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꿈을 이룬 쁘띠프랑스 한홍섭 회장
아름다운 소행성을 꿈꾸는 일흔의 어린 왕자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들인 그 시간 때문이야.’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속 한 문장이다. 어린 왕자가 자신의 소행성을 길들였던 것처럼, 한홍섭(韓弘燮·71) 회장은 자신의 마음속 소행성 ‘쁘띠프랑스’를 길들이기에 여념이 없다. 그는 ‘돈’이 아닌 ‘꿈’ 덕분에 지금의 작은 프랑스 마을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말한다. 청평호반 언덕 위의 아름다운 소행성, 반짝이는 그 꿈은 30년 전부터 빛나고 있었다.
▲쁘띠프랑스 한홍섭회장
1980년대, 연 매출 100억원의 페인트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한 회장은 기술제휴 건으로 유럽 출장이 잦았다. 프랑스에도 종종 오가며 혼자 미술관 나들이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 신문 문화면의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피카소의 딸이 아버지의 소장품을 처음 공개하는 전시회를 연다는 기사였다. 그길로 프랑스를 찾은 한 회장에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전시장에 관람객들이 긴 행렬을 이룰 정도로 성황이었어요. 그 광경을 보면서 문득 ‘프랑스 미술을 한국에 소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무렵 내 형편에 맞는 작은 미술관 하나 있었으면 하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막상 구체적으로 검토하다 보니 생각이 바뀐 거예요. 미술 작품보다는 그 나라의 생활과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 더 유익하리라 판단했죠. ‘그래, 프랑스 마을을 한국에 옮겨 놓아보자!’ 하고는 그때부터 꿈을 키우기 시작했어요.”
▲쁘띠프랑스
떼섭이 왕자의 집념으로 길들여진 소행성
그가 프랑스 마을을 계획할 당시에는 88서울올림픽 개최로 국제화 바람이 한창이었다. ‘국제화 시대에는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도 상대의 문화를 알아야 경쟁할 수 있으리라!’ 그의 마음에는 남모를 사명감까지 움트고 있었다.
“중소기업 경영자로서 큰일은 못하더라도 열심히 하다 보면 나라에 보탬이 되고 개인적으로도 보람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자료도 열심히 찾아보고, 일 년에 서너 번씩 현지에 직접 찾아가 골동품을 수집했죠. 틈만 나면 차를 몰고 마을 부지를 물색했는데, 1995년에 지금의 터를 찾았어요. 명의 이전을 마치고 허가가 난 건 3년 뒤였죠. 묘지 이장 문제랑 IMF 여파로 지체됐거든요. 페인트 사업을 병행하며 준비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꿈에 대한 열정과 각오가 남달랐기 때문에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는 동안에도 서울대·고려대·홍익대 등 대학원 최고위 과정을 30년에 걸쳐 10군데 이상 수료하는 등 경영과 문화에 대해 익히고자 노력했다. ‘잘나가는 중소기업 CEO가 뭐가 아쉬워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하나?’ 하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그의 꿈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런 자신의 고집스러운 성향 덕분에 꿈을 이룰 수 있었노라 말하는 한 회장이다.
“어렸을 적 별명이 ‘떼섭이’였어요. 한번 고집부리면 아무도 못 말릴 정도로 포기를 몰랐으니까요. 회사를 경영하면서 먼 프랑스에 비싼 여비를 들여가며 발품을 파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죠. 그러나 강한 집념으로 밀고 나갔기 때문에 이렇게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페인트 사업은 내가 달리 아는 게 없어서 생계를 위해 선택한 일이었다면, 쁘띠프랑스는 나 스스로 보람된 일을 하고 싶어서 작정하고 시작한 일이었어요. 그래서인지 힘들긴 했어도 목표를 이뤄가는 과정에서 더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낀 것 같아요.”
한 회장은 쁘띠프랑스라는 소행성은 떼섭이라는 어린 왕자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가 100여 차례 유럽을 오가며 직접 발품을 팔아 마련한 골동품과 미술품 등으로 꾸며진 이곳에서 떼섭이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공간은 바로 주택전시관이다. 150년 된 프랑스의 전통 가옥을 목재와 기와, 바닥까지 모두 해체해서 한국으로 싣고 와 재현한 것이다. 프랑스 시골집의 향수가 물씬 느껴지는 이곳은 현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전통 가옥이라고. 그만큼 한 회장의 고난이 뒤따른 산물이기도 하다.
“수년간 시골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프랑스 전통 가옥을 찾으려고 무척 애를 썼어요. 막상 마음에 드는 고택을 사도 뜯어서 한국으로 가져간다고 하면 거절당하기 일쑤였죠. 프랑스인들은 자기 문화에 대한 애착이 강하거든요. 겨우 찾아낸 150년 된 목조 가옥을 해체해 한국으로 옮겨오는 것도 만만치 않았어요. 우리와 건축 방법이 다른 데다가 설계도면도 없으니 다시 조립하기도 어려웠죠. 그러나 무엇 하나 대충하려 들지 않았어요.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지름길은 ‘정직’이거든요. 100명 중 99명이 몰라본다 할지라도 오리지널을 고수하고 제대로 하려고 노력했죠.”
