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끼리 살갑게 모여 앉아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가끔 경계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 때문에 난감해질 때가 있습니다. 기본적인 마음이야 알 것 같아요. 이 풍진 세상을 이러구러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물어볼 수도 있는 동료적 궁금증이라는 걸요. 아무리 각자 사정이 다르다 한들 결국은 그게 다 사람 사는 이야기로 귀결되잖아요. 그런 와중에 굳이 프라이버시 운운하는 자체가 다 부질없는 낯가림이라고 치부해버리는 대범한 인류애가 도도하게 흐르는 거죠.

 

솔직히 저 역시 어느 정도는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환경 속으로 불쑥 내던져진 생명체들이잖아요. 어떻게든 그 환경과 화해하면서 살아가려고 애쓰는 중이고요. 그런 시선으로 보면 굳이 남에게 자기 형편을 애써 가릴 이유도 없어요. 환경이 뭐 어디 본인들이 만들어낸 건가요? 그 환경에 대처하고 화해하며 나를 발현시키는 과정만이 본인의 영역이지요. 그래서 남들의 환경을 굳이 올려다보지도 내려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 생명이 놓인 자리로서만 관심이 있는 거예요. 그 안에서 각자의 삶을 피워내려고 애쓰는 모습 자체가 아름다워서요.

 

 

하지만 누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간혹 자기 이야기를 극도로 꺼리는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저도 조심을 합니다. 관심종이라고 욕하지는 않을까? 떠벌이라고 흉보진 않을까? 괜히 눈치가 보이거든요. 그럼에도 호시탐탐 남들과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삶이란 전문가의 이론이나 개념으로는 도무지 정리될 수 없는 애매모호함으로 가득하잖아요. 그런 것에 관해 설왕설래 하다보면 얼마쯤은 살아갈 위안을 얻게 되는 것 같아요. 우연히 벤치마킹할만한 좋은 방법을 찾기도 하고요.

 

특히 엄마들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집안이야기, 가족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함께 사는 사람들은 질색이지요. 왜 내 이야기를 밖에서 하느냐? 이건 인권침해다 뭐다, 말들이 많아요. 저는 뻔뻔하게 대처합니다. 엄마들끼리 만나 사람 사는 이야기 좀 하는 게 뭐 그리 나쁘냐? 이건 그냥 동종업계 종사자끼리 직업과 연관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 정도도 못 참으면 아예 엄마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어깃장을 놓기도 하지요. 알아요, 알아. 그게 얼마나 싫은 건지. 저 또한 많이 당하며 컸으니까요. 하지만 막상 입장이 바뀌고 나니 뭐 그렇게 엄마만 몰아세울 일인가 싶어 슬그머니 열이 나더군요. 글쎄.

 

하긴 요즘은 1인 가족이 대세라고 하니 엄마들 사는 이야기가 꽤 불편한 주제일 수도 있겠어요. 고정관념은 늘 현실보다 변화 속도가 늦잖아요. 그럴 때면 사람들의 시선 자체가 폭력이 되기도 하지요. 아예 섣부른 판단 근거를 주지 않으려는 방어본능이 생길만도 해요. 그래서 어느덧 우리끼리도 사는 이야기를 나눌 때 사생활을 침해할만한 질문은 되도록 삼가는 게 불문율이 되었어요. 자기 이야기만 하고, 남 이야기는 궁금해 하지도 말고 물어보지도 말자는 거죠. 이야기는 나누되 상대가 굳이 말하지 않는 속내까지 들춰보면 안돼요. 그런 눈치도 없이 꼬치꼬치 물어보는 사람은 금방 진상으로 외면당하게 되지요. 저는 뭐든 묻는 대로 거리낌 없이 잘 대답하는 성격이라 별 문제는 없었어요. 오히려 가리려는 게 많은 비밀주의자들을 까칠하게 여기는 편이었지요.

