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은 아무 때, 누구에게나 불쑥 찾아온다.
그 다음의 일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려 있다.
- 제럴드 싯처, 《하나님 앞에서 울다》
아기를 잃은 한 여인이 거리를 떠돌며 보퉁이 속 숨진 아기를 살릴 방도를 눈물로 묻고 다녔다. 이를 가엾게 여긴 어느 현자가 부처를 찾아가라고 말해 준다. 여인의 호소를 듣고 난 부처는 여인에게 과제를 내준다.
“그대를 괴롭히는 불행에는 단 한 가지 치료법이 있다. 마을로 내려가 겨자씨를 한 움큼 얻어 다시 내게 오라. 다만 죽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얻어야 한다.”
여인은 마을을 다 돌았지만 생과 사의 고통을 겪지 않은 집들을 단 한 집도 찾아낼 수 없었고 그 와중에 죽음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다.
생명력의 상징처럼 푸른 잎이 무성한 계절에도, 모든 게 얼어붙은 계절에도 생로병사의 수레바퀴는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주변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과 삶의 예측불가함’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직시하지 않으려 했던 나와 내 가족의 죽음에 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인간이 겪는 다양한 상실들
인간은 맨몸으로 태어나 삶의 주기를 거치는 동안 다양한 것들에 애착을 갖고 또 언젠가는 그것들을 잃는다. 《모든 상실, 모든 슬픔All Our Losses, All Our Griefs, 1983》의 저자인 K. 미첼과 H. 앤더슨은 인간이 겪는 상실의 종류를 6가지로 분류했다.
1) 물질적 상실 (아끼는 소유물, 수입 등)
2) 관계적 상실 (소중한 이와의 이별, 사별 등)
3) 정신 내적 상실 (꿈, 자신감, 정체성 등)
4) 기능적 상실 (질병, 사고로 인한 신체의 부전 등)
5) 역할의 상실 (직분, 직위, 가정 내 역할 등)
6) 공동체의 상실 (이사, 이민 등 터전의 변화)
이런 상실들은 누군가의 삶에 불시에 들이닥칠 수 있다. 다양하게 섞여서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고 하나의 상실이 또 다른 상실을 초래하기도 한다. 인생 후반기에는 상실과 결핍들을 중복해 경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상실
위의 상실들 중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관계적 상실’, 그중에서도 이승과 저승을 경계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죽음으로 인한 이별’이다.
2018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연 사망자 수는 29만 8천여 명에 이른다. 하루에만 평균 818여 명이 이승을 떠난다. 50+세대는 해가 거듭될수록 원치 않아도 상실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주변 누군가가 먼저 겪었다는 소식이 점차 늘어나기 때문이다. 한 지인은 경조사 중에 점점 ‘조의’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며 근래 들어 전화벨 소리가 울릴 때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을 때가 있다는 말을 전했다.
부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어떤 부부든 숙명적으로 이혼이 아니라면 사별을 겪게 된다. (우리 사회에 1인 가구가 늘어나는 데에, 노년층도 꽤 비중을 차지한다. 현실적으로 누구나 반려자를 먼저 보내고 독거노인이 될 가능성이 상존한다. 한국의 독거노인비율_만65세 이상 인구 중 혼자 거주하는 인구의 비율_은 통계청 기준 1990년 8.9%에서 2018년 19.1%로 꾸준히 증가해왔다.)
‘인생은 이런저런 잃어버리는 것에 익숙해지고 견디어내며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한 이도 있지만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육체적, 정신적 맷집이 강해지는 건 아니다. 인간의 주관 영역이 아니니 그저 겪어낼 뿐 제대로 애도하지 못해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길게 상실의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상실은 두 개의 문을 선사한다.
하나는 슬픔에 잠겨 있는 문,
다른 하나는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문이다.
- 채정호,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 중에서
소중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서 겪는 ‘비탄Grief’은 인간이 겪는 고통 중 가장 극단의 고통이라고 한다. 특히 생활을 공유하는 가족의 죽음은 삶의 불안의 근원이 된다.
