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표 한 장 들고 찾아 나선 곳은 동대문이다. 며칠 온화했던 기온이 제법 사나웠다. 겨울 맞을 준비를 알리는 것이리라. 그러나 동대문역 출구 앞에서의 찬바람에도 낙산 성곽길을 오르며, 호흡으로 데워진 공기로 마스크 안은 온실이다. 여행길 날씨로는 최상급이다. 덩달아 마음도 가볍다.
동대문은 축조 당시 지대가 낮아 땅을 돋운 후 건설했다. 그래서 다른 성문보다 건립이 늦다. 문의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다. 흥인(興仁)이란 어진 마음을 북돋운다는 뜻으로 유교 사상의 인(仁)을 뜻한다. 1868년(고종 5년) 흥인문이 크게 손상되어 정비 시 풍수지리상 한양의 동쪽이 비어있다고 하여 지(之)자를 넣어 무게감을 주었다. 동대문을 열고 나와 이 길을 통해서 수유리, 누원, 축석령, 김화, 금성, 철령, 함흥, 북청, 회령, 경흥까지를 경흥대로라 한다. 함흥차사도 보부상도 이 길을 달렸겠다.
▲ 동대문은 도심의 현대 고층 빌딩에도 졸지 않고 여전히 늠름하다. 대문 안으로 사람이 드나들지는 않지만, 단단히 제 몫을 챙기는 모습으로 만남이 반갑고 고맙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50여 년 전 태릉에 소풍을 마치고 오는 길, 남대문인 줄 알고 그만 버스에서 내렸다. 3원밖에 남지 않은 차비로 집에 가려 하니, 어쩌지 못하고 남대문까지는 걸어야만 했던 쓸쓸한 기억도 함께 묻어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삶의 큰 문으로서 흥인지문 곁을 드나들고 있다. 생애 처음 맹장염으로 수술했던 이대부속병원은 헐리고, 그 자리에 대관령 목장이라도 데리고 온 듯한 예쁜 풍경을 만들어 준, 성벽 밖 동인교회의 첨탑이 정겹다. 이 가을에 두 발 풍덩 빠지도록, 성벽과 성벽 길을 다듬어 준 우리 선조들의 마르고 멍든 손길에 감사를 드린다.
▲ 누가 차를 타고 네 시간을 달려야 그림을 볼 수 있다고 했나, 지하철 몇 구간이면 도심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다만 찾지 않거나 누리지 못할 뿐.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성곽길 곁에 있는 한양도성박물관이 문은 열고 영업하지 않아 살짝 서운했지만, 가을볕 아래 은행잎과 더 즐기라는 뜻이라 생각하며, 감사히 나선다. 아쉬움에 여기저기서 출토된 성돌 앞에 잠시 서운함을 달래본다. 태조 때의 다듬지 않아, 다소 투박한 성돌, 세종 시 세종대왕과 같은 둥글둥글한 성돌, 숙종 시 네모난 성돌, 순조 시 더 크고 다듬어진 성돌이 시대를 가르면서도, 나뉘지 않고 서로 엉겨서 산다. 무너지지 않는 성벽이 되려면, 면석의 모양은 서로 달라도 체성은 어우러져 결국에 성벽은 하나가 되어야 하겠다. 우리는 어찌하여 남북으로 갈라지고도 부족하여 가위와 칼을 들고 또 찢으려 아우성친다. 우리는 언제 저 아름다운 한양 성벽이 될지 싶다. 한양도성은 1395년 축성도감을 설치하고 전국에서 징발한 11만 8,700여 명의 장정으로 139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98일 만에 준공했다.
▲ 한양성곽을 둘러보는 재미 중의 하나는 축조되고 네 번의 증·개축을 거치면서 그 시대를 성벽에 남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지금을 있는 대로 표현하는 것이 역사다 싶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성벽 곁에 키를 높이고 선 나무도 어울리는 배경이 된다. 셔터 한 번 누르라는 명령을 어길 수 없어, 덤으로 세 번은 누르고야 발을 옮긴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넉넉함을 주는 저 느티나무와 같이, 가끔은 살면서 저런 배경이 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곁이나 아래서 머물다 갈 수 있는 그런 삶의 순간을….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살다 보면 언젠가 그 소원을 하늘의 달과 별이 듣기라고 할까 싶은, 고요한 밤을 맞을 수 있을지도… 바람 하나 더 얻을 수 있는 낙산 성벽 오르기는 행복 그 자체.
