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50+세대들은 안다. 언젠가는, 아니 그리 오래지 않아 지금보다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을 안다. 머지않아 지팡이와 휠체어, 유모차 같이 생긴 노인보행기 없이는 다닐 수 없을 때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힘주어 말해보지만 몸과 마음은 어제와 점점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때가 되면 식물들은 꽃과 잎을 떨굴 준비를 한다. 꽃은 세상을 아름답고 향기롭게 꾸미고 벌과 나비에게 꿀을 주고 다음 세대의 번식을 위해 열매를 맺은 후에는 떨구어 대지를 향한다. 잎도 줄기의 작용인지 아니면 잎이 알아서 떨어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을이 되면 낙엽이 된다. 식물들이 때를 알아 꽃이나 단풍으로 마지막을 예쁘게 장식하고 떨어지듯, 우리도 인생의 끄트머리에 있는 때를 미리 생각하며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 수 있게 준비하는 것은 어떨까.

 

 

부모를 부양하는 문제에 있어 부모나 자녀 세대의 견해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KOSIS 국가통계포털 자료(2018년)에 따르면,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부모 부양은 가족이 책임져야 한다는 견해가 부모나 자녀 세대 모두에서 40%를 웃돌았으나 2018년도에는 25%대로 낮아졌다. 그리고 부모 부양은 부모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답변이 늘었다. 노부모의 부양이 자식의 책임에서 부모 자신의 몫으로 점점 바뀌고 있는 것이다.
우리 50+세대가 2~30대였을 때, 노부모는 당연히 자식이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자식들에게 짐이 된다며 부양을 원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포기할 것이 많다며 힘들어 하는 서른을 훌쩍 넘긴 자식들의 부양까지 감당해야 하는 안타까운 낀 세대이기도 하다. 반면, 자식세대는 부모 부양의 책임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세태 속에서 나의 노후를 어디서 어떻게 보낼까를 생각해 보았다. 은퇴의 연령이 지났어도 일을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다. 그리고 다른 사람 도움 없이 움직일 수 있고 내가 나를 건사할 수 있을 때까지 내 집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다. 그러다가 일을 할 수 없고 내 스스로 나를 돌볼 수 없게 되는 때에 요양원이나 실버타운으로 가려 한다.
작년 말에 함께 여행했던 연로한 화백 한 분이 계셨다. 그 분은 가는 곳마다 주변 관광보다는 예쁘게 핀 꽃송이들을 열심히 사진 찍었다. 왜 그러시냐고 물어보니, “더 나이 들어 침상에만 머물러야 하는 때가 오면 이 행복한 때를 기억하며 그림으로 그릴 꽃을 찍고 있다”고 하셨다.
이 분을 보고 요양원 생활을 생각하게 되었고 생의 종착역이 가까울 때에 머무를 그곳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면 좋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완벽한 부모, 완벽한 자식

나는 내 부모에게 어떤 자식이었고 내 자식에게 나는 어떤 부모인가. 세상에는 완전한 부모도 완전한 자식도 없는 것 같다. 그런 부모와 자식을 만날 수 없고 나 또한 완벽한 자식과 부모가 될 수도 없다.

 

 

불완전한 인간인 부모를 향해 불만을 갖고 원망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1950-60년대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굶는 것이 일상이었던 시절에 ‘먹이지도 못할 자식, 왜 낳는냐’고 원망했던 자식들이 커서 자식을 낳았다. 굶기는 부모가 되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열심히 밭일하며 굶지 않게 길렀다면 그들이 만족했을까. 그의 자식들은 ‘먹이기만 하면 다인가, 남들처럼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하면서’ 하며 불만을 토로할지 모른다. 그들이 부모가 되어 내 자식은 잘 가르치리라 마음먹고 열심히 돈을 벌어 자기는 못 받은 교육을 자식에게 시켰다고 하자. 그러나 그들은 ‘공부하라는 소리만 했지 언제 우리와 함께 했느냐’고 말할 지도 모른다. 요즘 아이를 기르는 젊은 부부들 중에는 부모가 공부하라는 강요만 했지 위로와 공감을 받은 경험이 없었기에 자신들도 자식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너무 힘들다며 부모를 탓하는 경우를 보았다.
부모가 되고 나이가 들다 보면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불효했던 것을 뒤늦게 깨닫고 마음 아파한다. 나도 그러했기에 자식이 나를 서운하게 하는 일이 있다 해도 이해하려 한다. 아쉬움과 후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니까.

남극에는 극도의 추위 속에 회색머리 엘버트로스 라는 새가 산다. 단 한 마리를 낳아 거친 바람 속에서 새끼를 품어 기른다. 부모 새가 먹이사냥을 나갈 때 강풍이 불어 새끼가 둥지에서 벗어나기라도 한다면 몇 시간 버티지 못하고 얼어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 둥지로 돌아온 부모 새는 둥지 바로 밑에 떨어진 새끼를 알아보지 못한다. 새끼가 소리 내어 울고 버둥거려도 소용이 없다. 강한 바람이 새끼를 밀어내면 부모 새들은 새끼를 못 찾고 새끼 스스로 둥지로 올라가야만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엘버트로스는 시각과 소리, 냄새로는 새끼를 구별하지 못하고 새끼가 둥지 안에 있어야만 자신의 새끼로 인지하기 때문이란다.

 

  

사진 출처 : 《KBS다큐 일곱 개의 대륙하나의 행성 – 남극 편

 

부모는 자기 자식에게 최고의 것을 주고 싶고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부모 엘버트로스가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를 올리고 싶어도 안보이고 듣지 못해 새끼를 도울 수 없듯, 부모는 자식에게 모든 걸 해주고 싶어도 몰라서, 능력이 없어서, 그리 태어났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경우가 너무 많다. 자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식은 ‘부모가 내게 해준 게 무엇인가’ 묻지 말고, 부모는 ‘너 같은 자식 낳아 봐라’ 하지 말자. 부모는 그냥 부모이기에 소중하고 자식은 그냥 자식이기에 소중하다.

 


요양원에 나를 보낼 자식에게

가족들은 요양원 생활을 하겠다는 내 생각에 반대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 50+세대들이 그리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가족들의 짐이 되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그래서 몸은 가라앉아도 정신이 양호하다면 내 스스로 요양원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알츠하이머 병 등으로 그런 판단조차 할 수 없는 때가 온다면 그때 나를 요양원으로 보내라고 이 글을 통해 부탁하련다.
“얘들아, 나의 뇌가 나와 너희들을 내 기억에서 밀어냈을 때 나를 요양원으로 보내다오. '우리 엄마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니 펜과 종이를 늘 마련해 주세요, 낙지는 못 드세요.' 등등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그 곳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주렴. 간간이 내게 찾아와서 너희를 보게 해다오. 낯선 사람 보듯 누구세요? 하더라도 내 마음 속 깊은 어딘가에서 너희를 알아보고 기뻐할지 몰라. 행복했던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사진을 보여주렴. 비록 내가 먼 곳으로 눈을 돌린다 해도 내 영혼 어딘가에서 알아보고 즐거워할지 누가 아니?”

 


<가을창가에서>(2019) 문향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