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카툰 걸크러시 ‘누나쓰’를 소개합니다!
그녀들은 신인 걸그룹 같았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자기 장기를 펼쳐 보인다. 뭘 그리 보여주고 싶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사하기 바쁘다. 만화 그리기에 푹 빠져 결국 그룹을 결성해버렸다는 시니어 만화 창작단 ‘누나쓰’. 잠깐 동안의 취미거리로 잊혔을지 모를 노인복지관의 프로그램으로 알게 됐다는 만화. 이제는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한 부분으로 만화가 자리 잡았단다. 당돌, 저돌, 돌격 앞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시니어 걸크러시와 한바탕 떠들었다.
요즘 내가 제일 잘나가!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의 카툰캠퍼스 사무실. 만화를 매개로 한 교육 사업을 하는 이곳은 ‘누나쓰’가 만화를 배우고 창작활동을 하는 공간이다. 최근 ‘누나쓰’ 멤버의 활동상이 인터넷이나 매체를 통해 조금씩 알려지면서 미디어와의 접촉도 많아졌다. 취재가 있었던 8월 중순에도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팀이 다녀갔다. 카메라 앞이 낯설 법도 한데 곧바로 이어지는 인터뷰에 임하는 모습이 전문 만화작가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누나쓰’는 그럼 어떤 시니어가 모여 탄생했을까?
노영자 부천시오정노인복지관에서 ‘시니어 만화창작교실’이라는 수업을 받았어요. 기초반 3개월을 거쳐서 심화반 3개월, 총 6개월이요. 처음에는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너무 재미있었고 선생님들 열의가 대단하셨어요. 수업에 빠진 적도 없어요. 수업이 다 끝나고 나니까 너무 아쉬웠어요. 그림 좀 그릴 만하고 관심이 좀 싹트려 할 때쯤 과정이 끝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 맞는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와서 사정을 했어요. 우리 버리시지 말라고요. 옷자락 붙잡고 사무실까지 쫓아갈 거라고 했어요(웃음). 만화는 아직 깊이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뭐든지 상상만 하면 꿈도 그릴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맘대로 할 수 있으니까 좋습니다.
2014년 서울문화재단 후원으로 카툰캠퍼스가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진행했던 만화 자서전 교육이 ‘누나쓰’가 생겨난 배경이 됐다. 기초과정과 심화과정으로 나눠 체계적인 만화 그리기 작업을 2년간 진행했다. 만화자서전을 넘어 창작 영역에도 재능을 보이는 시니어를 발굴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 후원으로 부천시오정노인복지관에 교육의 장을 옮겨와 6개월 과정의 교육을 이어갔다. 만화 교육을 다 마치고 못내 아쉬웠던 열혈 시니어가 카툰캠퍼스 사무실로 찾아와 만화를 배우고 싶다며 애원을 했다. 새로운 세상에 눈뜬 시니어를 외면할 수 없어 카툰캠퍼스는 자체적으로 만화에 관심 있는 시니어 7명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왁자지껄 개성 강한 시니어 카툰 걸크러시 ‘누나쓰’가 지난해 7월 15일 결성! 카툰캠퍼스도 ‘누나쓰’를 만나면서 시니어 교육에 보다 더 중점을 두고 있단다.
김경자 작년 10월에는 빼꼼공원(경기 부천시 역곡동)에서 ‘누나쓰가 간다’라고 쓰인 현수막을 걸고 주민들 캐리커처를 그려드리기도 했어요. 12월에는 작품집 <시니어만화자서전>을 냈고 한국만화박물관에서 전시회도 했어요. 아동센터, 복지관, 노동복지관 등에서도 캐리커처 봉사를 했어요. 다문화 가정 엄마들 얼굴을 그려줬는데 제 생각에는 타국에 와서 가족들이랑 떨어져 사니까 외롭잖아요. 일부러 입술도 빨갛게 그려주고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그려줬어요. 얼굴을 더 화사하고 밝게요.
