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 두텁바위로(후암동)의 유래가 궁금하다.

 

 

개인적 관심사가 아니라 세부사항까지는 잘 모르지만, 수년째 도시개발 및 도시재생 관련하여 용산에 각종의 호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대형 신축건물 공사와 도로 공사로 어수선하던 집 근처 용산역 일대가 공사 가림막을 벗어 던지더니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지난 초여름으로 기억한다.

 

주변인들은 앞다투어 생소한 이름의 주상복합단지 시설을 이용하며 눈도장을 찍기 시작하였고, 현대식 인테리어의 다양한 상점들이 속속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마트 앞 버스 정류장도 위치도 어느 새 바뀌었다. 게다가 세계적인 현대 건축가에 의해 동양미와 현대 건축미의 조화가 완벽하게 구현되었다는 국내 모그룹의 신사옥은 서울의 랜드마크로 급부상하여 신용산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듯 했다. 그러나 초현대식 시설을 갖춘 스마트건물도 좋고, 깔끔히 정돈된 폭넓은 도로도 좋지만 나는 오히려 용산의 과거를 추억하고 싶다. 문득 역사의 굴곡과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용산의 유래가 궁금해졌다.

 

▲용산역 (2016년)

 

용산구민으로 살고 있는 나는 이따금 남산도서관을 찾는다. 남산도서관의 전신은 지금의 명동에 위치하던 경성부립도서관이었다. 1965년 지금의 장소로 이전, 신축되어 시립남산도서관이 개관된 것으로 알고 있다. 집에서 출발하여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후암시장을 지나는데 두텁바위로라는 도로를 따라가게 된다. 도서관을 오가며 이 두텁바위로라는 지명이 궁금하던 터였다.

 

후암동은 남산 서쪽자락에 위치한 용산구의 대표적 마을이다. 한양도성 내사산의 하나인 남산자락에 위치해 남산의 지리적 위치와 상징성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신궁으로 훼손되었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으며, 박정희 정부시기엔 안중근 의사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이렇듯 남산 산자락은 시대마다 권력에 의해 이용되어 온 안타까운 공간이지만, 한편으로 그 모든 변화를 받아들여 한국의 극적 사건들과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기억하는 역사 공간이기도 하다.

 

 

골목이 품은 문화주택단지 – 삼판통

 

극적인 근현대사의 흔적은 후암동 골목을 지켜온 문화주택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후암동(厚岩洞)은 마을에 크고 둥근 두텁바위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는 자료를 찾고서야 비로소 두텁바위의 궁금증이 풀렸다. 1945년 광복 후 옛이름을 되찾기까지 후암동은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부삼판통(京城府三坂通)으로 불리며 일본인이 집단 거주하던 지역이다. 1920년대 삼판통에는 일본식에 서양식을 섞은 건물로 이른바 문화주택촌이 형성되어 전통주택과는 다른 이국적인 문화주택촌을 이루었다.  일본인들에 의해 서양 건축양식을 따라 만든 주택이지만 해방 후 70년간은 서울시민이 살아온 주택으로 많은 역사적 의미를 더한다. 문화주택에 살 수만 있다면 70살 할배에게라도 시집을 가겠다는 여심이 발현된 1930년 12월 12일자 조선일보 만평 <여성선전시대가 오면> 삽화가 당시의 시대상과 문화주택 열풍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아마도 요즘의 신축 최신식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하는 우리네 열망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리라.

 

▲1930년12월 12일 조선일보 만평 <여성선전시대가 오면>

 

일제에 의해 이름과 마을 모두를 빼앗겼지만 사람들은 옛 기억을 잊지 않았고, 해방 후에 두텁바위, ‘후암’이란 이름을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 비록 그때 의 그 바위는 사라지고 없지만  ‘두텁바위’라는 이름이 새겨진 길과 마을의 이름으로 후대에 계속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남산에서의 역사는 긍정과 부정을 모두 담은, 유구한 역사의 큰 물줄기로서 그 의미를 더하고 있는 듯 하다.

 

▲일제강점기 남산자락 후암동(삼판통) 일본인집단거주지역- 문화주택촌

 

더욱 반가운 것이 용산구에서 2018년부터 9월1일부터 ‘제1회 후암동민의 날 두텁바위 축제’를 개최하여 남산도서관 맞은편 ‘두텁바위 상징석’ 건립 5주년을 기념하고 후암동민의 날을 선포했다. 이로써 두텁바위라는 상징석이 역사적 지명의 의미를 되살리고 주민의 애향심을 고취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고 말씀하신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한마디를 깊이 새기면서 2018년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