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1세대 행위예술가 이건용
인체 소통 담은 '신체드로잉'부터
그리면서 지우는 '달팽이 걸음' 등
반세기만에 국내외 미술계서 주목
행위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표현
미술관이 '퍼포먼스' 구매하기도
앞에서 그리면 될 것을 굳이 화면 뒤에서 팔을 내뻗어 선을 그었다. 화면에 등을 댄 채 팔을 뒤로 뻗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화면을 옆으로 두고 팔이 닿는 데까지 그리고 몸을 반대로 돌려 똑같이 반복했더니 생각지도 못한 하트(♡)가 완성됐다. 팔을 부목에 묶거나 혹은 캔버스를 바닥에 눕힌 채 양다리 사이로 선을 긋기도 했다.
1세대 개념미술가이자 행위예술가로 1970년대를 풍미한 원로 화가 이건용(80)의 1976년 작 ‘신체드로잉(Body Scape)’의 제작 방법들이다. ‘전위예술가’ 혹은 ‘아방가르드’라 불린 그가 앞서가기는 앞서간 모양이다. 45년 전만 해도 ‘알아주는 사람 없던’ 이건용의 작업이 최근 국내외 미술계에서 재조명받고 있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로 그를 주목하면서 재발굴의 계기가 됐다. 2018년 세계 굴지의 화랑인 페이스갤러리가 베이징 지점에서 이건용 개인전을 개최한 것은 촉매제가 됐다.
칠십 평생 팔리지 않았고 팔렸더라도 제값을 받지 못하던 그의 작품을 구하지 못해 경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2017~2018년 초만 해도 1000만 원 정도에 낙찰되던 작품이 최근 경매에서는 2억 원 가까운 가격에 팔리는 중이다. 다음 달 23일 공식 개막하는 베니스비엔날레 기간에 ‘팔라초 카보토’에서는 신작으로 개인전이 열리고, 미국 구겐하임미술관 등지에서 ‘한국의 아방가르드’로 순회전도 예정돼 있다. 시대가 늦게 알아본 작가 이건용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작업실에서 만났다.
소년 같은 화사한 표정의 노화가가 문을 열어준 작업실 초입에는 오래된 인물화 하나가 걸려 있었다. “대학 다닐 때, 1969년에 그린 인물화예요. 내가 사람도, 꽃도, 풍경도 잘 그렸다우. 좀 남다른 게 있었다면 궁금한 게 너무 많았어. 꼭 알고 싶었고. 그 바람에 아버지 방에 빼곡했던 책들을 좀 일찍, 많이 읽었지.”
황해도 사리원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산달(産月)이 다가온 간호사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38선을 넘어 외가인 서울로 왔다. 홍릉 쪽에 살면서 청량리로 가 전차를 타고 광화문에서 내려 정동고개 넘어 배재중학교를 다녔다. 오래 걸으며 많은 생각을 하던 그 시절이 미술가의 태동기다.
“아침 6시에 집을 나서서 남대문으로 갔어요. 길가에 이젤을 세워놓고 풍경을 그렸죠. 학교 사생대회가 있을 때면 꼭 궁으로 가 ‘그려봐라’ 하던 시절인데, ‘내가 늘 다니는 길이나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을 자연스럽게 그려야지’라는 게 내 생각이었어요.”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고 홍익대 입학 실기시험에서는 석고상 뒤통수 쪽으로 하나 남은 자리에 앉아 그렸지만 용케 합격했다. 실력이 좋았다. 앵포르멜(Informel·비정형의 추상미술)과 추상실험이 한창이던 때였는데 아버지의 책방에서 읽은 노자와 장자, 비트겐슈타인 등의 현대철학서가 풍부한 이론적 바탕을 만들어줬다. 김환기·이마동·박서보 등 은사들에게 곧잘 칭찬을 들었다.
고등학교 때 이미 수채화로 국전(國展)에 입선했으니 “사실적으로 그리는 그림…못 그려서 안 그리는 게 아니다”라는 말은 사실이다.
“우리는 뭔가를 묘사하고 대상을 표현하는 기술에 완전히 몰두돼 오히려 가장 기본적이며 확실하게 일어나는 일에는 무관심한 게 아닐까요. 미술도 회화라는 장르에 묻혀버린 나머지 그것 자체의 확실한 모습을 오히려 모르게 됐어요. 미술이 갖는 매체의 특성, 행위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지각해 관계 맺기를 해야 하는거죠.”
