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 가득했던 텅 빈 그곳,

남한강가의 옛 절터를 찾다

 

 

9월은 하늘이 청명하고 해가 길어서 '폐사지(廢寺址) 가기 좋은 달'이라고

나름 그럴듯한 논리로 지인들을 부추겨 원주 인근의 폐사지로 향했다.

폐사지 기행은 늦가을이 좋다며 봄부터 미뤘지만 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부러 인내심을 바닥내며 길을 재촉했다.

감은사지, 미륵대원지 등등 제법 여러 곳의 폐사지를 보았지만,

남한 강변의 폐사지를 보지 못했으니 폐사지를 안 본 것이나 다름없다는 궤변으로 일행을 독려했다.

 

20여 년 전, 경주 감은사 터에 갔다가 노을이 지고 저녁 어스름이 내리도록 나는 탑을 보고 있었다.

밤이 되고 사위가 어둠에 묻힌 뒤에도 나는 한동안 감은사지를 떠나지 못했다.

식구들은 탑을 실컷 봤으면 됐지 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느냐며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내 가족들도 그렇지만 누군가는 아무것도 없는 폐사지에 무엇 때문에 가느냐고 의아해한다.

감은사지에서의 감동을 간직한 채, 나는 폐사지로 향한다.

텅 비었지만 쓸쓸함이 가득한 공간, 기나긴 역사가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그곳이 나를 부르기 때문이다.

 

유홍준 선생에 따르면 "문화재청과 불교문화재연구소가 2011년부터 3년간 전국의 폐사지를 조사한 결과

무려 5393곳의 절터를 확인했다"고 한다.

2011년 8월 문화관광부에 등록된 전통사찰의 숫자가 938곳임을 감안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불국토를 꿈꿨던 선조들은 자신들의 바람을 담아 한 곳 또 한 곳 절집을 세웠을 것이다.

불교가 백성들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남한강 폐사지 하면 흔히들, 법천사지(法天寺址), 거돈사지(居頓寺址), 흥법사지(興法寺址)를 꼽는다.

세 곳 모두 남한강과 그 지류인 섬강 가에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빼어난 석조물이 남아 있으며 신라 하대에 세워져 조선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발굴이 진행 중인 법천사지가 편한 느낌을 준다(좌), 법천사지 당간지주(우)

 

 

남한강의 폐사지, 법천사지

 

첫 번째 행선지는 법천사지다.

폐사지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사진을 보며 감탄했던 지광국사탑비(국보 59호)와

고궁박물관 뜰에서 수려함을 뽐내던 지광국사현묘탑(국보 101호)의 고향이기에 그곳이 궁금했다.

당간지주에서 조금 걸어 도착한 법천사지는 규모면에서 압도적이었다.

아직도 발굴이 진행 중이라 정갈함은 덜했지만 곳곳에 남아 있는 고목들과 모아놓은 석조물들이 오히려 정겨움을 더했다.

절터 조금 위쪽 소나무 숲 아래 자리한 지광국사탑비는 과연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검은색 몸돌과 거북 모양의 귀두, 왕관 같은 이수가 마치 한 몸인 듯 조화로웠고

몸돌 옆면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용은 곧 하늘로 오를 것처럼 생생하고 힘찼다.

거북의 등에는 임금 왕(王)자가 새겨져 있는데, 왕 자가 새겨진 예는 이 비가 유일하다.

지광국사탑비와 현묘탑, 자체의 조형성뿐 아니라 거기에 새겨진 조각들은 고려시대 귀족 문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청자의 비색과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격조 높은 무늬돌, 나전 불경함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아름다움이 그저 우연이 아니었음을 느끼게 했다.

 

 

 

   
▲지광국사탑비 몸돌, 옆면의 용틀임이 생생하다(좌), 발굴된 석조물들(우)

 

 

 

거돈사

 

법천사를 떠나 거돈사로 향했다. 석축 사이로 난 계단을 오르니

눈앞에 삼층석탑(보물 750호)이 보이고 그 너머로 절터가 드넓게 펼쳐진다.

거돈사의 금당 자리는 주춧돌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그곳이 20칸이나 되는 대법당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삼층석탑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언덕배기에 원공국사승묘탑(보물 190호)이 있던 자리가 나온다.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 마당에 가 있고 그곳엔 조잡하게 만들어진 복제품이 서 있다.