1 프랑스 여인의 방으로 꾸며진 ‘메종 드 마리’
2 골동품 전시관
수익보다 유익을 추구하며 이뤄낸 값진 꿈
주택전시관 안에는 그가 20년 동안 프랑스를 돌아다니며 구한 19세기 장롱이며, 200년이 넘은 타피스리 의자와 가구, 장식품들이 놓여 있다. 이 공간뿐 아니라 쁘띠프랑스를 둘러보면 어딘지 모르게 정겨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애초에 이곳을 계획할 당시 150년 전의 프랑스 시골 마을을 모티브로 해 옛날식 인테리어와 골동품이 많기 때문이다.
“파리에 처음 갔을 때 가이드가 ‘200년 전 사진과 현재가 똑같은 마을이 있는데 한번 가보실래요?’ 하는 거예요. 밀레의 생가가 있는 바르비종이라는 마을인데, 가서 보니 정말 옛날 모습 그대로더라고요. 새로 지은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오래된 마을이 좋겠다 생각했죠. 손때가 묻은 골동품을 보면 그 나라 사람들의 문화와 정서가 더 와 닿거든요. 또 디자인이 좋고 물건 상태가 좋아야 100년, 150년을 가는 거지 나쁜 물건은 그렇게 오래 남아 있기도 힘들죠. 그만큼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봐요.”
그가 수집한 골동품만큼이나 쁘띠프랑스에서 가치 있는 공간은 ‘생텍쥐페리 기념관’이다. 떼섭이의 집념과 인생의 좌우명과 같은 정직 덕분에 프랑스 생텍쥐페리재단과 정식으로 국내 라이선스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어느 날 현지 통역사를 통해 생텍쥐페리 외삼촌의 손자가 생텍쥐페리재단의 대표로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2000년 한 해 동안 네 차례나 재단을 방문해 내가 왜 이 사업을 시작했고, 어떤 의미로 기념관을 만들려고 하는지에 대해 무던히 설명했죠. 페인트 사업을 할 때도 오로지 ‘정직’을 무기로 그 흔한 접대 한 번 안 해봤어요. 좋은 제품을 만들고 열심히 이야기하면 언젠가는 알아주는 사람이 생기거든요. 그런 경험이 생텍쥐페리재단과의 협상 때도 통했죠. 덕분에 쁘띠프랑스를 개장했을 때 생텍쥐페리 기념관에 작가가 입었던 옷 등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은 유품을 전시할 수 있었어요.”
생텍쥐페리 기념관에 가면 1943년에 출간된 <어린 왕자>의 초판본을 비롯해, 작품 구상 당시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과 자필 원고 등을 볼 수 있다. 오르골 전시관, 인형 박물관 등도 프랑스 현지 못지않은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어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 때문에 더러 ‘지방자치단체나 정부에서 만든 공공 문화시설 아니냐?’며 묻는 이들도 있다. 개인의 노력으로 일궈진 마을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저마다 감탄을 마다치 않는다. 수익보다는 유익을 위해 시작한 사업인 만큼 쁘띠프랑스는 아직도 개관 당시 입장료(8000원)를 받고 있다. 그동안 그가 들여놓은 볼거리, 즐길거리가 더 풍성해졌으니 오히려 손해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보람에 무게를 둔다.
“나는 자선사업가는 아니지만, 내가 목표로 했던 것을 이뤘고 그것에 사람들도 즐거워하고 만족하니 더 바랄 게 없어요. 지금도 인스타그램(사진 공유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보면 우리 마을을 찾아간 사람들이 올린 사진만 4만7000장이 넘어요. 참 뿌듯하죠. 그전에 페인트 사업을 할 때는 인화성 물질, 니스, 신나 같은 것을 다루니 늘 조심스러웠는데 지금은 아름다운 미술품, 예쁜 소품을 만지니 한결 기분이 좋죠. 또 사업을 할 때는 100여 명의 직원을 신경 쓰고, 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해서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나를 위한 즐거운 목표를 찾아 움직이고 있어요. 경쟁사회 속에서 무언가를 이룰 때와는 전혀 다른 기쁨을 느끼고 있죠.”
완벽한 꿈을 향해 여전히 발품을 팔다
프랑스 마을 조성을 꿈꾼 것이 1988년, 터를 잡은 것이 1998년, 그리고 쁘띠프랑스가 문을 연 것이 2008년. 중년 사나이의 가슴에 피어오른 순수한 꿈은 꼬박 20년 만에 이뤄졌다. 그는 40년 넘게 공을 들였던 페인트 사업을 정리하고 ‘문화마을 촌장’으로 본격적인 제2인생을 맞이했다. 어느덧 고희를 넘겼지만, 여전히 발품을 팔고 있다는 한 회장이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땐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우려가 있었어요. 그런데 개관하고 2개월 만에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촬영지로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관광객이 몰리기 시작했죠. 막상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니 부족한 것들이 보이고,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부지런히 프랑스를 오가며 모은 수집품들로 3년에 걸쳐서 건물 두 개를 더 지었죠.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은 직접 수집하러 다닐 생각이에요.”
꿈을 이룬 지도 어언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꿈을 이뤄가고 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자신의 꿈에 완성도를 높여가고 있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보내는 평범한 삶은 무의미하죠.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쁘띠프랑스를 만들면서 막연했던 꿈은 이뤘지만, 아직도 더 하고 싶고 해야 할 것들이 많아요. 지금은 이탈리아 마을을 조성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여전히 우려하는 사람도 있고,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죠. 그러나 어떤 이해관계를 떠나 제2인생의 꿈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멀리 내다보고 열심히 발품을 팔아보려고요.”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사진 김수현 player0806@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