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만우 선생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대학 시절, 문학의 길로 이끌어주신 은사님을 그리워하며 민병삼 소설가께서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해 5월의 교정은 참 따뜻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청옥색 무명을 펼쳐놓은 것 같은 청명한 하늘에서 따사로운 햇살이 꽃가루처럼 쏟아져 눈이 부셨습니다. 그 5월 어느 날이 저한테는 벅차고 두려운 하루였습니다. 숙명에 묶이는 순간이었고요.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제가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해에 강의실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그때가 1965년 가을학기였지요. 과묵하신 선생님은 좀처럼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을 만큼 범접할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이듬해에 마침 학교신문 <연세춘추>에서 문학상 공모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문학에 뜻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교지에 고작 콩트나 발표했던 게 전부였을 만큼 일천해서 감히 문학을 입에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단편소설을 덜컥 내고 말았습니다. 아마 치기였던 것 같습니다. 제 작품이 선정될 것으로는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그게 입선작이 됐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선생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느닷없이 “민 군, 소설을 써보게” 하고 슬쩍 떠보는 듯한 어조를 흘리셨지요. 저는 그저 선생님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소설을 써보라고!” 하고는 더 보태는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갑자기 소설을 쓰라니… 저는 선생님의 제안을 환청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벅찼습니다. 그리고 두려웠지요. 그건 제가 과연 소설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습작을 권하셨다는 건 언감생심 낭중지추까지는 아니라도, 저한테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지요. 그건 감격을 넘어서 미래의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었습니다. 그때가 바로 선생님과의 인연이 시작되는 날이었고, 숙명으로 묶이는 순간이었습니다.
저희 세대가 1960년대를 질곡에 비유했지만 저한테는 그게 억압된 자유와 희망 없는 민주주의에 묶인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그것이었지요. 민주투사들은 저 같은 부류를 여물이나 처먹는 돼지로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도 할 수 없었습니다. 빨리 졸업하고 취직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요.
비로소 고백하지만 그때 습작을 하면서도 ‘소설’을 몰랐습니다. 어떻게 써야 소설다운지를 깨닫지 못하고 대구 쓰기만 했지요. 그러다 보면 소설이 될 것으로 믿었고요.
시간은 냇물처럼 흘렀습니다.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소설’은 잠시 접어야 했습니다. 기약 없는 유예였지요. 문학? 소설? 그건 구름이었습니다. 취직이 먼저였으니까요. 선생님은 제자들의 취업을 위해서 동분서주하셨지요. 그저 추천장이나 써주고 그치는 게 아니었습니다. 제자를 데리고 직접 회사나 학교로 찾아가는 게 예삿일이 돼버렸습니다.
이때 선생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마침 경남 거제도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를 구한다며, 제 동기 중에서 희망자를 찾아보라고 하시더군요. 그 순간이 제 운명을 또 한 번 바꿔놓았습니다. 그 학교에 제가 갈 것을 자청했습니다. 선생님이 놀라시며 갑자기 마음이 바뀐 이유를 물으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굳혔고, 농어촌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지요.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하시면서도 입가에 웃음이 엷게 번졌습니다. 제가 작심하고 소설에 전념할 것 같아 기특하다는 표정이었지요.
그때가 1967년 2월 하순이었고, 신학기를 불과 며칠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부임할 곳이 도서지방이라, 부산에서 배를 타고 두어 시간을 가야 했습니다.
서울역에 졸업 동기들과 함께 선생님이 배웅을 나오셨어요. 뜻밖이었습니다. 선생님까지 나오실 것으로는 상상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거제도에 가서 딱 1년만 있으라고 하시면서 담배 한 보루를 손에 쥐어주셨어요. 자식 같은 나이의 제자한테 담배라니…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몰라 쩔쩔맸습니다.
사실 저는 기약 없이 떠났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가면서 비로소 정신이 들었습니다. 서울역에서 저를 배웅하시던 선생님 얼굴이 어른거려 곧 채찍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습작을 시작했습니다. 한 달에 단편 한 편씩을 선생님한테 우송하기로 스스로 다짐했지요. 그 약속은 거의 지켜졌습니다. 문제는 원고의 질에 있었습니다. 제가 읽어봐도 조금도 나아진 게 없었습니다. 플롯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해 오로지 이야기 만드는 일에만 몰두한 탓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반성할 줄을 몰랐습니다. 반성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문학지를 통해 등단하려면 2회 추천을 받아야 했지요. 그때 선생님이 월간<현대문학 >의 소설 추천위원이셨습니다. 추천위원으로 선생님을 비롯해 김동리, 황순원, 오영수, 안수길 선생 등이 계셨습니다.
어쨌든 습작에 게을리하지 않아 1968년 8월호에서 선생님한테 초회 추천을 받았습니다. 1차 관문을 통과해 절반의 성공을 한 셈이었지요. 그때가 마침 여름방학이 시작된 시점이었습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선생님이 남해안으로 여행하는 길에 제가 머물러 있는 ‘장승포’에 들르시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도착하시는 시간에 맞춰 부두로 나갔지요. 선생님이 배에서 내리시는 모습을 보고 은사이기 전에 아버지와 해후하는 듯한 마음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장승포에서 딱 하룻밤 묵으신 선생님은 이튿날 곧장 남해로 떠나셨습니다. 선생님은 버스에 오르시면서 “계속 써!” 하는 말씀만 남기셨어요. 그 짤막한 두 마디에서 행간을 읽지 못했으면 매우 섭섭했을 뻔했습니다.
저는 그다음 해에 거제도를 떠났지요. 꼭 2년을 있었습니다. 서울에 오기는 했으나 교사 자리가 저를 기다린 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이 또 이 학교 저 학교로 저를 데리고 다니셔서 모 여고에 채용이 됐습니다. 그때가 1969년 2월이었습니다. 저는 추천완료를 받기 위해서 소설 습작에 매진했습니다. 심지어 숙직을 대신하면서까지 썼으니까요.
소설을 쓰는 일이 중노동일 때가 많았습니다. 자기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못하는 작업이 었습 니다. 그걸 선생님한테 배웠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1970년 <현대문학>에 추천이 완료됐지요. 선생님한테 사사한 지 햇수로 4년 만이었습니다.
저는 비로소 작가가 됐습니다. 기쁜 마음에 앞서 두려움이 먼저 찾아왔습니다. 작가로서 홀로 서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선생님이 작고하신 지 40년이 넘었습니다. 이제 와서 새삼 그리워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선생님은 저에게 참스승이셨습니다. 중국의 한퇴지(韓退之)는 ‘사설(師說)’에서 ‘옛날의 학자는 반드시 스승이 있었다. 스승이라 함은 도(道)를 전하고, 업(業)을 주고, 의혹을 푸는 소이(所以)다’ 라고 했습니다.
만우(晩牛) 박영준(朴榮濬) 선생님.
선생님은 품격이 높고 맑은 풍류사종(風流師宗)이셨습니다. 저에게는 진정한 사부님이셨고요. 제가 등단한 지 올해로 47년이 됐습니다. 아직은 뇌와 손가락이 망가지지 않아 계속 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민병삼(閔丙三)
소설가. 충남 대전 출생. 연세대 국문과 졸업. 1970년 월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다시 밟는 땅>, <금관을 찾아서> 등. 장편소설 <서울 피에로>, <여우와 탱고를>,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솔거>, <천민> 등 다수. 한국소설문학상, 동서문학상, 유주현문학상 수상.
글 민병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