▲ 에게해에서 바라보는 그리스나 터키의 항구가 되고 또는 꿈속의 고향이 되기도 하는…. 성 밖의 풍경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혜화동을 기점으로 여러 번 찾았다고 생각한 이화동 벽화마을에서, 다 훔쳐보지 못한 풍경에 레트로 감성이 사정없이 인출되는 순간, 나이고 뭐고 다 잊는다. 하기야 주변에 비슷한 생을 산 남성, 여성은 물론 곁에 선 반려견까지 모두가 무장해제 되어 먼 도심의 풍경에 호흡이 정지된다. 누군가 달려들어 CPR(심폐소생술)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창덕궁으로 창경궁으로 흐르는 지맥을 확인하며 책 속에 수없이 외치던 설명에 “무슨 소리야!” 하던 말과 뜻이 일시에 풀리는 순간이다. 그래서 도시락 싸서 답사하러 다니나 보다. 이런 역사 기행 시간은 역사뿐 아니라 지금의 삶까지 요리하는 것 같다.
▲ 낙산에서는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지맥이 백악을 거쳐 창덕궁, 창경궁을 내려 세운상가로 뻗어가는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성 밖의 모습도 아름다워 ‘대한민국’이 새삼 사랑스럽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아기자기한 골목은 정겹다. 곁에 옛 친구 한 명만 더 있다면 술래잡기, 다방구로 오늘 일정을 꽈배기처럼 꼬아도 용서될 일이다. 옛날 골목은 삶이었다. 그런 골목이 접히고 접히면서, 쌓이고 쌓여서, 지금 우리의 생의 나이테가 되었다. 무릎이 까지고, 팔꿈치가 헤어져도, 빨간약으로 이마와 손등에 채색하면서, 낮과 밤을 아프게 골목에 부딪치면서 살았던 시절이 여기에 있다. 나이가 들어서 하는 말만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아직도 골목골목이 살아 있어 정겹고, 골목길 시멘트 바닥에 흙을 채워 가지를 키우는 마음이 참 곱다. 이 마른 시대와 차가운 계절에 가지만은 탄실하다.
밋밋한 시멘트 바닥과 벽만 보고 자라는 우리 아이들에게 뭐 하나 떳떳한 것이 없다. 하다못해 옛 놀이 하나 제대로 전하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골목 다 깨부수고, 옛집 다 철거하고, 회색 집만 높이 짓고 살면, 인생 성공이다. 교과서는 차마 그리 적지 못하고, 본은 그리 보이고 사는 어른들의 탓이겠다.
▲ 골목길은 삶이며, 인생이다. 골목길은 부끄러운 나를 숨겨주기도, 계단에서 하나씩 오름도 터득한다. 골목 계단은 흙을 모아 또 다른 생명을 키워내는 뚝심도 배우는 교실이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그리 보니 오늘 유난히 더 아프다. 용서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는 것은 몇 해 전 세월호에 실어 그 많은 청소년을 어이없이 바다로 보내고서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살다, 또다시 반복이다. 생때같은 우리 아이들 서른을 넘지 못하고, 이제 골목을 떠나보냈으니 말이다. 바로 이런 골목에서…. 이 골목에서 잠시 나를 숨기기도, 계단을 오르며 성공도 가늠해 보는 일은 물론, 다방구 한 번 자유로이 놀게 하지 못하고 말이다. 요사스럽기까지 한 것은 저들을 지켜주어야 하는 어른들은 온갖 보약 챙겨 먹으며, 억지 생을 늘려 죽기 직전까지 연명치료로 천수를 헤아리는데 말이다. 어찌 우리 아이들은 서른을 넘기지 못하는가 말이다. 부끄러운 마음이 골목에 가득했다. 이제는 제발 부탁이다. 이 염치없는 세상을 우리 아이들이 다시는 지나지 않으면 싶다.
우울한 생각을 가두고 잠시 어린아이가 되어 본다. 낙엽이 여우가 되고 부엉이가 되기도 한다. 잠시 후면 낙엽이 붕어가 되고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된다. 우리가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오늘 아침 갑자기 추워졌던 가을 속 겨울이 따스한 봄이 되고 있다. 마음이 세상의 무게를 내려놓은 순간 그 자리는 꽃밭이다. 가진 것을 다 내려놓으면 세상은 평화일 터인데. 중세가 끝나면서 치고 끼어든 자본논리가 괜한 미움으로 다가선다. 이를 치유 하는 것은 마른 낙엽…. 낙엽 한 장에 이런 행복이 또 있을까?
▲ 낙엽에 동심만 불어 넣으면 여우가 되고 부엉이가 되기도 한다. 잠시 후면 낙엽이 붕어가 되고 배를 띄우는 강물이 되고, 우리 지구를 담는 출렁이는 바다가 된다. 낙엽으로 행복 찾기를 가르쳐 주시는 김정훈 선생님.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낙산 성벽 정상부에 올라서 눈을 멀리 던졌다. 도심의 스카이라인이 대전차 방어벽 같은 아파트로 다 채워졌다. 언제 한양도성 밖에 저리 높은 회색 성벽을 쌓아 어느 불구대천지수 외적을 막으려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거주하는 주택도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주택 수에만 매달리지 말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우리이니, 건물의 색, 형태 및 배치를 주인인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면 좋겠다. 이미 아파트 산이 된 것도 무서운데, 천혜의 자연마을 도봉동 무수골도 지금 저 지경이 되어가고 있으니, 마음이 아프다. 다행히 아파트 성벽 왼쪽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북한산 줄기가 거친 숨을 내쉬는 것 같다. 잘 지켜야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어본다.