 

그러던 제가 얼마 전에는 말문이 턱 막히게 되는 질문을 하나 받았지 뭡니까. 엄마들끼리 이야기보따리를 풀다가 생긴 일도 아니었어요. 평생교육센터에 뭘 배우러 갔다가 시니어들의 취(창)업과 관련한 설문조사에서 받게 된 질문이지요. ‘가족경영 홈CEO’라고 자처하던 주부 임기가 자연스럽게 만료 시점으로 다가오던 오십 즈음부터 저는 업종 전환을 위해 본격적으로 일거리를 찾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마침 시니어 일자리와 관련된 정책 수립을 위해 기초 자료를 조사한다기에 기꺼이 동참했지요. 몇 살이냐? 어디 사냐? 뭘 잘하냐? 뭘 하고 싶냐? 어떤 성격이냐? 등등 세세한 질문이 이어지더군요. 대답을 잘해야 저에게 맞는 정책이 생길 것 같아 꼼꼼하게 답을 써내려가던 중이었는데 마지막 질문을 받고 나서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어요.

 

“당신의 현재 수입은 얼마입니까?”

“…”

 

 

갑자기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어요. 모르겠어요. 왜 그랬는지. 앞선 질문에 신나게 적어가던 미래의 포부와 장밋빛 희망이 일순에 확 쪼그라지더군요. 저의 경제적 현실과 대비하면 비웃음이 나올 만큼 거창한 것들이었거든요. 참담했어요. 생각해보니 여태 받았던 질문은 늘 가정 전체에 관한 질문이었기에 그렇게까지 난감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괜히 마음이 복잡해지더군요. 부끄러울 일이 아닌데도 한없이 부끄럽고 작아졌어요. ‘얼마 버세요?’라는 마지막 질문이 가시처럼 콕 박혔어요. 얼마? 사실 열심히 헤아려본 적도 없어요. 숫자가 이렇게도 사람 하나를 단번에 비루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인 줄 몰랐어요. 통계를 위해 필요한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는 그때 참으로 큰 충격을 받았지요. 사람 사는 일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뭘 숨길 게 있느냐고 하던 생각도 저의 오만이었던가 봐요. 조그맣게 끄적거리다가는 그만 꾸깃꾸깃 설문지를 접어 제출하지도 않고 나와 버렸답니다.

 

그 때 처음, 그 동안 제 자신이 너무나도 경제적으로 무능한 ‘비영리 개인’이라는 걸 실감했어요. 사실 가정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주부 업무를 주업으로 할 때는 한 번도 저의 노동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아이 엄마가 나가면 300만원은 벌어들여야 겨우 ‘똔똔’이더라는 소리 때문에 그래도 300만 원 정도는 쳐주나보다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에요. 가정이 운영되려면 어쩔 수 없이 해내야 할 일이 끊임없이 생겨나잖아요. 그걸 남에게 맡길 수 없었기에 적성 따라 일을 나눴을 뿐이지, 굳이 경제적인 가치로 어림했던 일도 아니에요. 그 ‘가정’이 서서히 변화하고 해체되면서 전환하는 시점을 맞다보니 전업주부로만 살았던 엄마라는 사람도 이제는 개인의 영역으로 회귀해야겠다는 자각이 생겨난 거지요.

 

사실 주부로만 오래 살다보면 생각의 흐름 자체가 돈에 무뎌져요.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의미 있나, 재미있나, 가족에 도움 되냐는 식으로만 판단하고 결정을 하게 돼요. 쓰면서 아끼는 것에는 점점 요령이 붙지만, 외부에서 벌어들이는 경제활동과는 소원해지고요. 어쩌면 엄마들이 나이 들어 속물처럼 더 ‘돈! 돈!’하고 외치게 되는 이유도 이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 같아요. 평생 내 것, 네 것을 따로 헤아리지 않고 살아오던 삶이 가져온 경제적 결핍감이 뒤늦은 아우성으로 터져 나오는 것 아닐까요?

 

 

마음에 박힌 한 가지 질문에 떠오르는 만 가지 생각입니다. 얼마 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