절실한 고민이 20대의 그를 장악했다. 또 정처 없이 걷던 1969년의 어느 여름, 뚝섬 근처를 지나다 고속도로 공사 때문에 뽑혀난 버드나무 한 그루를 봤다. 뿌리를 드러낸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사방 뿌리가 150㎝ 정도로 뻗었고 높이는 250㎝쯤 되는 나무를 차에 실어 부모님댁 앞마당에 끌어다 놓았다. 이 나무는 197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미술협회전에서 ‘신체항’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일어섰다.
“당시 한국 사람들은 인생과 예술을 얘기할 때 꼭 자연을 언급했습니다.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표현처럼요. 우리 사유의 최고 가치는 자연과 연결돼 있기에 나는 예술이 아닌 자연 그 자체를 가져다 놓고자 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사유와 관념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신체의 몸으로, 물질 그 자체로 이뤄져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이 ‘신체항’은 이후 1973년 파리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제8회 파리국제비엔날레에서도 파란을 일으켰고 지금은 대구미술관 소장품이 됐다.
기행(奇行)으로 보이는 이건용 작업의 속내는 ‘자연스러움’ 혹은 행위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다. 목메도록 꾸역꾸역 건빵을 먹는 ‘건빵 먹기’ 작업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음식을 손으로 집어 입에 넣는 일을 끊임없이 해왔지만 그게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행위로 전개되는지는 잊고 산다”면서 “행위의 논리를 확실히 제시하고 그것을 극대화해 보여줌으로써 일상적인 행위를 각성시켜주는 요소가 있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대표작 ‘신체드로잉’의 경우 움직임에 제약을 둔다는 점을 군부독재의 시대적 억압과 연결 지어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시대적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전적으로 매달린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작가는 “한계와 구속을 뒀다기보다는 우리 신체의 구조가 가장 자연스럽게 반응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을 만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 신체가 가진 딱 그만큼의 붓질입니다. 내 팔 길이만큼, 내 키만큼, 내 다리 길이만큼…내 신체가 가진 그대로를 평면에 그린 것이거든요. 키가 작든 크든, 남자든 여자든, 장애가 있건 없건, 늙은이든 어린이든 내 예술은 그 방법만 알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팔이 짧으면 짧은 대로, 손이 떨리면 떨리는 대로 자신만의 표현을 할 수 있지요.”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니, 화상(畵商)은 못마땅해 할 표현이지만 실상 이게 이건용의 작품이 국경을 넘고 언어를 초월해 사랑받는 이유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작가의 개념과 행위요, 그림은 그 결과물인 것이다. 최근에는 그림뿐 아니라 그의 행위예술(퍼포먼스) 그 자체를 구입하는 미술관도 생겨났다. 국내에서는 경기도미술관이 첫 주자다. 이건용은 “경기도미술관이 내 첫 퍼포먼스인 ‘동일면적(1975년)’을 구입했다”면서 “어떻게 실현하는지, 어떤 의미인지, 작가가 이 세상에 없을 때 다른 사람이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기록해뒀고 그 개념을 사간 것”이라고 밝혔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가장 인기 있는 그의 퍼포먼스는 ‘달팽이걸음’이다. 1979년 제15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서 첫선을 보였다. 분필을 쥐고 쭈그려 앉아 팔이 움직이는 만큼 좌우로 선을 긋는데,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갈수록 이미 그린 분필 자국이 자신의 발에 밟혀 지워지는 역설적 작업이다.
“발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여 조금씩 걸어가면 내 팔의 길이만큼 선이 그려지고 나의 속도만큼 지워집니다. 그리는 일과 지우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데 사실 회화의 가장 기본이 그리는 것과 지우는 것이거든요. 브라질·일본·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재연했는데 관심 없던 사람들도 뒤돌아 다시 다가와 바라보고 좋아하더군요. 어떤 이는 ‘내 인생을 보는 것 같다’면서 제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 적도 있습니다.”
어쩌면 ‘달팽이걸음’은 이건용 자신의 인생일지 모른다. 묵묵히 자신의 속도로 반세기를 달려온 그를 향해 세계가 박수갈채를 보내는 중이다.
He is… △1942년 황해도 사리원 △홍익대 서양학과 △1969년 ST(Space and Time)조형미술회 조직 △1971년 제8회 한국미술협회전 ‘신체항’ 발표 △1973년 제8회 파리비엔날레 참가 △1975년 ‘동일면적’ 등 퍼포먼스 초연 △1976년 ‘신체드로잉’ 처음 공개 △1979년 ‘달팽이걸음’ 초연 △1981년 군산대 교수 △1999년 문예진흥원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 개인전 △2007년 이인성미술상 수상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개인전 △2016년 갤러리현대 개인전 △2019년 부산시립미술관 개인전 △2021년 갤러리현대 개인전 △2022년 페이스갤러리 홍콩 개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