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여름이구나!”
계절은 색깔을 지닙니다. 우리 다 아는 일입니다. 봄은 버드나무의 늘어진 가지가 연한 녹색을 띨 때부터 스미는 것 같습니다. 여름은 아예 온 세상이 진한 녹색입니다. 그러다가 가을이면 서서히 황갈색으로 대지가 물들여지면서 마침내 겨울은 다시 온 세상이 흰색으로 덮입니다. 당연히 이런 색칠은 사람 따라 다릅니다. 하지만 철이 서로 다른 색깔로 채색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계절은 이에 더해 제각기 자기 소리를 지닙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봄은 졸졸거리는 시냇물 소리를 냅니다. 조심스러운 희망이 흐릅니다. 겨울은 아예 침묵입니다. 고요를 잃은 겨울은 겨울답지 않습니다. 가을은 현의 낮은 울림 같은 소리를 냅니다. 고마움이 거기 실립니다. 그리고 여름은 작약(雀躍)하는 환성입니다. 삶의 약동이 그대로 자기를 소리칩니다. “와, 여름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외칩니다.
지나치게 전원적인 정서라고 마땅찮아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계절을 간과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질 ‘도시’의 삶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여름에 김장김치를 먹고(이런 묘사가 얼마나 소통이 될지 불안하지만), 한겨울에 빙수를 사먹는 세상인데 철을 일컫는다는 것은 낡아도 한참 낡은 농경사회의 의식을 드러낸 것일 터이니까요.
그렇지만 계절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은요. 봄은 여전히 추위를 물리칠 만큼 따사롭습니다. 여름은 무덥고요. 가을은 서서히 을씨년스러워지는 계절이고 겨울은 모질게 춥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계절을 보내고 맞습니다. 기다리기도 하고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걱정하기도 하고 무사하게 넘겼다고 안도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철의 바뀜조차 알지 못하는 철딱서니 없는 철부지 아니고야 철을 모를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야흐로 여름입니다. 온 세상이 싱싱하게 짙푸른 색깔로 뒤덮인 정경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리고 온갖 곳에서 터져 나오는 “와, 여름이다!” 하는 환성이 합창처럼 들립니다. 소리만이 아니라 모습조차 집 안에서, 길거리에서, 들에서, 산에서, 바다에서 보입니다.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갑자기 서둘러집니다. 나도 어서 배낭을 찾아 메고 어디론지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바다여도 좋고 산이어도 좋습니다. 아니, 벌써 나는 여름의 한복판에 이르러 있습니다. 나는 동무들과 고추를 다 내놓고 내에서 미역을 감고 있습니다. 여름이니까요. 소쿠리를 들고 모래무지나 미꾸라지를 잡으러 동네 형들과 나갔는데 나는 물속 풀숲에서 뱀을 덜컥 손으로 쥡니다. 여름이니까요. 원두막 위에서 주인 할아버지가 주신 참외 세 개 중에서 두 개를 먹고는 나머지 한 개를 배가 불러 마저 먹지 못해 얼마나 아쉬운지요. 가져오기는 했습니다만. 그러다가 외할아버지를 따라 대천 해수욕장에 갔을 때의 그 황홀한 바다와 파도와 황혼, 모래사장과 해파리와 조개껍질들, 그리고 천막 안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설친 잠. 돌아와 검은 살갗이 끊임없이 벗겨지는데 그렇게 온몸이 햇볕에 탔는데도 아프지 않았느냐는 누님의 물음에 “아니!”라고 나는 대답합니다. 마치 영웅이듯이. 여름이니까요.
세월이 가도 여름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사내 녀석 둘과 네 식구가 배낭을 짊어지고 포항에서 속초까지 해안을 따라 갑니다. 바다가 보이는 민가에 들러 천막을 옆에 치고 물과 반찬을 얻어먹으며 그렇게 열흘을 걷고 타고 쉬고 자곤 합니다. 여름이니까요. 우리는 설악산에 올라 겹겹이 쌓인 능선을 향해 “야호~!”라고 외쳤고, 속초에서는 바다의 끝 수평선을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야~!” 하고 소리쳤습니다. 삶의 꿈과 열기가 하늘을 찌릅니다. 여름이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미꾸라지 잡던 형들도 없습니다. 누님도 없습니다. 원두막도 없고, 외할아버지도 계시지 않습니다. 산에서 바다에서 목이 터져라 소리치던 사내녀석들은 이제 나이가 쉰을 넘었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기억조차 투명하지 않습니다. 연대기조차 흐려져 30년 전인지 40년 전인지 사뭇 헷갈리기만 합니다. 한데 여름이 옵니다. 여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라질 까닭이 없습니다. 계절의 바뀜은 우주의 운행인걸요.
여름의 환성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귀를 막아도 들릴 여름의 함성이 다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면서 몸조차 들썩이게 합니다. 곧 냇가로, 바다로, 산으로 나갈듯합니다. 그런데 햇볕에 이리 눈이 부실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색안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따갑게 더울 수가 없습니다. 토시를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쩐지 창피해집니다. 배낭에 이것저것 넣고 짐을 꾸려야겠는데 벌써부터 어깨가 아픕니다. 신발을 찾아 신어야겠다고 하는 순간 발이 지레 무겁습니다. 갑자기 함께할 친구가 없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함께 평생을 살아온 내 반쪽도 다르지 않습니다. 생각도 건강도 따로따로인 채 함께 살아온 세월이 여름 나들이를 권할 만큼, 아니면 사양할 만큼, 서로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윽고 여름이 서서히 낯설어집니다. 여름인데, “와, 여름이다!”라는 환성이 천천히 멀어지면서 나는 마침내 “아, 여름이구나!” 하는 탄성을 조금은 시무룩한 음조로 발언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는 것이 슬픈 정경은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살아간다고 하는 것, 나이 먹으며 인생의 길을 걷는다는 것, 생각하면 계절의 지냄과 다르지 않은데, 이미 우리는 되풀이되는 것은 아니어도 봄도 여름도 우리 삶의 깊은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가을마저 겪으며 그 깊은 끝자락에 이르렀고, 겨울조차 현실인 오늘을 살고 있기도 합니다. 세월은 계절을 내재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말투가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와, 봄이다!”가 아니라 “오, 봄이구나!” 하면서 내 봄을 회상하고, 그러면서 그 봄이 이어 펼쳤던 내 여름을 다시 회상하면서 “와, 여름이다!” 하기보다 “아, 여름이구나!” 하면서 그것이 빚은 내 가을을 되살피고, 이윽고 그 가을에 이은 겨울의 고요 여부를 헤아려야 하지 않을는지요. 환성의 언어를 탄성의 언어로 조용히 다듬을 필요는 없을까하는 것입니다.
나무 그늘이 시원한 강가에서 물을 바라보다가 “와, 여름이다!” 하는 환성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터져나오는 순간, 자식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자식에게 자기가 집을 보아줄 테니 마음껏 여름을 즐기고 오라는 약속을 기어이 받아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열흘 동안 자식 집에서 보낸 그 여름이 이제까지 지낸 여름 중에서 가장 행복했노라고 말했습니다. 짐작이 됩니다.
사는 모습 제각각인데 어떻게 사는 것이, 어떻게 여름을 보내는 것이 좋은 것인지 판단할 절대적인 척도란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깊은 가을이나 초겨울을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와, 여름이다!” 하고 소리치고 덤벙거린다면 쑥스러워질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 환성은 크게 외쳐져야 합니다. 여름을 사는 친구들에게요. 여름은 생동하는 삶의 푸르디푸른 절정이니까요.
글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