봄 春을 합친 동백 椿을 제목으로 붙인 소설 <춘희>의 오페라 버전 <라 트라비아타>와, 동백을 좋아해 언제나 동백을 가슴에 꽂고 다녔다는 <마농레스코>, 또 이미자의 한 맺힌 노래 ‘동백 아가씨’, 조용필의 ‘꽃 피는 동백섬’, 매년 동백을 보기 위해 선운사에 간다는 서정주, 그가 피기 전 동백을 미리 보고 가는 길에 만난 윤대녕의 얘기... 이렇게 다양한 동백을 접했음에도 동백을 제대로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사진이 아니었다면 동백을 보기 위해 일부러 거기까지 가지도 않았겠지만, 설령 갔다 하더라도 맨눈으로 건성 스쳐 지나쳤을 것이다.

 

그때까지 동백은 관심을 갖고 본 적이 없으니, 그 아름다움을 잘 담아낼 리 없었다. 수많은 시도 끝에 동백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내가 원했던 동백의 이미지를 찾을 수 있었다. 무지한 사진가인 나는 이렇게 사진기를 통해 사물과의 만남을 계기로 하나하나 배우고 바뀐다. 한 장의 사진으로 세상을 바꾸는 타고난 천재 사진가들도 있지만, 나처럼 사진을 찍다 눈이 열리고 귀가 커지면서 내가 바뀐 결과, 나를 둘러싼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

 

내가 사진을 하면서 그렇게 수지맞은 일이 어디 이 경우뿐이었겠는가? 악기를 잘 다루기 위해 지난한 연습과 반복을 통해 좋은 연주가 가능해지고 이와 함께 논리적 사고와 감성이 풍성해지듯, 사진도 이렇게 나의 인성이 개발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렇게 다양한 동백의 품종과 섬세함을 넘어, 지난해에 진 동백꽃과 올해의 낙엽 위에 내려앉은 아직 싱싱한 동백꽃이 내 카메라 뷰 파인더에 잡혔다. 주검 위에 겹쳐진 새로운 죽음의 이미지 속에서 나는 진정한 리더와 희생의 의미를 연결시켜 보았다. 사람들과 세상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기꺼이 맞은 젊은 리더의 모습이 형상화되었다. 여기에 더해 인간이 갖고 있는 상상력과 연상력을 발휘한다면 이것이 아이콘으로 발전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꿈보다 해몽이다.

 

사진에도 길이 있다. 모든 예술처럼 사진에도 사랑에 이르고 진리에 이르는 놀라운 길이 있다. 이렇게 동백꽃도 모르던 내 눈이 열리고 바뀌듯이 누구나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스치는 동백과 비슷한 꽃과 나무에서 이번에 새로 만난 아름다움이 겹쳐 보여 나는 자꾸 차의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