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끝이라니 생각만 해도 멀고 먼 땅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라는 말도 있듯이 막상 가 보면 그리 멀기만 한 곳도 아니다. 남극 바로 위 남아메리카의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걸친 일부 지역을 칭하는 파타고니아는 등산복 브랜드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페르디난드 마젤란과 그의 원정대가 거인족으로 묘사했던 원주민들을 가리키는 파타곤(patagón)이라는 말에서 비롯됐다. 남반구에 위치해 우리나라와 계절이 정반대인 이곳은 연중 기온이 낮아 11월에서 3월이 여행 적기이며, 이때 간다 해도 사람을 지구 밖으로 날려버릴 기세로 불어대는 토레스 델 파이네의 바람을 피할 방법은 없다. 자연은 냉혹해 불평을 허락하지 않는다 했던가? 절대적 힘 앞에서 작은 불평 따위는 내동댕이치게 되는 곳이 파타고니아다. 그러니 이곳에선 바람을 피하기보다는 기꺼이 마주하리라 마음을 먹는 게 낫다. 사람은 풍속 40m/s를 넘으면 날아갈 수도 있다는데, 이곳은 최대 풍속이 자주 60m/s를 넘는다. 영국의 탐험가 에릭 십턴(Eric Shipton)이 ‘폭풍우의 대지’라 불렀다는 곳. 그렇다면 우린 왜 이렇게 혹독한 곳으로 가려 하는 것일까?
나만의 이야기를 쓰기 위한 결행
1989년 1월, 48세로 요절한 브루스 채트윈(Bruce Chatwin)은 ‘선데이타임스’ 기자로 일하던 어느 날, 93세의 디자이너 아일린 그레이를 인터뷰하러 갔다가 그녀가 그린 파타고니아 지도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는다. 아일린은 자신은 이미 늙어서 갈 수 없다며 채트윈에게 대신 가줄 것을 부탁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채트윈은 신문사에 ‘파타고니아로 떠남’이라는 짤막한 글 을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 그가 쓴 책 ‘파타고니아’ 서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제가 늘 저지르겠다고 협박했던 일을 드디어 결행했습니다. 오늘 밤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납니다.”
파타고니아의 비경길 루트 40, 비글 해협의 펭귄들, 날아갈 듯 바람이 부는 토레스 델 파이네
문명의 이기는 거리 감각을 바꿔놓았다
우린 이제 비행기를 타고 단 두 시간 만에 목적지에 닿을 수도 있고, 수십 시간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다. 효율성과 비효율성 사이에서, 속도와 비속도 사이에서, 빠름과 느림 사이에서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비행기로 단 두 시간 만에 갈 수 있는 길을 버스로 온종일 달려서 간다. 느린 것들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30시간의 버스 여행이 쉽지 않다. 그래도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가로지르는 파타고니아 땅만은 꼭 육로로 달려보고 싶었다. 그래야 지도가 아니라 온몸으로 이 땅덩어리가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을 테니까. 30시간을 달려도 피곤함보다는 오랜 상상이 실현되는 기쁨에 잠을 이룰 수 없다. 창밖의 변화를 지켜본다. 그 길이만큼이나 버라이어티한 땅덩어리. 사막에서 툰드라로, 와이너리가 펼쳐진 녹색의 땅, 그리고 바다와 산맥, 파타고니아 빙하에 이르기까지. 이름 모를 도시에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 내리고 타고… 손님을 끝없이 바꾸며 버스는 달려간다.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 고속도로 휴게소엔 먹을게 별로 없고, 떡볶이와 오뎅, 우동 생각이 간절하지만 커피 한 잔과 웨하스 과자로 허기를 달랜다. 파타고니아는 대한민국의 다섯 배 크기.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달려봐야 고작 5시간밖에 안 걸리는 곳에서 살던 나는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가는 데 30시간이 걸리는 이 나라에 와서야 우리나라 땅덩어리가 얼마나 작은지를 실감한다.
