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해후(邂逅)!
‘해후’라는 말 자체가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뜻밖에 다시 만남이니 늘 반복되는 다반사(茶飯事)는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기본적인 감정 가운데 하나라니 슬픔은 준비 없이, 느닷없게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슬픔 가운데 가장 큰 아픔은 아무래도 죽음이다. 죽음이 슬프고 두려운 까닭은 다시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서 천붕(天崩)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자식의 죽음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라 해 단장지애(斷腸之哀)라고 한다.
남송의 유의경(劉義慶)이 쓴 <세설신어(世說新語)> 「출면(黜免)」에 나오는 ‘어미 원숭이의 끊어진 창자(母猿斷腸)’ 이야기에서 나왔다. 놀라운 것은 최근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연구진이 영장류 50여 종의 어미들이 자기 새끼의 죽음에 반응한 모습을 담은 연구 자료 409건을 분석한 결과 어미가 죽은 새끼를 품고 다니는 행동은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 등은 물론 구대륙 원숭이 80%의 종에서 목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죽은 새끼를 품고 다닌다는 원숭이 어미 ⓒ Pixabay
부모에 앞서 자손을 앞세우는 처참한 슬픔을 참척(慘慽)이라 불렀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청동기처럼 단단하고 앞날이 촉망되던 젊은 의사 아들’을 잃고서 스무날 넘게 수녀원에 칩거하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하시라’고 하나님께 따졌다고 한다.
조선 중기 때 요절한 허난설헌(본명 楚姬, 1563~1589)은 허균보다 5살 위의 누이로 그가 지은 ‘곡자(哭子)’는 자식을 잃고 우는 어미의 심정을 읊은 것으로 유명하다. 1577년 김성립과 결혼했는데 가정보다 바깥출입이 잦은 지아비의 한량(閑良)에도 딸과 아들을 낳아 길렀는데 차례로 세상을 뜨자 그녀는 피 끓는 심정을 토했다.
‘지난해는 사랑하는 딸을 잃고 /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 슬프고 슬픈 광릉 땅이여 / 두 무덤 마주 보고 있구나 / 백양나무에 으스스 바람이 일고 / 도깨비불은 소나무 숲에서 번쩍인다 / 지전으로 너희 혼을 부르고 / 너희 무덤에 술을 붓는다. (중략) / 부질없는 슬픈 노래를 부르며 / 애끊는 피눈물에 목메인다.’ 충격으로 같은 해 26세에 그녀 역시 세상을 떴다.
▲ 허난설헌 ⓒ (사)교산·난설헌선양회
카뮈(CAMUS, Albert)의 『전락(Chute)』에 나오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보자.
남자는 한 소녀가 물에 빠지는 장면을 지켜본다. 그는 소녀를 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뜬다. 그 후 그는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되고 삶은 피폐해진다. 남자는 기도한다.
“오 소녀여, 내가 우리 두 사람을 구할 수 있도록, 두 번째 기회를 갖도록 다시 물에 빠져다오.” 익사 직전 소녀는 타인이었지만 어느덧 소녀는 남자에게 ‘우리’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별리(別離)라는 삶의 불청객(不請客)을 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는 사탄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간단하고 손쉬운 방법이 소개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시선과 책임을 나 자신에게 돌려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책하고 후회하는 것이다.
수원수구(誰怨誰咎)!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기보다는 반구저기(反求諸己),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 해결 방법을 모색해 나가다 보면 나가는 것이다. 사탄의 계궤에 넘어가지 않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불청객을 잘 대접해서 보내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슬픔은 때로 의외의 선물과 해후(邂逅)한다.
선물이란 보상이나 자학을 넘어 ‘인격’과 ‘성숙’을 가져다준다.
호사불여무(好事不如無)
젊은이든 50+세대들이든 인간사 좋은 일엔 나쁜 일이 따르므로 차라리 무사(無事)가 곧 태평(太平)일 수 있겠다. 하지만 보라. 태양은 여전히 떠오르고 밤하늘의 별은 빛나고 카타르에서의 축구공은 둥글게 굴러간다. 아직도 가야 할 길, 그래도 보듬고 나갈 인생의 길이다.
▲ 그래도 가야 할 인생의 길이다
50+시민기자단 황용필 기자 (yphwang@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