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말하는 이상용(李尚龍·48) 작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의 작품세계의 근간이기도 한 ‘운명’을 새삼 되새겼다. 평택에 있는 작업실에서 은둔하듯 기거하며 1만 점이 넘는 작품을 만들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그는 드로잉, 판화, 벼루, 조약돌, 바큇살, 의자, 상여 등 독특한 오브제들을 사용하며 남들과 다른 고유의 영역을 개척해가는 중이다. 한국 미술, 서양 미술을 아우르기도 하고 무심히 스쳐 지나가기도 하는 듯한 그의 작품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맑게 정제되어 누구도 더럽힐 수 없는 자신의 기준들이었다. 이상용 작가가 만나고 만든 운명들에 대해 들어봤다.
충남 공주에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이상용 작가의 작업실은 평택에 위치해 있다. 누나가 사는 곳을 지나다니다가 발견한 곳이다. 서울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공간, 한적한 이곳에서 그는 밭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순박한 농부 같은 모습이 그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러나 작품 생산에 있어서만큼은 금욕적이지 않다. 그의 작품은 온갖 장르를 넘나든다. 1만2000여 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작품들은 그가 쉬지 않고 일하는 근면한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증명한다. 그리고 그 작품들의 숫자는 그가 평택의 외진 곳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이유기도 하다.
운명적으로 만난 작품 소재들
“예술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덮치는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합니다. 예술인은 등대지기와 같죠. 바쁘게 새로운 상품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발맞춰가는 시대에 느림 속 자연과 사람의 만남에서 소중하고 깊은 운명을 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작품을 시작했어요.”
이상용 작가의 작업실에서 평면회화 드로잉 작품 이외에 특별히 시선을 끈 것은 폐철제로 만든 페달 작품이었다. 왜 폐철제를 소재로 삼은 걸까?
“사용하다 버려진 물건들, 천천히 녹이 슬어가는 쇠. 쓰다 버린 물건이든 새로운 물건이든 저와 찰나의 운명적 만남에서 순간순간 만들어진 작품들이지요.”
쇠는 좀 무겁고 아파 보인다는 기자의 질문에 이 작가의 대답은 간단했다.
“철제의 묵직한 무게와 차가운 성질이 현대를 살아가는 고독한 인간을 상징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버려진 물건들을 보며 날마다 달라지는 운명과 기억, 그 내밀함이 어떠한 운명으로 다가갈지 상상하며 만들고 싶었죠.”
이상용 작가는 소위 ‘예술가다운’ 이미지와는 다르다. 뭔가 흐트러지고 난삽하며 혼돈의 한가운데에서 일할 것 같은 도취된 작가의 이미지가 없다. 작품이 보관된 창고는 그가 직접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작품에 먼지가 앉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외면적인 것보다는 내면적인 것을 더 추구한다. 작업실이 곧 집인 이곳에 보관된 작품을 들여다보니 그의 고집스러움이 느껴진다. 예술은 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이지 작가의 모습이 겉으로 보여지는 것들에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와 인터뷰하며 그에게서 맑은 영혼을 느꼈다. 오롯이 꾸밈없는 것을 지향하는 면모 때문일지도 모른다.
‘벼루 작가’로 유명한 그의 작품에서는 인간에 대한 집착이 느껴진다. 사람을 주제로 집중적으로 파고든 작가는 흔치 않다. 그가 그토록 사람을 자신의 작품 속에 자주 드러내는 것은 세상이 너무 빠르다는 한탄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빨리빨리’가 입에 배고 생활에 밴 한국인은 세상의 속도를 더욱 몰아붙인다. 그리고 그렇게 속도에 매여 살다 보니 정작 인간의 문제를 생각할 시간이 없다. 그가 사람에 주목하게 된 것은 잊혀져가는 인간성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리라.
