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전’이라 비하했던 국악에 푹 빠지다

 

 

 

 

서양음악은 좋아하면서도 1970년대 초까지 필자뿐만 아니라 친구들까지 모두 국악은 물론 소위 뽕짝이라고 하는 가요도 고무신 또는 엽전이라고 비하하면서 들어 볼 생각조차 안 했으니 교육 탓이었을까, 분위기 탓이었을까.

 

1960년대 초 김치 캣의 ‘검은 상처의 블루스’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 곡도 실은 실 오스틴의 ‘Broken Promises’를 번안한 것이었으니 우리 음악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1960년대 말 펄 시스터스가 부른 신중현의 ‘님아!’나 ‘커피 한 잔’, ‘빗속의 여인’ 등이 겨우 젊은이들에게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1971년 봄 어느 날 대학원에 다니던 후배 P군이 고교동창이라고 하면서 역시 대학원생이던 L군(후에 KAIST 교수 역임)과 같이 서울대 공대 앞에 있던 필자의 집에 놀러 왔다. L군이 들고 온 파이프같이 생긴 악기를 불자 거기서 기가 막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까지 국악을 별로 접해 볼 기회가 없어 아무것도 모르던 필자에게 그는 그 악기가 단소라고 가르쳐주었다. 자신은 어렸을 때 비원 앞에 있던 국립국악원 옆에 살아서 국악을 배웠다면서 며칠 후에는 가야금을 가지고 와서 연주해 주었다. 그 소리도 너무 좋아 필자는 국악을 배워볼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다가 얼마 안되어 거문고를 하시는 용문고 (故)최철호 선생님, 단소 명인이신 김중섭 선생님, 당시 서울대 국악과에 재학 중이었으며 지금은 원광대 교수가 된 가야금의 임재심씨 등이 보문동에 있던 최 선생님 댁에 모여 국악 동호인회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보문동에 다니며 김 선생님께 단소를 배웠다. 집사람에게는 임재심씨가 우리 집으로 와서 가야금을 가르치기로 하였다. 우리는 국악 악보를 오선지에도 표기할 수 있으나 원고지와 비슷하게 생긴 정간보(井間譜)로 표기한 것이 많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서양음악이나 국악이나 한 옥타브에는 모두 12음정(국악에는 율(律))이 있는데 서양음악에서는 그중 7개를 주음(主音), 나머지를 간음(間音)으로 사용하고 있다. 국악에서는 5개를 주음, 7개를 간음으로 사용한다. 기본 5율은 중(仲), 림(林), 무(無), 황(潢), 태(汰)이고 한 옥타브 낮은 음은 배성(倍聲)의 배자 왼쪽 사람인변(?)을, 높은 음은 청성(淸聲)의 청자 왼쪽 삼수변(?)을 붙인다. 그래서 중(仲)의 낮은 음은 중(?), 높은 음은 중(?)이 되고, 황(潢)의 낮은 음은 황(黃), 더 낮은 음은 황(?), 높은 음은 황(?)이 된다. 그리고 정간보의 한 칸은 한 박(拍)이어서 한 칸에 한 글자면 1박, 두 글자면 ½박, 네 글자면 ¼박이 되는 것이다.

 

한편 국악의 주요한 악기들에 대해서도 약간의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관악기인 대금은 단소보다 훨씬 크고 단소가 똑바로 부는 데 비해 옆으로 부는 가로저[橫笛]로, 소리도 청아한 단소에 비해 훨씬 더 남성적이고 중후하다. 또 대금과 비슷하나 크기가 조금씩 작은 중금과 소금이 있으며 리드가 있고 소리가 야무진 향피리나 애잔한 세피리 등도 있다.

 

같은 현악기이고 12현을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가야금에 비해 해죽으로 만든 술대를 손가락에 끼고 연주하는 6현의 거문고 소리는 매우 남성적이고 웅장하다. 그리고 7현인 아쟁은 2현 악기인 해금과 함께 이들과 달리 활대로 현을 문질러 소리를 내는 찰현(擦絃)악기이다.

 

연습곡부터 시작하여 영산회상(靈山會相) 전곡과 청성곡(요천순일지곡) 등을 배우는 과정에서 연습용 악보는 선생님들이 마련해 주셨으나 제대로 된 악보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생각다 못해 당시 남산에 있던 국립국악원에 가서 악보를 좀 빌릴 수 없겠느냐고 통사정을 했다. 직원이 신원을 물어보기에 신분증을 보여줬다. 당시만 해도 국악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을 때인데 더군다나 공과대학에 근무하는 사람이 웬 국악이냐는 듯이 신분증을 본 직원은 필자를 한참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악보를 빌려주었다.

 

 

 

 

그러나 그때는 복사기가 없을 때라 거래하던 인쇄소에 부탁해 빈 정간보 노트를 만들고 볼펜으로 일일이 필사를 했다. 그 악보는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단소를 어느 정도 불 수 있게 되자 이를 학생들에게도 좀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실험실에서 PVC 수도파이프로 단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미농지에 먹지를 대고 골필(骨筆)로 단소악보를 필사한 후 이를 청사진으로 만들어 배우겠다는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들을 종종 국악 연주회에도 데리고 다녔으니 숫자는 몇 명 안됐지만 국악 보급에 조금은 기여를 한 셈이다.

 

집사람은 민요와 박상근(성금연)류 가야금산조를 배웠고 필자도 어깨너머로 조금은 배웠다. 국악의 장단에는 가장 느린 진양조부터 중모리, 중중모리, 굿거리, 자진모리, 그리고 가장 빠른 휘모리가 있다는 것도, 농현(弄絃:현을 짚은 왼손가락을 흔들어 소리에 변화를 주는 것)의 맛도 알게 됐는데 필자나 집사람이나 음악에는 별로 재능이 없는 데다 배우고 난 후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아 이제 연주는 전혀 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김죽파, 성금연 등과 같은 가야금 명인들과 새로운 가야금의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황병기 교수, 거문고의 신쾌동, 한갑득 등의 명인들, 대금의 김성진, 원장현, 이생강 등과 같은 명인들의 연주뿐만 아니라 판소리와 민요, 그리고 이은관의 배뱅이굿과 안비취의 회심곡 등까지 국악을 많이 이해하고 또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임성빈(任聖彬) 명지대 명예교수, 서울특별시 무술(우슈)협회 회장, 홍익생명사랑회 회장, 월드뮤직센터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