‘누나쓰’ 인생에 색깔을 입히다
‘누나쓰’는 7명으로 구성됐다. 7명 구성원들은 저마다의 추억과 사연과 꿈을 담아 만화 작업을 한다. 퇴직 교사인 김옥순 작가는 만화를 통해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억한다. 어머니는 결혼하고 오래오래 보면서 자식으로서 보답을 했지만 아버지께는 받기만 하고 드리지 못한 마음을 만화를 통해 풀어가고 있다. 취재 날 개인 사정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은 이춘자 작가는 천재성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만화작가로 성장했고 한 은행 사외보에 인터뷰도 실렸다. 서영희 작가는 만화를 통해 자신의 병을 알리고 힘든 시간을 꿋꿋하게 이겨나가고 있다.
서영희 파킨슨병을 앓고 있어요. 2010년도에 발병했는데 육십이 좀 넘어서 발견했어요. 어느 날 밥을 먹는데 떨리기 시작했어요. 이런 병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정말 머릿속이 하얗게 되더라고요. 고치지 못하는 병이구나 했어요. 제가 처음 파킨슨병 약을 먹으면서 겪었던 얘기를 만화로 그렸어요. 약을 3개월 먹으니까 얼굴이 커지더라고요. 너무 독해서요. 잠만 자고요. 그 이후 약을 또 먹어야 하는데 약만 받아놓고 먹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다리도 떨리고 가족들이 속상해 난리가 났어요. 우울증도 생겼고요. 그러다 큰 병원으로 옮겨 다시 검사하고 약을 바꿨더니 괜찮은 거예요. 어차피 치료받을 생각이면 마음을 바꾸자! 치료를 받으면서 감사의 씨앗을 찾고, 울고불고하면서 짜증내고 화내는 대신 도화지에 다시 그림을 그리자고 생각했어요.물론 재활을 염두에 두고 하는 활동은 만화 외에도 많아요. 합창, 핸드벨, 우쿨렐레, 난타 등이요.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만화를 그리는 동안 제 손이 떨리지 않아요. 밤 9시면 자던 사람이 새벽 2시고 3시고 책상 앞에 앉아 있기도 해요. 그림을 그릴 때마다 평온이 찾아오는 느낌이거든요. 요즘에는 음식 만화를 그리고 있어요. 제가 요리를 좋아하는데 제 레시피를 모아서 만화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파킨슨병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 서영희 작가의 작품
조금 늦게 ‘누나쓰’ 멤버에 들어온 이영희 작가와 차영순 작가 또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차영순 작가의 경우 5년간 다져온 사진 촬영 실력으로 멤버들의 사진을 도맡고 있다. 누나쓰 멤버들은 처음 시작할 때의 작품과 지금 작품을 보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성장한 모습에 놀랍다고 입을 모은다. 앞으로 만화 박람회에도 나가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다. 또 박람회에 온 관객들 얼굴도 그려주고 봉사도 많이 하고 무엇보다 남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 ‘누나쓰’는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 스토리펀딩을 하고 있다. ‘누나들의 밥상’이라는 사연이 있는 이야기를 담아 인터넷에 연재 중이다. 시니어가 살아온 옛 추억이 담긴 이야기도 실리고 있다. 격주로 누나쓰 멤버가 한 작품씩 쓰고 있고 10월에는 이 글들을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할 계획이다. 아직은 그저 색을 칠하고 자신의 얘기를 하는 정도라 말하지만 시니어 세대가 관심 가져볼 만한 무한의 장이 만화가 아닐까. 아이가 좋아하는 전래동화는 시니어의 입을 통해야만 그 맛이 나고 한결 담백하다. 아이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만화 영역에는 늘 시니어의 따뜻한 이야기도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었다. ‘누나쓰’라는 이름을 걸고 시니어 프로만화가로 제대로 거듭날 그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글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사진 이혁 forrei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