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건재한 현역 테일러, 여용기

옷 잘 입으니까 인생이 술술 풀려요

 

마치 전투복을 입은 것 같다. 여기서 전투란 미(美)를 향한 전투다. 여용기(64)씨를 처음 보는 사람은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옷을 잘 입는 사람이 있나’ 하고 놀라게 된다. 그러나 여씨는 단순히 옷만 잘 입는 사람이 아니다. 1953년생인 그는 부산의 남성 패션숍 ‘에르디토’의 마스터 테일러로 근무하는 패션 전문가이기도 하다. 화려한 남자다. 들여다보니 그 화려함을 지탱시켜주는 인생의 궤적도 있다. 그를 멋있는 남자로 만들어주는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여용기씨의 삶과 철학이 궁금했다.

 

 

17세에 부산으로 상경한 거제도 소년은 우연히 양복 기술을 배우게 된다. 훗날 ‘부산의 닉 우스터’라 불리며 시니어 패션의 바로미터로 불리게 되는 여용기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형의 옷을 물려받아 입던 가난한 섬 출신 소년이었다. 그러나 일을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그는 22세에 최연소 재단사가 되고 29세에 부산 광복동에 자리한 모모양복점을 인수해 자신의 가게를 연다. 인생에서 일찌감치 성공의 과실을 맛본 셈이다.

 

화려한 성공과 깊은 실패의 나락

“당시에는 옷을 맞춰서 입었지, 사 입는 사람이 없었죠. 그래서 벌이가 상당했어요. 아무나 광복동 재단사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서울 명동보다도 부산 광복동이 옷을 잘 만든다는 얘기를 듣던 시절이었으니까.”

당시를 회고하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이른 나이에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아 사장까지 했던 과거는 분명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진 것이다. 대기업에서 만드는 기성복이 양복 시장을 장악하는 바람에 여용기씨의 양복점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던 맞춤 양복점들까지 모두 극심한 불황에 직면하게 됐다.

“기성복 시장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시도를 해야 했는데 미숙했던 겁니다.”

다른 양복점들도 차례로 사라지는 상황에서 그 또한 버티기가 어려웠다. 30대 후반에 접어들 즈음 양복점 문을 닫았다. 이후 오랜 시간 건설업, 주차요원 등을 하며 혼자 두 아들을 키우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한 노력과 연구

“다른 걸 해보니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기술이든 10년은 해봐야 자기만의 노하우가 생기는 것 같아요.”

결국 그는 재단사였다. 지인이자 마스터 테일러인 양창선씨로부터 재단 일을 다시 해보자는 제의를 받았다. 여씨와 친하게 지냈고, 여씨의 모모양복점 옆에 코코양복점을 나란히 개업했던 양씨의 제안에 그는 잃어버린 고향과도 같았던 재단사로 복귀했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실과 바늘을 놓고 지낸 세월. 감각을 되찾는 게 우선이었다. 작심하고 한 달 동안 시간을 내서 재단사로서의 옛 감각을 되찾는 동시에 새롭게 도래한 시대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 연구했다. 어떤 마음으로 옷을 만들어야 하냐는 질문에 “시대적 흐름을 잘 봐야 한다”고 거듭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그러한 노력으로 환골탈태했다. 그 결과 작년 6월 부산 중구 남포동에 오픈한 남성 패션숍 ‘에르디토(EREDITO)’의 마스터 테일러를 맡게 됐다.

 

멋을 내려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여용기씨는 요즘 가장 인기 있는 SNS 스타이기도 하다.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이미 4만 명을 넘어섰다. 그가 올리는 그의 사진들을 보면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눈에 봐도 ‘옷을 잘 입는다’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사진들이다. 센스와 위트를 겸비한 스타일링이 좋은 편인 그는 패션 잡지에 나오는 옷을 그대로 만들어 직접 입어봤다. 모자, 안경, 양말, 벨트, 신발, 넥타이를 맞춰 입고 액세서리로 꾸몄다. 그런뒤 SNS에 올리니 20~30대 팔로어가 댓글을 단다.