 

이곳의 탁 트인 전망이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여기서 왼쪽을 바라보면 고려의 대표적인 유학자로서 해동공자(海東孔子)라 불린 최충(崔冲)이

비문을 쓴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78호)가 있다.

귀두의 머리가 날개달린 거북 같아 정겹다.

거돈사의 빈 터를 구석구석 걸어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잘 정비된 거돈사지는 오히려 적막하고 쓸쓸했다.

폐사지 여행에 일가견이 있는 이지누 선생은 거돈사의 노을이 아름답다고 말했지만,

그 시간까지 기다릴 수 없는 여행객의 마음은 아쉽기만 하다. 

 

      
▲거돈사지 삼층탑(좌), 거돈사지 전경(중), 원공국사 승묘탑비(우)

 

청룡사지

 

법천사지와 거돈사지가 있는 부론면(富論面)을 뒤로하고 충주의 청룡사지(靑龍寺址)로 갔다.

청룡사지에는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었던 보각국사의 탑(국보 197호)과 보각국사탑비(보물 658호), 사자석등(보물 656)이 있다.

남아 있는 석조물들이 죄다 국보와 보물이다.

국보로 지정된 보각국사탑은 조선시대의 부도탑(승탑)이 대부분 종 모양인 데 반해

고려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은 8각원당형이다. 청룡사지 유물들은 입구에서 산길을 따라 걸으면 나타나지만

절터는 저 멀리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는 곳이 있어 저곳이겠거니 짐작만 할 뿐이다. 

 

   
▲청룡사 가는 길(좌), 왼쪽부터 청룡사지 보각국사 탑비, 보각국사탑, 사자석등(우)

 

흥법사

 

마지막 행선지 흥법사로 가기 전,

나는 손곡(蓀谷) 이달(李達, 1539년(중종 34)~ 1612년(광해군 4)의 시비를 찾아갔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준 목적지는 저수지 입구, 시비도 그 무엇도 발견할 수 없었다.

원래 손곡초등학교 정문 앞에 있다는 정보에 따라 이미 폐교가 된 학교를 샅샅이 뒤졌지만 시비를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주소대로 차를 달려 저수지 근방을 찾아보았지만 시비를 찾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을 이달의 시를 읽는 것으로 달랬다.

이달은 허균과 허난설헌의 스승으로 유명한 조선시대의 문인이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쓸 때 서자였던 이달을 모델로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가 살았던 곳의 지명이 손곡리로 불릴 만큼 한 시대를 풍미한 시인이었다.

일상의 많은 정보를 인터넷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헛걸음치는 일이 없도록 좀 더 정확하게 정보를 제공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폐교된 손곡초등학교, 커다란 나무가 학교의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부론면을 떠나, 섬강에 이르면 멀지 않은 곳에 흥법사지가 있다.

현재 발굴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절터 대부분이 마을과 농경지가 되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흥법사지에는 흥법사지 삼층석탑(보물 제464호)과 진공대사탑비의 귀부와 이수(보물 463호)가 남아 있다.

진공대사는 고려 태조의 왕사로 진공대사가 죽자 태조 왕건이 비문을 썼다고 전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조각전시장에는 傳 흥법사 염거화상탑(국보 104호)과 진공대사탑 및 부석관(보물 365호)이 있다.

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많은 유물들이 그렇듯이 이 유물들 또한 일제강점기 때 제자리를 떠났다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고향을 떠난 유물들은 말이 없지만 언젠가 제자리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해거름에 바라보는 흥법사지는 애틋한 무언가가 있었다.

위풍당당하던 본래의 모습을 잃은 것도 모자라 그 땅마저 간직하지 못하고

쪼그라든 채 마을 한쪽에 섬처럼 외롭게 남아 있는 모습에 왠지 처연한 느낌이 들었다. 

 

   
▲진공대사탑비의 귀두와 이수(좌), 해질녘의 흥법사지와 삼층탑(우)

 

초가을의 폐사지는 청명한 하늘 덕분인지 고즈넉한 느낌이다.

넓은 공간에 덩그러니 남은 석조물들을 보자니 무상(無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는 만큼 보인다 했던가, 별다른 준비 없이 떠난 폐사지에서 나는 순간순간 막막했다.

텅 빈 공간과 마음을 채우려면 더 많이 공부를 했어야 했을까? 하지만 그 또한 내 욕심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