물질적인 것은 빨라도, 마음은 천천히
이상용 작가는 소재를 억지로 끌어다 쓰지 않고 순리적으로 발견한다. 그가 벼루(inkstone)를 소재로 쓰고자 한 것도 그러한 마음의 일환이었다. 벼루는 단단한 물건이다. 백 년 전, 사백 년 전에 벼루들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서 쓰이고 시간 속에서 계속 연결되어 결국 한 작가의 손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중간에서 혹은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으면 버려졌을 수도 있는 벼루는 그의 손에서 다시 생명이 되살아났다. 그는 그저 그것을 보고 무언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누군가 쓰다 만 것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운명으로서 자신에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벼루뿐만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마치 버려진 골동품 같은 한국 전통의 얼이 담긴 것들이지만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소재들이 운명과도 같다. 그렇게 만난 작품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참 곤란해했다. 그에게는 조그마한 부속품들조차도 운명이고 만남이므로 어떤 게 의미가 크다 작다 논할 수가 없단다. 이러한 일관된 그의 작품세계조차도, 실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작업을 하다 보니 통일감이 생겨 그만의 독자적인 생태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운명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작업일지도 모른다. 제도권 내에서 학습된 예술적 역량보다는 타고난 자질을 발판 삼아 자유롭고 무한한 상상력을 펼치는 실험작가답다.
39세 나이에 떠난 뉴욕
이상용 작가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뉴욕에서 6년을 지냈다. 그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관통할 ‘운명’을 발견하게 된 뉴욕. 그곳에 갔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아홉 살의 늦은 나이였다.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에는 쉽지 않은 나이였을 터. 그런데도 그가 뉴욕이라는 새로운 출발지를 선택하게 된 데에는 삶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다.
사람을 천편일률적으로 만드는 한국의 입시 교육을 매우 싫어했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 입시학원 원장으로 열심히 일했다.
미술학원 일은 제법 잘돼서 대전에서 큰 학원들 중 하나로 성장했다. 먹고사는 문제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맡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팽개치고 자기 멋대로 가는 것이 죄처럼 느껴져서 계속해야 했던 학원이었다. 그러나 입시에 대한 혐오가 강했던 만큼, 아이들을 그 틀에 맞춰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물론 틀을 깨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최대한 독특하게, 똑같이 하지 않고 개성 있게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게끔 가르쳤다. 그러나 “아무래도 한계가 있더라”라는 그의 자조 섞인 한마디에서 많은 좌절과 고민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예술가로서, 작가로서의 삶을 추구하고 싶었다. 열두 시에 학원에 출근해서 여섯 시까지 작업하고 잠깐 자는 생활을 10년 넘도록 했다. 그의 방대한 작업량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기도 했다. 결국 자신의 목표를 떨쳐버릴 수 없었던 그는 뉴욕으로 향한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가르칠 나이에 대학 3학년 학생으로 편입하게 된,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틀어박혀 작업에만 몰두하다
이상용 작가는 뉴욕에 처음 갔을 때 3년 내내 매일매일 갤러리를 돌아다녔다. 보고 또 보는 일의 연속이었다. 뉴욕현대미술관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갔다. 그림을 보고 느끼려 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본 그림들과 자신의 작품을 접목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었다. 그는 그저 흐름에 맡기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말한다. 그렇게 3년이 지나니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후 3년 동안 외부 출입 안 하고 작업만 계속했다.
옆에서 보면 무언가 홀린 듯한 삶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 데에는 그의 지론이 있다. 바로 어릴 때부터 남의 것을 보고 하는 것은 안 좋아했고, 남이 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려 하는 그의 작업관이다. 그는 작업을 할 때 매번 자신이 ‘원시시대에 태어난 원시인’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한다고 말한다. 그림이 전혀 없는 세상에서 뭔가를 찾아보자는 마음가짐과 노력이야말로 그의 독특한 작품세계의 동력이었다. 하긴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바탕에서 뭔가를 만들어낸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운명’과 같은 끌어당김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할 때 그토록 운명을 강조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억지로 작품의 소재를 찾으러 다니지 않는다. 있는 소재에 맞춰 작품을 만들 뿐이다. 그 자연스러움과 필연성이야말로 운명의 다른 이름 아니던가.
