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과 의사에서 미술사학자로,
이성낙 박사가 보여주는 오래된 미래
마산 피난 시절, “둘째는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부모님의 대화를 잠결에 들었던 이성낙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는 고등학교를 졸업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나 30대 후반에 연세대 의대 피부과 주임교수가 되어 귀국한다.
그 후 그는 대통령들의 피부과 주치의, 아주대 의대 초대학장, 가천대학 총장 등 행정가로서도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의 행보가 여기까지였으면 나는 그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인터뷰 중인 이성낙 박사. (출처: 아주대학교 공식블로그)
피부과 의사의 새로운 도전
하지만 그는 일흔이 넘어 대학원에 들어가 2014년 일흔일곱의 나이에
자신의 전공이었던 의학과는 무관한 미술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피부과 의사 출신이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변’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소식이 신문의 문화면에 실렸다.
누가 봐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온 그가 나이 들어 또 다른 도전을 하고
이런 성과를 이루어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생각하니 문득, 그의 삶이 궁금했다.
그래서 팔순이 넘은 지금도 주말이면 산에 오르고 수시로 미술관과 음악회를 찾고
사람들을 만나고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하루하루를 활기차게 살아가는 이성낙 박사를 만나 보았다.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살아갈 미래에 관한 조그만 힌트라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대관령 트레킹.
▲ 제자들과 함께한 미술관 탐방.
Q. 칠순이 넘어 뒤늦게 미술사학을 전공해 대학원에 진학하시게 된 계기와
공부하실 때 어려웠던 점과 즐거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A. 제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알프레드 마르키오니니라는 교수가
‘미술품에 나타난 피부질환’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를 들은 후 제게는 그림을 볼 때면 얼굴에서 피부병변을 찾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귀국한 뒤 조선 초상화에 그려진 수많은 피부병변을 발견하고 자료를 모았지요.
현업에서 은퇴를 하고 그 자료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유홍준 교수가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기에 결자해지하자는 심정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독일 교수자격이 있어 석사과정은 면제된다는 말을 듣고 대학원엘 갔는데,
대학원 첫 2년 동안은 모든 과목을 다 들어야 해서 육체적으로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지식이 풍부한 교수들에게서, 젊은 동료들과 현장답사를 다니며 배우는 즐거움과 희열은 말할 나위 없이 컸습니다.
Q. 2018년 3월에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 이라는 책을 내시고
그 책이 2018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출품되었습니다. 감회가 남다르실 텐데요?
A.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은 미술사 박사논문과 그동안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박사학위 논문은 독자들이 편하게 읽도록 쉽게 풀어쓰는 작업을 했지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는 120여 나라에서 7,300개 부스를 운영했고 적지 않은 참가비에도 126,000명이 참관했습니다.
그처럼 역사가 깊고 으뜸인 도서전에 제 책이 출품되어 무척 영광스럽고 벅찬 감정을 느꼈습니다.
일각에서는 종이문화의 쇠퇴를 이야기하지만 현장에서 보니 ‘여전히 종이문화가 살아 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Q. 저술하신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과 여러 매체에서 조선의 선비정신을 강조하셨습니다.
초상화와 선비정신에 대해 한 말씀하신다면?
A. 우리 조상들은 얼굴 모습 그대로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이처럼 ‘있는 그대로’ 그리는 전통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그릴 때
이마에 작은 혹을 그려 넣은 데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500년 넘게 이어졌지요.
초상화가 갖는 과시성에도 불구하고 초상화를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은 조선 선비들의 정직함, 올곧음을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초상화가 피부과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초상화를 있는 그대로 그렸기 때문에
초상화를 보면 어떤 병을 앓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서양의 초상화 몇 점을 제외하고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조선 선비들이 조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남기려는 ‘효의 사상’이 있었기에 이런 전통이 이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Q. 앞으로 계획을 말씀해주신다면?
A. 제 삶의 목표는 ‘주책 떨지 말고 살자’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제 말의 무게를 실감합니다.
얼마 전, 제가 관여하는 위원회에서 무언가를 지적했더니 관계자가 무척 미안해하더군요.
그런데 40~50대 젊은 사람이 문제를 제기하니까 이러쿵저러쿵 이유를 설명하는 거예요.
그걸 보며 ‘나는 가볍게 말하지만 상대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싶어 앞으로는 말을 아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제가 주책을 떨면 귀띔을 해달라고 부탁해놓았습니다.
Q. 평생을 음악과 미술품 같은 예술을 즐기고 간송미술문화재단의 이사를 맡을 만큼 대단한 식견을 가지셨는데,
예술을 즐기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A. 언제,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술을 즐기게 된 건 평생을 두고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술을 할 만한 타고난 재능은 없지만 피난지 부산에서 미술시간에
화집으로 그림을 보여준 이마동 미술선생님, 고등학교 때 축음기를 가져다 음악을 들려준 박성환 음악선생님,
그분들 덕분에 서양음악과 서양미술을 알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가 베토벤을 알았던 덕분에 유학 시절, 독일 친구들의 인종차별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술은 제 삶을 늘 풍요롭게 했고 행복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자주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음악회엘 갑니다.
▲ 독일 유학시절 북유럽 배낭여행, 함마페스트 가는 길
▲ 2018년 9월 유럽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들.
Q. 오랜 세월 의사로, 교수로, 총장으로 후학을 양성하셨습니다.
그 호칭들 가운데 어떤 호칭으로 불리고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A. 저는 스승으로 불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제자가 많은 것이 저의 자랑이자 자부심이지요.
저는 제자들이 제 ‘거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폐가 되지 않는 부끄럽지 않은 스승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얼마 전 아주대 의대 개교 30주년 행사에 참석했는데 저를 아주대 의대의 기틀을 만들고 문화를 알게 해준 스승으로 기억해주어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 아주대학교 의대 개교 30주년 공로패.
평생 현역으로 사는 법, 늘 현재를 사는 것
이성낙 박사를 만나기 전에는 그에게서 우리의 미래에 대한 뭔가 확실한 팁을 기대했다.
그런데 그를 만나고 난 뒤 떠오른 것은 말콤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에서 말한 ‘일만 시간의 법칙’과
그의 어머니께서 하셨다는 “인연을 소중하게 가꾸라”는 말씀이었다.
어떤 일에든 일만 시간을 투여할 수 있는 끈기와 성실함이 있고
내게 다가온 인연을 마음을 다해 대하고 귀하게 여긴다면 우리의 미래도 지는 노을처럼 찬란하게 빛나지 않겠는가?
인생에 지름길은 없다는 말을 새삼 깨닫는다.
늘 배우는 자세로 한 걸음 한 걸음,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