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작가 노경식

언제나 인생은 ‘젊은 연극제’

 

극작가 노경식(盧炅植·79)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어떤 얘기든지 들려주세요.”

극작가란 무언가. 연출가에게는 무한대의 상상력을, 배우에게는 몰입으로 안내하는 지침서를 만들어주어 관객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자가 아닌가? 그래서 달리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인생 후배로서 한평생 외길만을 걸어온 노장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무대 위 모노드라마를 관람하듯 말이다. 자, 그럼 이제 커튼을 열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봐주시겠습니까?

 

 

노경식 희곡집 1권 <달집>을 꺼내 들다

인터뷰에 나가기 전 서재에서 책 하나를 찾 아냈다. 노경식의 첫 희곡집 <달집>이었 다. 노경식 작가와도 가까웠던, 지금은 고 인이 된 은사에게 2004년 초판을 선물로 받았다. 책을 받고 13년 만에 일종의 필자 사인회를 거행(?)한 것.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철새>로 당선된 걸 생각하면 한 참 시간이 흘러 희곡집을 발간했다.

“내가 책을 늦게 냈거든. 그래도 지금까지 7권이나 나왔어요. 희곡은 한 40편 되는 것 같아. 그중에 5편 정도 빼고는 다 공연 을 했습니다.”

전북 남원 출신인 노경식 작가는 경희대학 교 경제학과를 거쳐 서울예술대학교의 전 신인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에 들어가 동랑 유치진, 여석기 선생으로부터 극작 수 업을 받았다. 올해 80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리얼리즘의 대표 현 역 극작가다. 노경식 작가는 토속적인 색 채에서부터 역사, 정치극에 이르기까지 다 양한 형태의 작품을 써왔다. 앞서 언급한 1971년 작품 <달집>으로 제8회 한국연극 영화 예술상(백상예술대상) 희곡상과 연기 상 등을 받아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작년 극작50주년 기념공연 <두 영웅>을 비롯해<징비록>, <흑하(黑河)>, <천년의 바람> 등 은 노경식을 대표하는 역사 시대극이다.

“내가 왜 역사나 정치에 관심이 많냐면 경 제학과 중에서도 경제사를 전공했기 때문 입니다. 조선, 한국 경제 그런 쪽. 그래서 시대극이나 역사적인 소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독립운동사라든지 임진왜란 도 많이 썼고요.”

 

 

<소나기> 작가 황순원의 눈에 든 남원 촌놈

처음 노경식의 가능성을 알아본 사람은 경 희대 재학 시절 만난 소설 <소나기>의 작 가 황순원이다. 황순원은 노경식이 수강하 던 교양국어의 담당 교수였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하와이’란 제목의 수 필을 교내 학보사에 투고했어요. 저는 당 해본 적 없는데 전라도 출신 선배들이 서 울에 올라와 가난 때문에 차별당한 이야기 를 쓴 글이었어요. 꽤 길었는데 학보에 실 렸더라고요. 그것을 보고 황순원 선생님이 잘 썼다며 칭찬해주셨습니다. 얘기를 들어 보니 황 선생님도 동경 유학 시절 비슷한 차별을 당한 적이 있으셨더군요.”

황순원은 학생 노경식을 볼 때마다 “너 수 필 잘 쓰더라”며 글쓰기를 부추겼다. 결국 또 한 번 파란의 주인공이 됐다.

 

 

 “우리 학교에는 그때 교내 문학상 제도가 있었어요. 미술, 음악, 시, 소설, 그림…. 1등이 되면 등록금이 면제였습니다. 황순 원 선생님 역시 제가 글을 문학상에 내보기 를 계속 권하셨습니다. 저는 그냥 희곡이 나 한번 써볼까 해서 써냈습니다. 근데 그 게 또 1등이 된 겁니다. 희곡을 쓴 건 그때 가 처음이었습니다.”

상을 주는 교수들의 입장이 사실 난감했 다. 이전 수상자였던 무역학과 학생이 장 학금만 받고 글쓰기를 멈춘 것이다. 경제 학과인 노경식 또한 장학금을 받고 글을 쓰 지 않으면 주나 마나 한 상황이 되니 심사 위원 교수끼리 회의를 열었다.

