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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만보만감마지막 글이다. 가만히 있어도 봄볕에 마음이 일렁이는 계절에 연재까지 시작해서 마음이 춤을 추며 출렁였다. 처음에는 신이 나서 미리 원고를 쓰고 두세 번 퇴고했다. 하지만 두 주에 한 번인 마감일은 생각보다 자주 돌아왔다. 정신 차리면 마감이 코앞이었다. 마감 날 아침에 고양이 세수를 하고, 노트북 가방을 메고 집 앞 스터디카페로 출근한 적도 많다. 진한 커피를 두세 잔씩 마시며 카페인의 힘으로 원고를 쓰곤 했다. 다음 원고는 미리 쓰겠다고 다짐하곤 했지만, 다짐이란 원래 실행하기 어려워서 생긴 말이다. 다짐과 다짐 사이 간을 촘촘하게 채운 여러 가지 일에 종종거리다 보면, 다짐은 말 그대로 다짐으로 끝났다. 어느새 공허한 다짐에서 풀려날 시간이 되었다. 한편으로 시원하지만, 글을 써서 처음 이메일로 전송한 후 누렸던 달콤한 설렘을 떠올리면 섭섭하다. 2021년 한가운데 만보만감이 있었다. 연재가 끝난 후에도, 해가 바뀌어도, 이 사실은 변함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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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서둘러 내려오는 계절이라 한없이 게으름 피우고 싶은 12월이다. 한 해가 질 무렵에 잘 어울리는 장소는 서해가 아닐까. 언제나 가슴 쿵쾅거리게 만드는 공항선을 타고 운서역에 내려 삼목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신도에 도착했다. 신도, 시도, 모도를 걸으며, 바닷물은 볼 수 없었다. 물이 빠진 흔적을 품은 갯벌만 넓게 펼쳐졌다. 갯벌에 개흙이 젖살이 오른 아기 볼처럼 토실토실하게 쌓였고, 두툼한 개흙 사이사이에 작은 도랑이 생겼다. 토실한 흙 위로 초겨울 오후 볕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갯벌은 금빛이 도는 회색이 되어 시선을 끌었다. 시도 바닷가에서 굴이 군락을 이루는 바위를 만났다. 굴이 바위에 촘촘하게 붙어서 사는 굴바위였다. 바위에서 떨어진 굴의 잔해(?)가 모여 만든 굴 껍데기 해변도 있었다. 만질만질한 굴 껍데기 해변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굴 껍데기의 뾰족한 부분이 오랫동안 파도와 어울려 둥글둥글했고, 사람의 발이 닿으면 껍질끼리 부딪쳐서 뽀드득 소리를 냈다. 세월은 자연을 둥글게 만드는데 사람은 뾰족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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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거듭할수록 내 심장의 논리가 고개를 꼿꼿이 들어서 다른 사람의 심장을 못 볼 때가 종종 있다. 파도에 밀려 마모된 굴 껍데기처럼 세월과 함께 내 심장의 논리도 부드러워지기를 바랐다. 시도를 빠져나와 모도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오후였다. 바삭거리는 겨울 대기에 해가 수평선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신도선착장에서 삼목선착장으로 돌아갈 배를 기다리는 동안에 하늘이 점점 붉어졌다. 지는 해에는 눈을 찌르는 날카로움이 없다. 태양은 우리 눈에는 하루 중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랗고, 빨갛게 보이는데도 말이다. 커다랗고 또렷한 해는 붉은빛을 강렬하게 발산해 그 주변을 모두 붉은 기운으로 물들인다. 하루든, 계절이든, 일이든 시작은 설렘과 활기란 말과 어울린다면, 마무리에는 지는 해처럼 아름답다란 말과 어울리는 사람이면 좋겠다. 매일 해는 뜨고 지지만, 그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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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하늘이 그리는 일몰을 넋 놓고 보고 있는데 부두 쪽으로 한 사람이 걸어갔다. 그는 붉은 태양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지는 해의 아름다움 속으로 성큼성큼 가고 있는 것을, 일몰의 기운을 온몸에 받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 눈에는 다 보이는 당연한 것이 정작 내 눈에는 안 보일 때가 종종 있다. 거리 두기를 잊었기 때문일 터이다. 시선이 머무는 곳에 설렘이나 아름다움이 자취를 감추고 어둠만 보일 때,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지혜가, 내게 찾아오길 빌었다.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을 나도 볼 수 있기를 기원했다. 신도에서 맞이한 붉고 아름다운 석양을 오래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며.

 

 

50+에세이작가단 김남금(nemon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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