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일을 ‘놀이’처럼

토요일 저녁, 마라톤 동호회 사진을 정리하며 연말을 실감했다. 회사와 마찬가지로 마라톤 동호회도 매년 송년회를 연다. 발단은 사진도 잘 모르고 손도 느린 주제에 우리 동호회의 1년 활동에 대한 동영상을 만들겠다고 자원한 것부터 비롯됐다. 한마디로 사서 고생하겠다고 손 든 셈이다. 엉겁결에 그 일을 떠맡고 보니 사진을 고르는 것부터가 장난이 아니다.

 

일이 아니라 놀이라서 가능한 것

사진이 몇 장 안되는 시절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사진이 넘쳐나는 시대다. 단체로 마라톤 대회에 한번 참석하고 나면 동호회 밴드에 올라가는 사진은 수백 장이 넘는다(요즘 젊은 층들은 인스타그램이 유행이라지만 우리 클럽은 아직 밴드다). 물론 한 사람이 수백장을 올리는 것은 아니다. 회원들이 너도 나도 사진을 올리다 보니 중복된 컷도 많고 비슷한 사진도 수두록하다. 그 가운데 좋은 사진을 골라내야 하니 1년 치를 모두 봐야 한다.

마라톤 대회별 경중을 따지고, 회원들 간의 컷 수 안배까지 고려하다보니 10여분짜리 동영상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마디로 장난이 아니다. 더구나 동영상 프로그램이 아니라 파워포인트로 한 한 땀 사진 넣고 자막 넣어가며 작업하는 원시적인(?) 방법을 쓰다 보니 더 그럴 것이다.

 

마라톤대회 출발을 대기 중인 달림이들.

 

평일에 그런 일을 할 수도 없다. 증권 기자의 특성 상 시장이 열리는 날에는 꼼짝없이 컴퓨터를 지켜봐야 한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작업을 해야 했다. 미리 해놓으면 좋았겠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클럽 송년회가 코 앞에 닥쳐서야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배경음악도 입혀줘야 하는데 어떤 음악을 쓸 것인가는 또 다른 고민이었다. 토요일 저녁을 고구마로 때워가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아들 녀석이 한 마디 거들었다. 수고비는 누가 주는 거냐고. 당연히 자봉(자원봉사)이라고 말하고 보니 문득 깨달았다. 이게 만약에 일이라면 어땠을까. 일찌감치 못 하겠다고 손사래를 쳤을지도 모른다.

 

새벽까지 음주와 야근의 차이

오래된 기억이 되살아났다. 신문사 편집국에서 편집기자를 맡은 적이 있다. 편집기자는 예외 없이 당직을 해야 하는데 당시에는 외신기자와 조를 맞춰 새벽 2시 정도까지 대기해야 했다. 국내 정치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이슈들이 밤늦게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 타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직을 맡으면 다음날은 휴무라고 했다. 편집기자로 배치받은 날 설명을 들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더 늦게까지 놀고도 아침에 출근하는데 새벽 2시까지 일하면 다음날 쉰다니, 너무 좋은데?’ 하고 말이다.

요즘이야 다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기자들의 늦은 술자리는 다반사였다. 여기자라고 특별히 예외는 없는 편이었다. 새벽 5시까지 술 마시다가 고꾸라져서 퇴근했는데 7시에 나와서 멀쩡히 기사를 쓰고 있더라는 전설적인 선배들도 수두룩했다. 그러니 새벽 2시까지만 일하면 다음날 쉴 수 있는 시스템은 특혜로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동안 시간 없다는 핑계로 미뤄왔던 영어학원에도 등록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2~3번만 가도 그게 어디냐며 말이다.

막상 당직을 해보고서야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당직 시간에 큰 일이 터진 경우는 1년 중 다섯 손가락 안에도 꼽힐까 말까였다. 대부분은 큰 사건 없이 작은 외신 기사만 교체하는 정도로 끝났다. 그런데도 새벽 2시까지 당직을 서고 나면 온 몸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졌다. 당연히 학원은 한두 번 가고 그만뒀다. 그때 확실히 경험했다.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자기최면을 통해 일을 놀이로 바꿔야

‘즉문즉설(즉석에서 묻고 즉석에서 답하는)’로 인기가 높은 법륜스님은 한 강연에서 “돈을 주고 하는 것은 놀이, 돈을 받고 하는 것은 일이 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클럽에서 춤추는 사람을 보자. 클럽이 마감시간을 30분 연장한다고 발표하면 고객들은 “우와~ 놀 시간이 공짜로 더 생겼다”라며 환호성을 친다. 반면 무대 위에서 춤추는 무희들은 “30분 더 일하라는 얘기잖아”라며 불평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달림이들끼리도 아주 더운 여름이나 겨울에 “우리가 돈을 얼마나 받으면 이런 날 뛸 수 있을까”라는 농담을 건넨다. 결론은 “돈을 안 받고 안 뛴다”는 것이었다. 다들 “미쳤어? 내가 이런 날씨에 돈 받고 뛰게~”라는 반응을 보였다.

접대 골프 얘기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많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세상에 접대골프만큼 힘들고 귀찮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 친구들끼리 골프를 치면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놀이가 ‘접대’라는 말이 들어가면 힘든 일이 되는 것이다.

 

쉐이셀마라톤에서 출발을 기다리는 참가자들. 사진=정동창

 

동호회만 그러할까.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하는 자원봉사자들은 모두 돈을 받지 않으면서 오로지 자긍심으로 그런 일들을 해낸다. 몇 십 년 자원봉사를 했다는 사람들도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면 그 기간을 채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돈을 받으면서도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는 아직도 현업에서 일하는 나에게는 하나의 과제다. 법륜스님은 “일을 놀이처럼 하면 된다”고 해답을 제시했다.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자기 최면을 걸어서라도 일을 놀이라고 생각한다면 스트레스를 덜 받을 것 같다.

물론 일을 놀이처럼 건성건성 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잘 하지도 못하는 일을 놀듯이 하면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일을 놀이처럼 하자는 말은 일에 대한 접근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일을 놀이처럼 접근하면 오히려 더 집중하게 될 수도 있다.

업무 뿐 아니다. 살다보면 돈 받고 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 때 의무적으로 하기보다는 ‘놀이’처럼 좀 접근한다면 훨씬 쉬워질지도 모른다.새해에는 모든 일을 놀이처럼 만들어보자고 증권 기사를 쓰는 컴퓨터 앞에서 다짐해본다. 새해는 돼지의 해다. 웃으면 복돼지요, 라며 이른 새해 달력이 책상 앞에서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