파타고니아의 비경을 잇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루트 40! 마음을 방해하거나 어지럽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땅. 이곳에 오면 오로지 자신만을 명징하게 들여볼 수 있을 것 같은, 거울 같은 자연을 마주할 수 있다. 왜곡되지 않은 정직한 선. 얽히거나 꼬임 없이 올곧게 이어지는 길을 보며 굽은 마음을 조금 펴본다. 땅보다 더 큰 면적으로 다가오는 광활한 하늘은 늘 빌딩에 가려 그 모양을 알 수 없었던 구름의 존재를 각인시켜준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과 페리토 모레노 빙하
파타고니아를 대표하는 곳을 꼽는다면 칠레의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과 아르헨티나의 페리토 모레노를 비롯한 약 50개의 빙하 국립공원이다. 3개의 화강암 봉우리를 비롯해 해발 2500m의 설봉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토레스 델 파이네는 남미 최고의 풍광으로 눈이 닿는 곳마다 광고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봉우리를 지나 길고 긴 잿빛 모래를 한참 걸어가서 만난 그레이 빙하(Grey Glacier)는 이름처럼 짙은 회색빛을 띠고 있다. 거대한 빙하를 마주보며 다가가는 길. 어디선가 우르르 쾅쾅 땅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바로 눈앞에서 거대한 빙하 한 조각이 떨어져 내린다. 마치 지구의 한끝이 닳아 없어져 떨어진 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아르헨티나 빙하 국립공원의 북쪽 입구라 할 수 있는 엘 찰텐에서는 등반가들의 꿈인 피츠로이(3405m) 산을 등반할 수 있다. 모레노 빙하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엘 칼라파테 마을은 가장 번화한 곳이다. 오랜만에 쇼핑도 하고 레스토랑에 들어가 스테이크에 아르헨티나 말벡 와인 한 잔을 곁들인 식사로 호사를 누리며 쌓인 피로를 씻는다.
30km 길이에 5km 폭, 60m 높이의 얼음덩어리 페리토 모레노 빙하는 남극과 북극을 제외하고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빙하로 꼽힌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수천 년 된 빙하 위에서 빙하 조각을 넣은 위스키 한 잔을 마셔보자! 그 감동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다. 빙하를 보는 또 다른 방법 중 하나는 배를 타는 것. 웁살라(Upsala) 빙하 크루즈로 세계 최대의 빙하와 빙산을 돌아볼 수 있다. 빙하라 하면 무척 추울 것 같지만 맑은 날씨엔 후드티로도 충분할 만큼 여름 날씨는 그리 춥지 않다. 파타고니아에는 크고 작은 빙하가 50여 개나 된다. 남극과 그린란드 다음으로 빙하가 많다. 안데스 산맥에 내리는 많은 비가 빙하를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온난 빙하에 속하는 이 지역의 빙하는 빠르게 순환하는 것이 특징이다.
땅끝마을 우수아이아의 서정적인 풍경,마젤란 해협, 페리토 모레노 빙하
지구 최남단 마을, 우수아이아
파타고니아 여행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을 몇 번씩 오가는 여행이다. 아르헨티나의 엘 찰텐, 엘 칼라파테, 모레노 빙하를 만난 뒤 칠레의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을 갔다가 다시 아르헨티나의 땅끝 마을을 향해 달려간다. 12시간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마젤란 해협을 웅장한 크기의 배, 파타고니아호를 타고 건넜다. 말 그대로 산 넘고 바다 건너 도착한 우수아이아(Ushuaia). 남극을 제외하고 인간이 모여 사는 최남단 마을인 우수아이아는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아래쪽에 있는, 설산에 둘러싸인 작은 항구 마을이다. 먼 옛날 대항해 시대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건너가는 많은 배가 대자연의 재앙 속에서 침몰했다고 전해지는 곳. 마젤란 해협을 바라보며 경사진 언덕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1년 내내 세상의 끝을 느끼고 싶어 하는 여행자들로 붐빈다. 남극으로부터 불과 1000km 떨어진 곳. 핀 델 문도(땅끝) 박물관에는 찰스 다윈이 비글 해협을 항해할 당시의 항해일지와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이곳까지 온 수고로움을 치하해주듯 여권에 스탬프도 찍어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엽서를 보낼 수 있는 파란 우체통도 마련되어 있다. 장거리 버스와 배 멀미로 지쳐 있던 나는 주소를 한글로 써서 우체통에 넣어버리고 말았는데,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 엽서를 친구가 받았단다. ‘대한민국 만세’라는 문자가 왔다. 정말 대한민국 만세다.
글·사진 이화자 68hjlee@hanmail.net (‘비긴어게인여행’, ‘여행처방전’, ‘여행에 미치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