“희곡 심사위원이었던 김진수 선생 옆에 있던 황순원 선생님이 ‘왜? 경제학과야? 노경식?’ 하더니 ‘어, 노경식이 내가 알아. 내가 보증할게’라고 해서 제가 된 겁니다.”

결국 노경식은 빚을 톡톡히 갚은 거다. 대 학 시절 희곡으로 장학금을 타는 바람에 지 금까지도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는 극작가 로 사니 말이다.

“<달집> 초연 때 모셨는데 작품이 마음에 드셨나봐요. 내 손을 꼭 잡고 ‘애썼다. 잘 썼다’ 그러시면서 ‘희곡이 소설보다 좋은 거 같아. 관객을 놓고 박수도 받고 야, 희곡 좋은 거 같다’ 나한테 그런 말씀도 하시더라고. 뭘 잘해드린 적도 없는데 참 예뻐해주셨어요. 황순원 선생님이 결혼식 주례도 서주시고 말입니다. 선생님이 서주신 제자가 많이 없을 겁니다.”

 

 

<반민특위> 현역 작가로서 저력을 과시하다

인터뷰 차 만났던 9월 대학로의 한 카페. 그 어느 때보다 한결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지난여름 제2회 늘푸른 연극제를 통해 무대에 올린 연극 <반민특위>가 관객의 뜨거운 호응과 평단의 찬사 속에 막을 내린 것. 공연이 끝나고 원로 연극인들과 함께 기분 좋은 온천 여행을 다녀왔다고 덧붙였다.  늘푸른 연극제에서 노경식 작가가 선택한 <반민특위>는 신의 한수였다. 그와 함께 연극제에 초청된 배우 오현경, 이호재, 연출가 김도훈은 대표작을 내걸고 공연했다. 노경식 작가 또한 대표작인 <달집>을 공연할 것이라 대부분 사람들은 예상했다.

“<반민특위>는 2005년에 극단 미학에서 초연했던 작품입니다. 기대만큼 결과가 좋지않았어요. 그런대로 성과가 나면 모르겠는데 미치지 못하니 작가는 한 번 더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잖아요. <반민특위>도 마침 생각하고 있었는데 늘푸른 연극제에 선정됐습니다. 나를 선정한 거니까 내가 맘대로 작품을 고를 수 있다기에 <반민특위>를 선택했습니다. 좀 오래전에 써서 개작을 많이 했어요. 이번에는 만족합니다.”

그의 대표작 <달집>을 기다린 관객에게는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노경식 작가는 현역 작가로서 과감한 도전에 박수받기를 택했다. 원로 연극인으로서 지금껏 살아온 노고에 대한 격려 대신 말이다.

“만족이야. 기분 좋습니다. 이번 연출을 맡은 김성노씨한테 고맙다는 소리를 몇 차례 했어요.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반민특위>는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반민특위)를 제헌국회에 설치했으나 1949년 친일 경찰의 ‘6·6습격사건’을 기점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준 정치극이다.

 

 

여전히 잘 팔리는 극작가

“나는 잘 팔려, 고민 안 해(웃음).”

연극 <반민특위>가 끝나기가 무섭게 노경식 작가는 신작을 내놓았다. 이미 세상에 내놓은 것, 꼭 쓰겠다고 작정한 것 두 가지 작품이 있다. 여전히 잘 팔린다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재밌다. 우선 세상에 내놓은 작품은 <봄꿈>이라는 제목의 4·19혁명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4·19혁명에 관한 작품이 없어요. 왜 없는 줄 알아요? 4·19혁명이 나고 5·16 군사정변이 났잖아. 그 이야기에 손댔다가 시끄럽고 어쩌고… 몸을 사리는 거지 작가들이. 내가 4·19세대거든. 나라도 본격적으로 4·19 얘기를 써야 되겠다. 내가 겪은 이야기니까. 그래서 마침내 성공을 했어요.”

4·19혁명과 관련해 작가로서의 사명감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는 노경식 작가. 몇달을 걸려서 자료를 찾고 화보집을 보면서 작품을 썼다.