회화, 조각, 설치, 그림, 시까지 아우르다
젊을 때는 유명한 화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배우가 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상용 작가의 운명이 아니었나보다. 이제 그는 조용히, 열심히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들은 뉴욕의 미술관들과 단원미술관, 관훈갤러리, 간송미술관 등에 걸렸고 코오롱그룹과 한국문화원, 펜실베이니아 대학병원 등지에서도 볼 수 있다. 그에게서 은둔 고수의 아우라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실 그의 작품은 양도 많지만 분야 또한 방대하다. 회화, 조각, 설치, 그림과 같은 미술 작품 외에 시와 사진까지 아우른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장르를 굳이 구분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모두가 얽혀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들이라고 말한다. 소위 ‘권위’를 위해 한쪽으로 장르를 정하라는 지인들의 충고도 있었지만 ‘사람이 맨날 한 가지만 먹으며 살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특히 시는 그의 미술 작업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현재 6000편 정도 썼고, 2000편 정도를 공개한 상태다.
8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누이들 밑에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아홉 살부터 땅바닥에 그린 그림으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소나무로는 목상을 만들고 빨래비누로는 조각상을 만들었다. 또 잡동사니로 척척 만들어낸 작품들이 쌓여 그의 집은 마치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그러다 처음 시를 접하게 된 것은 열일곱 살 때였다. 그때 아버지가 갑자기 하반신 마비로 쓰러졌고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니던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간병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혼자 있다 보니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그 생각은 시적 감수성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어린 시절의 고독하고 상처 입은 감성들과 연결된다.
“시라는 것은 누군가 말했듯 말라가는 잎을 파랗게 유지시켜주는 것 같아요.”
예술 작품은 내면이 익어가는 과정에서 뭔가 많은 것들을 보게 되고, 그러면서 위로 올라가다 보면 흐트러지게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것은 마치 나무처럼 시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시들어가는 과정에서 시가 중심을 잡아준다. 흐려지거나 어렸을 때와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시를 통해 다시 본질을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시를 계속 쓸 것이다. 누구에게 보여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영원할 작품들
그가 최근 열중하고 있는 작품 소재는 상여다. 그가 볼 때 우리나라의 상여는 어느 나라에도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다. 상여를 통해, 죽음에 이르면 왕과 못지않은 마지막 길을 서민들에게도 제공해줬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면서 우리 조상이 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사상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 아니겠냐며 반문했다. 샤머니즘 관점에서 상여를 소재로 한 작품을 꼭 만들고 싶었다는 그는 현대적으로 해석된 이상용 작가식의 상여를 만들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어렸을 때 상엿집을 들락날락했는데 무섭잖아요. 어른들은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고. 이게 아름다운 상여 문화와 매치가 안 되는 부분인데,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거죠. 그렇게 생각 안 했으면 좋겠고, 그래서 더 잊히기 전에 저보다 어린 세대에게 상여라는 게 이렇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로 편하게 봤음 싶었어요.”
여섯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스튜디오를 가진 작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그러한 꿈들은 이제 어느 정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이제 그는 누군가와 연결되는 작가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의 작품을 본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 싶어 할 때 그 길을 연결해주는 그런 작가. 자신이 죽는다고 해서 작품도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을 사람들이 보고 베끼며 영향을 받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가 바라는 작가의 모습이란 인연과 이어지는 것이고, 그 인연은 다소 희미한 것처럼 보여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어떤 운명의 길과도 같은 무언가다.
그의 마음을 읽는 사람은 그의 인연이 되면서, 비로소 그의 작품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뷰 내내 작가의 맑게 정제된 사상과 순박한 마음이 간결하게 와 닿는 기분이었다. 어제까지 살게 해준 사람에게 감사하며 내일을 산다는 이상용 작가. 뭐라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기자의 심정을 그의 작품에 공감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는 기자로서는 이상용 작가의 운명 같은 작품이 세상 밖에서 대중과 소통하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짐짓 이것이 예술이라는 것을.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박규민 parkkyum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