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이다. 가족들이 늦잠을 자는 시간,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베란다 밖이 울창한 1층 집에서는 미처 몰랐던 햇살에 눈이 부셨다. 겨울 문턱에서 밀려나는 가을 낙엽이 이렇게 곱고 예뻤을까. 한 가지 색이 아닌 오색찬란한 단풍이 바람을 타고 길 위에 떨어진다. 마치 붉은 물감을 그라데이션 해놓은 수채화 같은 단풍길을 따라 걸었다. 하얀 목련과 분홍 벚꽃이 날리던 거리엔 어느새 색색의 단풍잎이 고운 길을 내주었다. 가을이 쓸쓸한 계절이라고 하지만 오늘 같은 가을은 가장 화려한 계절처럼 느껴진다. 무지개를 조물조물 섞어 놓은 계절 같다. 가을 단풍잎은 화려함의 극치를 조용히 흩날리며 바람을 타고 무심히 낙화한다.
잠시 후 낙엽이 군데군데 보이는 보도블록이 나타났다. 어쩌면 사람들의 발길에 낙엽 사이로 만들어진 길. 줄눈으로 맞혀져 있을 것 같은 딱딱한 보도블록이다. 그런데 보도블록이 규칙적이지만 구간이 달라질 때면 저마다 다른 모양이라는 것을 알았다. 적색, 회색, 녹색, 주황색 등 보도블록도 색을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무늬와 패턴이 볼수록 다양했다. 누군가는 심사숙고 끝에 설치했을 바닥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떨어진 낙엽이 아니었으면 유심히 볼 일이 있었을까. 고민하며 줄 맞춰 시공했을 사람들의 모습에 이 도시 어느 한 곳도 의미 없는 곳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 것일지도. 어느 날 꽃과 나무가 보이더니 이제는 길가의 보도블록까지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보도블록과 블록 사이에도 길이 있고 풀이 살고, 이름 모를 꽃이 살고 있었다. 바라봐 주지 못하는 사이에도 아스팔트 틈새에 풀은 올라오고 꽃은 피었다.
혈압에 좋다는 고들빼기 뿌리차를 만들기 위해 고들빼기를 주문했다. 고들빼기는 길가나 밭 언저리에서도 잘 자란다고 한다. 민들레처럼 몸을 낮춰야 더 잘 보이는 고들빼기도 뿌리가 단단히 내릴 수 있는 곳은 부드러운 흙에서가 아니다. 척박한 땅 위에서 더 강하게 자란다. 생명력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삶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살 수 있는 강인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파트 뒷길 토끼굴을 지나 한강길로 나왔다. 탁 트인 한강을 보니 시원했다. 더 하얗게 보이는 구름과 유유히 흐르는 한강은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마음 편안한 풍경이었다.
며칠 전 교육프로그램을 보았다.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었지만 부모면서 어른인 나에게도 좋은 시간이었다. 아이의 불안과 강박의 문제가 단순히 아이의 것만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 역시 가장 불편한 기색의 순간을 아이들이 배운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불편했다. 좀 더 강인한 엄마였다면 아이들의 삶이 조금은 더 편안하지 않았을까,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문다.
불안한 아이와 부모를 관찰한 후 의사의 조언은 '자기 신뢰'와' 자기 확신'의 부재였다. 내 행동과 생각, 감정을 나 자신이 믿어야만 불안을 낮추고 살 수 있다고 했다. 방송을 보며 나는 자기 신뢰와 확신이라는 말에 한참을 머물렀다. 신뢰하는 사람에게 확인하는 습관이 때로는 자신을 믿는 마음을 점점 밀어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놀랐다. 언젠가부터 나 자신을 믿고 내 생각대로 하는 일이 적어졌다.
스스로의 감정을 바라봐주지 못할수록 자기 신뢰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한 달 사이 잠이 많이 늘었다. 늦은 밤이 아닌데도 잠을 자려고 누웠다. 여분의 시간이 좋았던 사이사이 시간을 잠으로 보냈다. 졸려서 자는 걸까 싶었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걸었다. 걸으며 생각을 했다. 나를 주춤하게 하는 것이 뭘까. 왜 가다 서서 주저하고 있는 걸까. 삐끗해도 나를 향한 호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러질 못했다. 자신의 어떤 모습도 믿고 인정해주는 것이 '자기 신뢰'와 '자기 확신'에 다가가는 일일 텐데.
걷다 보니 어느덧 따뜻한 햇살이 머리 위로 올라왔다. 다시 빛 고운 낙엽길로 들어섰다. 멀리 우리 아파트가 보인다. 속도를 내어 걸었다.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가 아파트 입구까지 따라왔다.
50+에세이작가단 리시안(ssmam9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