“내가 아는 얘기, 겪었던 일이에요. 그리고 4·19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민초의 이야기죠. 구두닦이, 우리 학생, 대학생, 초등학생들도 나왔어요. ‘총 쏘지 마세요’라면서요. 양아치들, 매춘부까지 다 나왔던 민초들이 이뤄낸 역사입니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매춘부라며 깜짝 놀랄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작가의 고향 남원과 관련한 토속적인 얘기를 쓰고 싶단다.

“사실 봄꽃이 아니었으면 먼저 쓰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자꾸 뒤로 밀리고 있어요. 늘 생각은 있어요. 우리 집안의 얘기도 관계가 있고요. ‘밤으로의 긴 여로’ 같은 것을 쓰고 싶은데 어찌 될지.”

 

 

 

프리한 80? 행복한 극작가!

노경식 작가와 얘기하는 동안 머리에 맴도는 의문 한 가지가 있었다. 지금까지 만나온 극작가는 대부분 연출과 겸업을 하고 자신만의 극단을 거느리고 있다.

“나는 한 번도 극단에 들어가본 적이 없어요. 단원이 돼본 적도 없고. 그냥 늘 자유롭게 조직에 구애받지 않고 연극을 했어요.”

듣고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노경식 작가가 극작가로 데뷔한 1965년도에는 출판사 편집장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드라마센터 동기들이 연극판으로 몸을 옮겼을 때 노경식 작가는 매일 출근을 해야 했다. 대신 누구든 노경식 작가가 쓴 대본을 넘겨주면 공연을 하겠노라고 했다.

“국립극단에서도 내 작품을 하겠다고 하니까 극단에 소속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내 극단을 가져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다들 잘해주고 공연 잘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도 못 느꼈다. 무엇보다 스스로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작가들은 연출 해석이 잘못되면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에요. 혹시라도 연습실에 가면 앉았다가 ‘술이나 한잔하자!’ 그러면 땡이고. 술 마시다가 살짝 얘기하면 되지. 화내고 그럴 필요 전혀 없어요. 한 사람 머리보다 두 사람이 낫지 않겠어?“

연출자도 작가도 창조자이고 작품을 좋게 만들 뜻으로 만났으니 서로의 신뢰가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대학로 만빵 모임 좌장 납십니다!

경계 없이 만나고 사귄 덕에 주위에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러다 만든 모임이 바로 만빵 모임이다. 노작가가 좌장(?)으로 있는 만빵 모임은 2년째 대학로 바닥을 주름 잡는 원로 연극인 모임으로 자리 잡았다.

“두 주에 한 번씩. 매주 목요일 오후 5시. 1만원씩 가지고 빈대떡 주점에서 모이다가 ‘만빵 모임’이 된 거예요. 혼자 부담하려면 너무 크니까. 여유 있는 친구들이 가끔 다 내기도 하고 나오면 받고 안 나오면 안 받고 그래요. 우리도 한번 모여보자 해서 만나는데 만빵 모임의 존재를 아는 후배들이 빈대떡 주점에 돈을 맡기고 갈 때도 있더라고요. 만나서 한잔하고 그러면 좋잖아.”

 

원래는 70세 이상만 모이다가 가끔 후배들도 종종 참여하고 있다. 만나서 막걸리는 기본. 웃고 떠들고 과거를 추억하다 요즘 젊은이들의 연극에 대한 걱정도 한다.

“평가라기보다 우리 연극이 좀 시류를 따른다고 해야 하나, 영합한다고 해야 하나. 가볍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좀 묵직하고 그런 작품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적어도 만빵 늙은이들은 그렇게 생각해(웃음).”

사실 이런 말을 하고 싶어도 이제 젊은 후배들을 만날 기회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정말 특별한 인연이라 꼭 좀 와주십사 연락하는 사람이 있으면 연극을 보러 가는 정도다. 아무렴 어떤가! 그래도 늘 행복한 웃음을 잃지 않는 노경식 작가는 어딜 가나 인기가 높다. 지금 이 시간 해피 바이러스 내뿜으며 젊음의 거리를 거닐고 있을 노경식 작가에게 인터뷰 중 약속했던 한마디를 남기고자 한다.

“고향에 관한 연극 꼭 쓰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사진 박규민 parkkyum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