이럴 때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금을 잃으면서도, 오래된 옛것을 지키며 도시를 개발하는 런던과 파리시민이 부럽기만 하다. 현재의 이익에 매몰되지 않고 사는 저들의 사고가 불연 부럽고, 당연히 부끄럽다. 어쩌면 진짜와 가짜,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아닌지 싶다.
▲ 북한산 줄기처럼 산맥을 이루는 아파트 성벽과 북한산을 병풍처럼 막아 버린 무수골의 건축물이 정말 멋없는 그림을 그려놓았다. 낙산에서 부감하여 본 모습으로도 지맥이 사라졌는데 저 아파트 성벽 아래서 하늘이 보일지 싶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낙산과 성벽에서 내려와 비우당으로 향한다. 내려가는 계단에 감속이 된다. 그래도 아직은 이 길을 홀로 걸어서 내려갈 수가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다. 아직도 골목길이 남아 있음도 고마운 일이다. 머지않아 하나씩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 풍경을 박물관 비디오로나 봐야 한다는 사실이 진정되었던 호흡에 채찍질이다. 좋은 방법으로 보존하고 유지하고, 살릴 수 있을지 미리 대비해야 할 것이다.
고마운 낙산을 내려 지봉 선생 옛터에 왔다. 비우당(庇雨堂)이다. 비우당은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비우당은 원래 이수광의 외가 쪽 인물로 유관이 살았다. 유관은 지붕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며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라고 농담을 하여 ‘유재상의 우산’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芝峯(지봉) 이수광(1563~1629)은 조선 중기 실학의 선구자다. 세 차례 중국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경험으로 백과사전 성격의 지봉유설을 저술했다. 대사헌, 이조판서와 명나라 사신을 세 번씩이나 다녀왔다는데, 이 초라한 초가집에서 살았다 하니 새삼 존경스럽다. 이 집은 초가집으로 복원하였는데, 지붕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볏짚이엉이 아닌 듯싶었다. 비닐류로 만들어 효용성을 높인 듯싶다. 집터 뒤에는 단종비 정순왕후가 폐위된 뒤 빨래를 했던 곳으로 전한다. 자주동샘(紫朱洞泉)과 그 뒤편에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다. 사방 철옹성처럼 담이 둘려 각자(刻字)는 확인하지 못했다. 답사를 하다 보면 가끔 이런 모습에 당혹스럽다. 읽어보라고 적은 글씨를 읽을 수 없을 때 말이다.
비우당이 낙산의 동편에 있던 지봉(芝峯)의 남쪽에 있었으나 낙산공원을 조성하면서 이 자리에 옮겨 복원되었다. 비우당을 사방 담으로 둘러 가둘 것이 아니라, 지봉 선생이 거주하던 저곳을 하룻밤 (슬리핑백 소지) 머물며 지낼 수 있는 곳으로 개방하면 좋겠다. 추억도 남기고 비우당 이엉 비용에도 보탬이 되지 않을까. 도심 속 하룻밤을 의미 있는 곳에서 머물고 싶은 생각에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 비우당과 기념석과 뒤편에 자주동천과 자지동천 바위글씨가 있다. 지봉 선생의 기념비와 함께 멀리 은행나무 아래 비우당이 가을에 물들었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동대문에서 낙산 성벽을 오르고 내리면서 온 답사길에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아마도 어느 식당 집이라 해도 밥맛이 좋을 것이다. 이런 생리적 환경에 맛도 살아있는 보리밥집은 여행의 백미다. 식탁에 둘러앉아 식구가 되니 무장해제다. 인생이 도돌이표로 다시 시작되고, 그 안에 군대도 담배도 술도 나온다. 그렇게 한 잔의 막걸리 마중물이 되어 목을 넘기며 그 속에 든 옛 추억의 앨범이 통째로 쏟아진다. 행복했으니 오늘은 성공이다. 오늘을 지나치면서 느끼고 겪었던 아팠던 일들은 생의 상처는 옹이로 영원히 남겠지만….
▲ 오늘 동대문을 통해서 한양도성 낙산성곽길을 걸어 낙산에 올랐다. 도심의 성곽 안과 밖을 보고 아름다움도 아쉬움도 읽었다. 보리밥집을 지나 다시 내려간다. 여행도 인생도 오름과 내림이 이와 같아….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saeunmi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