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보면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렇지요. 마음은 청춘인데 어느새 몸이 말을 듣지 않고, 그럴 때마다 절망감이 듭니다. 어린 시절엔 슈퍼맨처럼 빨간 망토 하나 걸치고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상상했지요. 그러나 현실에서는 슈퍼맨은커녕 평범한 일상을 꾸려가는 것조차 힘이 들지요. 세상에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통제력 착각(Illusion of Control)’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는 믿음

주사위 던지기 게임을 한다고 생각해보지요. 다른 사람이 던지는 주사위에 돈을 걸겠습니까? 아니면 직접 던진 주사위에 돈을 걸겠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던진 주사위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자신이 주사위를 던지면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지요. 1975년 심리학자 앨런 랭어(Ellen J. Langer)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미리 번호가 정해진 복권보다 스스로 번호를 선택한 복권에 더 높은 가치를 매겼습니다. 우리는 운이나 확률에 의해 결정되는 사건조차 자신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 것이지요.

 

통제력 착각은 일상에서 흔히 발견됩니다. 예컨대 사람들은 자동차 사고로 죽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도 여객기 추락 사고를 더 두려워합니다. 직접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비행기는 직접 조종할 수 없지만, 운전은 직접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착각 덕분에 삶에 흥미를 느끼며 살아갑니다. 가령 사람들은 생중계되는 스포츠 경기에 열광하지만, 녹화된 경기를 보면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생중계를 보면서 자신의 응원이 경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이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믿을 때 즐거움을 느낍니다. 만일 자신의 힘으로 상황을 바꿀 수 없다고 믿으면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동물도 통제력을 상실했을 때 극도의 불안감을 느낍니다. 실제로 1982년에 진행된 실험에서는 전기충격을 멈출 수 있는 레버를 누를 수 있는 쥐가 위궤양을 치유할 수 있는 확률이 40% 이상 높았다고 합니다. 똑 같은 전기충격을 받았더라도 말이지요.

 

학습된 무기력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고 믿으면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긍정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은 이를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그의 실험에 의하면, 탈출 방법을 훈련 받지 못한 동물은 탈출 방법이 있는데도 전기충격을 묵묵히 받아 들였습니다. 전기충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한 후 아예 탈출을 포기한 것이지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소음을 끌 수 있는 스위치가 없는 상황에 적응해버린 사람들은 스위치가 있을 때에도 시끄러운 소음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체념이 습관화된 것이지요.

 

우리는 자신의 통제력을 과대평가하는 오류를 범하지만, 이러한 오류 때문에 미래를 꿈꿀 수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을 하는 것, 지식과 경험을 확장시키는 것, 어떤 분야에서 다 나은 상태가 되는 것, 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 등은 스스로를 통제함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왜 세상 일이 맘대로 되지 않느냐고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이 원망스러운 것은 사람들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자신을 바꾸면 됩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자신을 바꾸는 것이 훨씬 쉽지요. 우리는 얼마든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무력감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작은 것,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통제하는 방법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랑클(Viktor E. Frankl)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유대인입니다. 그가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겪었던 경험을 기록한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아직도 전 세계 독자들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안겨주고 있지요. 그가 남긴 기록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중 하나는, 희망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기차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호송열차의 작은 창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석양빛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알몸이 되었을 때, 그들의 환상은 하나씩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희망이 사라지고 나면, 오직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욕구만 남습니다. 정신세계는 동물적인 수준으로 추락하고, 오로지 먹을 것에만 집착하게 되지요. 막연한 희망에 의지하여 살아가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열악한 환경이나 질병이 아니라 ‘희망의 상실’이었습니다. 막연한 기대가 무너지면서 삶에 대한 모든 희망도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던 것이지요.

 

살아남은 사람과 죽어 가는 사람들의 차이는 분명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희망의 근거, 즉 살아야 할 이유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희망을 잃지 않고 아침마다 얼굴을 씻고 면도를 했던 사람들은 살아남았습니다. 프랑클은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그의 말대로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습니다. 절망을 이겨내는 사람은 강한 육체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내적인 힘, 즉 어떤 상황에서도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존재임을 자각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