생각해본 적 있는가? 어느 날, 내 삶에도 이런 상실의 파도가 몰아친다면? 두려운 일이지만 현실에서 누군가는 겪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받아들이고 이어가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숙명이다. 어떻게 해야 상실의 슬픔을 통과해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문’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모든 심리적 위기들은 상실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을 때 찾아온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을 맞닥뜨려야 할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처럼 사별 상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슬픔학 개론≫의 저자인 윤득형에 의하면 “모든 죽음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충격, 죄책감, 분노, 절망, 슬픔, 고뇌, 혼란과 무감각 등 감정적, 신체적, 심리적 반응을 일으킨다. 이는 평범한 사람 누구나 겪는 지극히 일반적인 반응이며 애도의 과정을 잘 겪어낸다면 점차 안정을 되찾게 된다.”
내 인생의 상실경험 정리해보기
상실 이후에 개인이 겪어내는 과정, 노년의 삶이 길어짐에 따라 더 요구되는 사회적 지원 등 당면한 과제들은 많다. 우선 여기에선 아래 질문들에 답하며 상실에 대한 나의 현재 지점을 마주해보자. (참조: W. Worden, Grief Counseling and Grief Therapy, 4th Ed.)
▶ 내가 지금까지 겪은 상실의 경험을 돌아보기 (당시 나이, 느낌, 현재 그것을 떠올릴 때의 기분 등)
▶ 내 삶에 앞으로 다가올까봐 두려운 상실(특히 사별 상실)에 대해 생각해보기 (그 대상은 누구인지, 그 상실로 내가 겪게 될 어려움은 무엇인지, 반대로 내가 먼저 떠날 경우 가장 힘들어 할 이는 누구며, 그 사람은 어떤 것을 힘들어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 현재의 나의 감정에 대해 정리해보고 지금 무엇을 하면 좋을지 생각해본다. (상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고대부터 전승된 지혜가 담긴 전도서 구절처럼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심어질 때가 있다면 베어질 때도 있다. 슬퍼할 때가 있다면 춤출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다면 떠날 때도 있다.” 인간인 우리는 다만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다. 프란츠 카프카의 말처럼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죽음에 관한 예일대 최고 교양철학 강좌이자 스테디셀러인 《죽음이란 무엇인가DEATH》는 이런 질문으로 요약된다.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상실과 애도의 주제에서도 마찬가지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아무리 서로 소중하다 해도 언젠가는 이승과 저승을 경계로 이별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함께 있는 동안 어떻게 지내야 할 것인가? 나중에 후회할 일을 덜 하려면 오늘 무엇을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까.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내고 남은 나, 또는 나를 떠나보낸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아름다운 삶을 위한 과제
고된 하루일수록 숙면을 거쳐야 새날 아침에 굿모닝good morning을 외칠 수 있듯이 상실에서 벗어나려면 건강한 애도good mourning 과정이 필요하다. 이 글 첫머리에 인용한 죽은 아기를 안고 장터를 떠돌던 기구한 여인 끼사고따미는 생과 사에 대한 깨달음 이후 부처의 제자가 되어 마음의 평화를 얻고 평생 수행 정진했다고 전해진다.
긍정심리학의 등장 이후로, 강력한 스트레스를 주는 생애사건 이후의 부정적 변화와 이전으로의 복귀에 초점을 맞추던 병리학적 모델보다 사건 이후의 긍정적 변화에 주목하는 성장모델에 더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끼사고따미처럼 성자의 반열에 오르진 못하더라도 상실-살아남기-치유-회복의 단계를 거쳐 궁극적으로 성장에 이를 수 있다면 바람직하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50+의 삶과 길어진 노년의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핵심과제 중 하나일 것이다.
특히 반려자와 오랜 시간 삶을 공유해와 상호의존도가 높은 중장년 이후 배우자 사별은 사회적 관계 단절의 위험도 있으므로 상실 이후의 문제를 개인 차원으로 버려두지 않는 사회적 지원이 요구된다.
구미 국가에서는 사별로 인한 슬픔 치유를 위한 전문상담이나 애도를 위한 조력모임 등이 공공기관이나 종교기관 등을 통한 프로그램으로 활발하게 지원되는 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했으나 근래 서비스가 생겨나고 있다. 관계상실 이후 슬픔의 통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힘겨워 하고 있다면 상실로 인해 겪게 되는 슬픈 마음을 위로하고 정서적・심리적・행동적・신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고 일상의 삶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애도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해보는 것도 좋다. (서울시 공익활동 지원사업인 ‘찾아가는 사별애도 집단상담’ 무료신청 가능 www.kakdang.or.kr 02-736-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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