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교정에서 전교생을 모아 놓고 조회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전교생 앞에서 글짓기로 상을 탔다. 그 후 내 인생에서 글쓰기는 아득한 추억이 되었다.
그러던 내가 다시 글을 쓰게 된 곳은 유명 종합병원 <고객의 소리> 코너였다. 나의 엄마가 젊은 시절부터 다녔던 종합병원이다.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어 혼자의 힘으로 걸을 수 없게 된 지금, 병원 곳곳에 불합리한 시스템과 불편함을 마주하게 되었다. 수많은 환자들이 넘쳐나는 종합병원에는 사회에서 약자라고 불리 우는 처지가 된 환자들에겐 불편한 점들이 무척 많았다. 가령 소변검사를 할 때 소변 줄을 꼽고 있는 환자들이 채취실과 담당과 간호사들 사이를 오고 가야 했으며, 불필요한 검사임에도 병원 시스템 상 받아야 하는 검사도 무수히 많았다. 입·퇴원 시에 병원비 할인에 따른 다양한 혜택 또한 원무과장의 재량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정신도 잃고, 거동도 못하는 사회적 약자의 인권에 대한 그들의 "성의없는 태도" 였다. 다음 환자를 위해 빨리 진행되어야 하는 과정에서 바지춤도 제대로 올리지 못한 채로 검사실을 나와야 했다. 나는 그 병원에 대해서 공부했다. 병원 설립 재단과 실제 운영진들이 어떻게 병원을 운영하는지에 대해서 자료를 수집하고 살펴보았다. 그리고 건강할 때 다니던 병원에서 느낄 수 없었던 불편함에 대해서 정리했다.
그렇게 30여년 만에 다시 글을 쓰게 되었다. 그런데 <고객의 소리> 코너에 쓴 나의 글이 다음날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지워져 있었다. 다시 올리니, 또 지워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칭찬의 소리에 글을 올렸다. 그러자 메일로 "이곳에 올리면 안 된다." 라고 회신이 왔다. 나는 병원이 정당한 진료를 하고 있는지, 그에 따른 정당한 진료비가 청구되는지, 감시할 수 있는 민간단체설립을 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이사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는 글을 다시 썼다. 그러자, 관계자들이 만남을 요청했고, 콧대 높던 담당교수와 관련자들이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이 후 병원 홈페이지에는 개선된 사항을 공지하는 글이 업로드 되었고, 병원에서 나와 어머니는 모두가 아는 유명인이 되었다. 나의 글은 어머니 뿐만이 아니라 모든 정신을 놓고, 거동이 불편한 병원 환자들에게 인격적인 대우를 요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나의 글쓰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그 즈음에, 50+시민기자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되었고, 2차 면접을 통해 기자가 되었다. 시민기자단은 한 달에 두 편의 기사를 쓴다. 하나는 ‘자유주제’이고, 하나는 재단에서 주어지는 ‘취재 또는 인터뷰기사’이다. 인터뷰나 취재 기사를 할 때에는 사전에 관련된 장소나 기관에 대해 자료수집과 관련내용에 대해서 공부를 했다. 많은 준비를 했는데 인터뷰 장소와 시간의 소통이 잘못되어 허탕 치는 일도 있었다. 기사가 포털에 올라가고 취재했던 곳에서 기사를 잘 봤고 내용이 충실하게 잘 담겨져 있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기도 했다.
자유주제의 기사는 주로 여행에 관련된 기사를 썼다. 기사를 쓰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발걸음을 움직였던 시간들이었다. 글을 쓰며, 달라진 점은 많은 책을 읽고, 머릿속에 담겨진 내용을 정리하게 된 점이다.
나는 한평생 바쁘게 살았다. 몸은 쉬지 않고 움직였지만 생각은 자라지도 않고, 느끼지도 않고 살아온 날들이었다. 50+기자의 경험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나의 생각은 지금도 자라고 변하고 꿈틀거린다. 병원에 글을 올리는 과정을 지켜보며 지인들은 바쁜데 왜 시간 낭비 하냐고 했다. 그때 유일하게 남편이 잘하는 일이라고 응원을 해주었다. 지금도 내가 쓴 글이 포털에 올라오면 해외 출장 중에도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딸은 마지막 기사점검을 해주었다. 기사를 다 읽고, “음~무슨 말이야?” 하고 되물을 땐 처음부터 다시 쓰기도 했다. 가족과 함께한 50+기자생활이었다.
내가 어느 곳에 정체되어 있으면, 글은 나오지 않는다. 어디론가 흐르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새로운 나를 발견할 때 글을 쓸 수 있었다. 나는 오늘도 취재수첩을 가방을 넣고, 집에서 한걸음 나선다. 나에게 50+시민기자의 경험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값진 경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