그에게 자신을 코디할 때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는지 물어보자 “체형”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특히 머리와 얼굴 쪽에 주안점을 두고 옷을 입는 편입니다. 그런데 난 어떻게 입어도 자신 있어요. 나는 옷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옷을 더 잘 입어야 해요(웃음).”

하루에 두 시간은 두덕산을 등산하고 그중 30분은 근력운동을 한다는 그는 시니어들에게 필요한 패션 전략을 “줄여 입어라”라는 말로 요약했다.

“‘아저씨와 오빠는 한 끗 차이’라는 말이 정말 맞는 말입니다. 줄여 입으면 젊은 사람들이 입는 핏이 나와요. 그런데 막상 그렇게 입으려고 하면 겁부터 납니다. 불편하기도 하겠죠. 하지만 멋을 내려면 불편한게 있을 수밖에 없어요. 멋을 내려면 감수해야 해요. 우리가 젊었을 때도 그랬어요. 당시에는 공중화장실이 대부분 재래식 화장실이라 일을 보려면 앉아야 해서 옷이 구겨졌잖아요? 그 구김을 만들지 않으려고 바지를 벗어서 걸어놓고 일을 본 적도 있어요.”

비스포크 맞춤은 한 벌의 슈트를 만들기 위해 1만2000땀의 손바느질이 필요하다. 비접착 방식으로 천연 광목을 대고 하나하나 손바느질 작업을 하면서 옷의 형태를 잡는다. 비스포크 슈트는 한 달 이상 걸리는 고도의 기술력을 요구한다. 이러한 정성이 깃든 슈트를 입으면 마음가짐도 반듯해지고 말도 신중하게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옷을 잘 입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다.

“진심을 다해 만든 양복은 사람의 겉모습만 바꾸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도 바꿀 수 있어요. 좋은 사람이 입는 옷이 멋진 옷이죠. 멋진 옷으로 완성하는 건 결국 예절이거든요. 예절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죠.”

 

 

슈트는 내 인생의 최고 선물

흰 수염에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신사가 양손에 줄자를 들고 정장을 맞추러 온 손님의 치수를 잰다. 곧이어 그는 커다란 테이블에 양복감을 깔고 바늘과 실을 무기 삼아 작업에 나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이 흐르는 노신사가 두꺼운  돋보기를 코에 걸고  열정적으로 손마름질하는 모습은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감동적이다.

여씨는 나이 들어서도 멋있게 보이고 싶다. 면 펑퍼짐한 옷은 벗어 버리고 젊은 사람들이 입는 옷을 연구하라고 조언한다. 나이 들어도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최고의 재단사로 불리면서 자신의 사업체를 가졌던 사람이 그 일을 그만두고 완전히 다른 일을 수십 년간 해야 했다. 그 좌절은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깊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오랜 고통 끝에서 자신이 좋아하고 보람을 느꼈던 과거를 다시 찾고 재도전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변화를 꾀하고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다시금 맞이한 인생의 봄은 그러한 마음가짐과 시도를 통해 도착할 수 있었다. 그의 외견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년의 아우라가 단단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멋진 옷을 만들어 입고 제일 먼저 누구한테 보이고 싶냐 물었더니 아직 싱글(돌싱)인 그는 이렇게 답했다.

“모 방송사 만남 주선 프로그램에서 저를 출연시켜준다고 합니다. 상대 파트너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스트라이프 슈트로 폼 좀 내볼까 해요. 슈트는 내 인생의 최고 선물이니까 또 행운을 가져다줄지도 모르죠.”

 


▲맞춤 정장은 재단사가 상주해 있는지 없는지부터가 차이가 난다. 슈트 한 벌을 제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총 60시간. 후배들에게 혼을 담아 제작하는 마음부터 훈련시킨다고.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박규민(스튜디오 봄) parkkyum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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