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묵은 슬픔을 만나러 가는 길, 기형도 문학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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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1989년 3월 7일 새벽, 종로 파고다 극장. 소주 한 병을 손에 쥔 채 사망한 상태로 발견된 젊은 시인이 있었다. 기형도 시인이다. 이 글을 쓰는 기자보다 두 살이 많은 시인이 죽기 전에 또 다른 선배 시인 한 분과 술 한 잔을 같이 한 적도 있는 인연으로 그의 느닷없는 부음에 황망했던 기억이 새롭다.
위의 시는 기형도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난 뒤 평론가 김현이 유고를 모아 펴낸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중에 실린 시 중 한 편이다. 비극적 작별을 예고하는 듯한 시인 특유의 체념적 표현들이 담겨 있어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시이기도 하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젊은 몇몇 예술가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요절의 운명은 그들의 예술을 오래도록 세상에 새긴다. 기형도 시인 역시 그의 시와 죽음이 커다란 하나의 존재가 되어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특별한 숭고가 되어, 울림이 되어. 가을 잎들이 뭔가에 쫓기듯 쏟아지는 늦은 가을날 시인의 기억을 만나러 나섰다. 광명에 자리 잡은 기형도 문학관에는 시인 기형도를 기억하는 기록들로 가득하다. 시인은 1985년 「안개」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남겨진 여러 작품 속에 시인이 나고 자란 1960년대~70년대의 정서와 사회적 환경이 녹아있다.
경제발전을 하던 시기지만 그 이면은 달랐다. 안양천과 공단에서 내뿜는 안개로 뒤덮인 도시라는 산업화의 그늘을 보며 자란 시인은 시 속에 그런 삶을 깊은 우수와 슬픔으로 그렸다. 요절한 시인의 연대기도 보인다. 1960년 태어난 청소년기 누나의 죽음 이후 시를 쓰기 시작했고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하면서도 계속 글을 써왔던 기록을 만날 수 있다. 신문기자로 활동하며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을 시에 담아내기도 했던 삶의 궤적이 보인다. 문학관의 전시는 시인의 삶을 만나보고 그의 삶을 따라 걸어갈 수 있게 한다. 시인이 사용하던 만년필, 시계, 자주 듣던 음악 카세트테이프, 동아일보 신춘문예 상패, 연세대 졸업패 등 기형도 시인과 관련된 자료들을 소장 및 전시하고 있다. 저 만년필을 내가 그때 보았던가?
한쪽에서 사람들이 기형도의 시를 필사해보기도 하고, 여러 시인이 낭독한 기록을 들어볼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새삼 익숙한 시를 들어보니 눈으로 읽는 것과 듣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어디선가 어둠 속에서 시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기형도 시인의 삶을 만날 수 있는 기형도 문학관에는 북카페와 독서 공간, 강당과 창작체험실 등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문학관을 천천히 살펴보면서 쉬어가기 좋은 장소들이다. 문학관을 둘러본 관람객들의 기록도 살펴볼 수 있다. 저마다의 느낀 점을 남겨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기형도로 쓴 삼행시도 보인다.
독서 공간에서는 편하게 독서를 할 수도 있다. 문화창작 워크숍, 시 창작 워크숍, 창작시 공모전, 전시 연계 프로그램, 시인학교 등 다양한 문학 프로그램과 행사 등을 진행하고 있다.
짧은 세원을 살다 간 한 젊은 시인, 살아있었으면 이제 막 환갑을 넘겨 여전히 젊었을 시인 한 사람이 남긴 빛이 이렇게 오래 세상을 비추는구나 싶었다. 그만하면 훌륭한 삶이 아니겠는가? 살아서는 늘 슬픈 눈이었지만 이제는 저 높고 푸른 하늘 위에서 슬쩍 웃는 깊은 눈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기형도 문학관 주변으로는 광명동굴, 광명 전통시장 등 다양한 여행코스도 함께할 수 있으니 추운 겨울, 한 해가 떠나가는 이 계절에 오래 묵은 슬픔을 만나러 기형도 문학관으로 발길을 돌려보시기를 권해본다.
기형도 문학관
위치 : 경기 광명시 오리로 268
운영시간 : 09:00~17:00(11월~2월) / 09:00~18:00(3~10월)
문의 : 02-2621-8860
50+시민기자단 김재덕 기자 (hamoone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