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가는 길
아름다운 자연의 최대 수혜자는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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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가는 산에 오르고 싶었다. 지리산은 가을이 절정이었고 그 산에 오르는 날은 뱀사골의 화려한 단풍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뉘라서 이 계절을 말릴까. 온 산하가 온통 가을뿐이었다. 말 그대로 만산홍엽(滿山紅葉)이다. 이 땅의 사계절의 멋을 이렇게 누릴 수 있다니 가슴이 뛰었다.
▲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에 달궁 마을
이른 아침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에 달궁 마을을 잠깐 들러보았다. 촉촉하게 아침이슬을 맞은 야영장에는 지리산의 기운을 받으며 밤을 지새운 텐트가 군데군데 기지개를 켜는 중이었다. 조용한 달궁계곡에는 가을 산의 반영으로 울긋불긋하다. 아침 바람이 휙 불자 일제히 낙엽이 날린다. 어딜 돌아보아도 가을이 충만하다.
뱀사골로 향하는 길은 어느새 가을 산을 오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매표소 입구에 들면서 오전 중엔 자동차 출입을 제한한다는 말을 들었다. 산 위에서 행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가을을 누리고픈 사람들에게 걸어가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 산길을 걸으면서 때때로 뱀사골 계곡을 내려다보거나 잠깐 내려가 볼 수도 있고 단풍 숲에 묻혀 깊은숨도 쉬면서 지리산의 가을을 마음껏 맛보는 재미도 빠뜨릴 수 없다.
▲ 와운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와운천년송(천연기념물 제424호)
한 시간 반 정도 걸으면 지리산의 와운명품마을의 천년송을 만난다. 지리산 뱀사골의 와운 명품마을 뒷산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아름다운 천년송(천연기념물 제424호)이 수호신처럼 서 있다. 20m의 키와 12m 폭으로 장엄한 기품을 풍긴다. 마치 마을을 감싸듯 우산 모양의 생김새로 뱀사골 상류의 산자락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구름도 누워간다는 뜻의 와운(臥雲)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를 천년송이라 부르면서 해마다 전통적인 방식의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남원골 와운마을 사람들의 삶에 깊이 뿌리내린 신성한 천년송은 진정한 수호신인 것이다. 평소에는 주민들이 기도를 올리거나 후손을 얻기 위한 치성을 드리기도 하는 유서 깊은 노거목이다. 일명 할머니송 이라고도 불리는데 20m 거리에 할아버지 나무도 자생하고 있다. 자연의 오묘한 이치다. 바라만 보아도 든든하다.
▲ 지리산 숲속 결혼식
내가 지리산에 오르는 날, 바로 이곳에서 가슴 뜨거워지는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 해발 약 800m 정도 높이의 지리산 중턱쯤의 숲속에서 맞닥뜨리게 된 그 결혼식은 단순히 은유로서의 숲속 결혼식이 아니었다. 이건 말 그대로 정말 지리산의 숲속 결혼식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리산 뱀사골의 가을 단풍이 절정이었다. 천년송을 앞에 두고 신랑이 가마에 타고 있었고 연지 곤지를 바르고 머리에 족두리를 얹은 신부가 가마 안에 들어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이번 전통 혼례식은 국립공원공단이 이 지역의 문화 계승을 위한 일 중의 하나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두 쌍의 부부를 선정한 것이다. 두 분의 신랑 신부와 가마꾼들, 주변에서 고운 한복을 입고 진행하는 이들의 모습이 지리산의 가을 단풍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축하 송으로 사랑가가 울려 퍼지고 가을 햇살 아래 진행되는 전통 혼례는 산행 꾼의 축복이 넘치고 모두에게 힐링을 선물했다.
▲ 드라마 「지리산」 촬영지
명품 와운마을의 천년송은 요즘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지리산」의 전지현(서이강)이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찾는 나무로도 알려져 있다. 천년송 아래의 전통 혼례도 구경하고 그늘에 앉아 시원하게 땀을 식히고 내려와 남원의 휴양림 숙소로 향했다. 지리산 인월 금계 둘레길 태극종주 구간의 시작점에 위치한 흥부골 휴양림은 그 옛날 산속 너와집의 자연 생태를 가능하게 유지한 채 최대한 규모를 줄여서 만든 너와 한옥집이다.
이곳 역시 휴양림으로 오르기 길목에 드라마 지리산 촬영지로 나오는 국립공원 「해동 분소」가 나타난다. 옆으로는 「비담 대피소」가 있다. 방송 촬영팀은 이미 모두 철수한 상태라 가끔씩 구경 오는 이들이 보이고 썰렁하다. 이곳저곳에서 배우 전지현과 주지훈과 레인저들이 바삐 오가고 성동일이 있을 것만 같은 세트장이다.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휴양림은 밤이 일찍 온다. 그리고 춥다. 아침저녁으로 차디차게 쨍한 공기가 상쾌하다. 온 사방으로 숲뿐이다. 가만히 앉아 「숲 멍」으로 최적이다. 이런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도심의 묵은 체증을 날려버리기 또한 더없이 좋다.
▲ 햇살 가득한 한옥 마루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처마 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곶감도 사찰 뜰에 내려앉은 햇살도 「가을」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마음대로 피어난 들꽃도 가을 아침의 상쾌했던 새벽 공기도 마음에 담았다. 자연 속으로 떠나보면 비로소 이 땅의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자연에게 새삼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때로 잊고 지냈던 자연이었다. 지리산 가는 길을 달리며 보았던 글귀가 잊히지 않는다. 「아름다운 자연의 최대 수혜자는 당신입니다.」
50+시민기자단 이현숙 기자 (newtree140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