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자신에게 실망하지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 파티, 아모르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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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 뭐 해 쏜 화살처럼 사랑도 지나갔지만

그 추억들 눈이 부시면서도 슬펐던 행복이여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가슴이 뛰는 대로 하면 돼

이제는 더이상 슬픔이여 안녕. 왔다 간 한 번의 인생아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가슴이 뛰는 대로 하면 돼

눈물은 이별의 거품일 뿐이야. 다가올 사랑은 두렵지 않아

아모르 파티 아모르 파티

 

세상에는 철학자가 많다. 대중가요 ‘아모르파티’의 노랫말만 봐도 이건 그냥 철학책이다. 실존철학, 니체의 운명애, 긍정심리학 등의 메시지가 다 녹아들어 있다.

실존철학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맨몸으로 이유도 모른 채 이 세상에 내던져졌다. 어디에서 왔는지도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지만 언제가 됐든 누구나 떠나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삶의 유한함을 깨닫는 순간 비어 있는 삶의 의미를 채워나가야 하는 건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각자의 몫이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여정의 구구절절함은 그래서 한 편의 소설이다.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운명에 대한 사랑’이란 뜻의 라틴어 어구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용어로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즉 달콤하고 유쾌하고 좋은 것뿐만 아니라 씁쓸하고 비틀리고 부정적인 것까지 다 받아들이는 ‘운명에 대한 큰 사랑’을 말한다. 고통을 수동적으로 감수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진정한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며, 물질적인 작은 행복이 아닌 궁극적인 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노랫말 ‘슬펐던 행복이여’에 밑줄 쫙~~)

 

 

‘그대로’ 받아들이기의 어려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고 할 때는 일단 그 대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니 내 운명을 사랑하려면 내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인다’를 사전에서 찾아본다. 가슴을 열다, 이해하다, 수용하다, 맞아들이다, 들어주다 등의 의미가 있다.

가끔 뉴스 속 인물들도 이 말을 쓴다. 아프게 받아들이다. 겸허히 받아들이다. 눈물을 머금고 받아들이다. 등등... 받아들인다는 게 쉬운 거라면 그냥 받아들이면 되지 이렇게 앞에 수식이 붙을 이유가 없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게 많았나. 돼먹지 못한 상사, 갑질하는 거래처, 알 수 없는 부동산 정책과 집값, 이해할 수 없는 남(의)편, 이해할 수 없는 마누라... 억울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열악한 환경을 받아들이고 좋은 뽑기를 갖고 태어나지 못한 내 운명을 받아들이고 나이 들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어쩔 땐 하염없이 못난 나 자신을 ‘아프게’ 받아들이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나와의 화해, 나에 대한 존중은 모든 갈등 중 으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다른 문제들도 회피하지 않고 바로 대할 수 있는 시발점이다.

 

러브 유어셀프_LOVE YOURSELF

나와 내 삶, 내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기,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한 것은 세대 불문 전 세계인이 마찬가지인가보다. “BTS 덕분에 제 삶을 사랑하게 됐어요.” 그룹 BTS의 메시지, ‘러브 유어셀프_LOVE YOURSELF’에 열광하는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의 고백이 말해준다.

나를 이해해주기, 독려해주기, 내 안에 숨은 채 나를 휘두르는 내면의 독재자로하여금 나 스스로를 비난하고 자존감을 훼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등 나와의 불화를 극복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 사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평화다. 나를 지키는 기둥과 같은 자존감 잃지 않기의 첫 단추가 바로 나를 수용하는 것이다.

 

아마 이 노래를 뺨이 보송한 아이돌이 불렀다면 감흥이 안 살았을 것 같다. 옆나라로 건너가 30년 가까이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천억 넘게 벌었으나 고국으로 올 때에는 다 빼앗기고 빈손으로 왔다는 가수 김연자. 트로트 멜로디가 EDM과 섞여 저절로 춤을 부르는 이 노래는 육십갑자 한 바퀴를 돈 그녀를 다시 대학축제 무대를 휘젓는 누나로 만들어주었다. 번쩍이는 옷자락을 펄럭이며 무대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동안 절대로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던 온갖 것들을 모두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슬펐던 행복이여

받아들인다는 것은 삶에 대한 체념이나 굴종, 인내와 다르다. 변화할 수 있는 것과 변화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지점을 기점으로 삼아 더 의미있는 삶으로 나아가려는 성장의 포인트다. 과거는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니 오늘을 산다. 다가오는 내일도 열심히 살아낸 또 다른 오늘과 같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

 

니체가 말하는 행복은 이분법이 아니다. 삶 자체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관계, 즉 삶에서의 고통과 기쁨, 쾌와 불쾌, 불행과 행복의 관계를,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슬펐던 행복이여’가 가능하다.

아모르 파티를 부른 가수가 그 많은 돈을 잃고서도 정신줄을 놓지 않고 살 수 있으며, 다시 과거의 인기를 되찾을 수 있었던 건 무엇 덕분일까? 그녀에게는 ‘노래’가 있었다. 마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노회한 남자 조르바가 산투르라는 악기를 늘 지녔던 것처럼 말이다.

 

조르바: “산투르를 다룰 줄 알게 되면서 나는 전혀 딴 사람이 되었어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나 빈털터리가 될 때는 산투르를 칩니다. 그러면 기운이 생기지요. 내가 산투르를 칠 때는 당신이 말을 걸어도 좋습니다만, 내게 들리지는 않아요. 들린다고 해도 대답을 못 해요.”

나 (소설 화자):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조르바?”

조르바: 이런, 모르시는군. 정열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그게 정열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들 각자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가슴이 뛰는 대로 살면 되는데 난 무엇에 가슴이 뛰나? 모두들 인생에서 나만을 위한 그런 정열이나 위안 하나쯤은 챙겨야 한다. 삶을 긍정하고 포용력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인간은 쾌락만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인생사에서 경험한 온갖 사건들을 새로운 관점으로 재구성하여 내 삶에서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고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능동적인 노력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나의 오늘과, 오늘을 사는 나를 사랑하는 것, 바로 아모르 파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