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다는 것이 쓸모가 있지, 살아 왔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힘이란 쉬는 순간에 멎는다. 힘이란, 과거에서 새로운 상태로 옮겨지는 순간에,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고, 표적을 향해 화살이 날아가는 그 순간에 실린다.

(랄프 왈도 에머슨)

 

 

산에 가는 시니어들

나이와 공간은 관련이 있다. 내 주위에는 산에 자주 가는 지인들이 많은데, 이들은 대부분 시니어들로 그 이전부터 산을 좋아하던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새롭게 산을 가까이 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 산에 가면 좋은 점을 자주 말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뗄 수 없는 하나의 공간으로 산을 말하고 있다.

젊은 시절, 직장 초년병으로 일하던 당시 직장에는 동호회가 많았다. 그 시절에 등산동호회를 들어갈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는데 첫 번째 이유는 회원들이 많았고, 특별한 준비(예를 들어 스킬을 익히거나 실력을 고민할 필요가 없이)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한두 번 따라갔다가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아 그만 두기는 했다.

 

이제 시니어가 되어 등산에 대해 생각해 본다. 등산에는 분명히 좋은 점이 있다. 늘 가까이 있는 산, 다양한 자연의 변화가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등산은 건강에도 좋다. 어떤 지인은 자기 스케줄대로 가서 사색하면서 걸을 수 있고 또는 약간 힘에 겨운 등반에서 땀과 노곤한 다리에서 느껴지는 몸의 느낌이 좋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에는 산과 들에서 뛰어 놀던 시절이 있었다. 자연은 말 그대로 옆에 있었으며 언제나 거절 없이 사람들을 맞이했고 그 자연 속에서 우리들은 즐기고 땀을 흘리고 성장해 갔다. 시니어가 되어 늘어난 시간이라는 공백에서 산을 가까이 두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다시 돌아가는 경험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는 규칙적으로 등산하는 시니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자연과의 만남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과 함께,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을 권하고 싶기 때문이다. 시니어로서 인생을 보다 충만하게 살기 위해 다른 사람과의 교제가 주는 행복함이 있기 때문이다.

 

 

시니어의 인간관계: 범위와 밀도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기억이 쌓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모든 상황과 일들이 낯설었지만 차츰 경험이 쌓여가고, 그 경험은 기쁨과 슬픔, 행복함과 불행함, 보람과 아쉬움이라는 태그를 달고 기억으로 남는다. 이제 나이를 먹고 과거를 회고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이유는 이 기억 때문이다.

예전 일을 기억하는 것은 시니어에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조금 생각해 볼 지점이 있다. 필자가 좋아하는 미국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과거를 자주 회고하는 습관이 회한이나 자책감으로 연결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한다(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마사 누스바움 & 솔 레브모어 공저, 어크로스, 2018). 회한이나 자책감은 과거에의 후회로 연결되고, 후회감은 종종 현재의 인생에 기울여야 할 주의를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마사의 주장에 공감한다. 나 또한 50세를 넘기면서 젊은 시절의 나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시간이 늘었다. 대부분은 잘못 결정한 일들-이직, 몇몇 사람들과의 갈등-이나 하지 않았던 일들-유학-에 대한 후회감이 컸다. 이세돌처럼 인생을 복기한다면 모르겠으나 나의 회고는 어떤 인생지혜를 발견하기 보다는 연민과 부끄러움만을 상기하는 시간이었다. 결국은 억지로 이런 회고습관을 떨쳐냈었다.

 

시니어의 인생도 늘 새로운 인생이다. 인생을 4계절에 비유해서 시니어의 인생을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표현하는 것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늘 생은 새로운 것이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지 않는가? 매일 매일, 매시간 어떤 인생이 나에게 올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정해지지 않은 내일이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삶의 소중한 기회다. 그런데 옛날에 매달려 물방아를 돌리고 강물로 흘러간 물처럼, 잡을 수 없는 시간의 화살을 잡으려고 뒤돌아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새로운 경험을 새롭게 마주하고, 그 경험이 충실하고 즐거우며 의미가 있기를 기대하고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렇다면, 이제 주제는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은가에 있다.

 

새로움은 낯섦이다. 낯섦은 불안감을 주기도 하지만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래서 열정에 연료를 제공한다. 반면 익숙한 경험, 습관처럼 다가오는 상황은 편안함을 주지만 결코 새로움을 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어떤 기대감, 미래에 성취하고 싶은 기대를 불러일으키지도 못한다.

새로운 경험은 어떤 것일까? 여행을 떠올린다면 틀린 생각은 아니다.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 드문 것을 보면 인간에게는 새로운 환경, 새로운 상황을 경험하고 싶은 본능이 있다. 필자도 20대 대학시절에 친구들과 배낭을 메고 다녔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여름날의 상큼함과 신선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여행보다 더 새로운 인생경험을 아낌없이 주는 것이 있다. 바로 낯선 사람과의 대화와 교류이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생각, 다른 문화에서 살아 온 사람들과의 접촉이고 교제 말이다.

이런 생각을 얻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필자도 가족, 학교, 직장이 인간관계의 범위를 정한 변수들이었고 큰 문제의식 없이 이 범위에서 만나고 교제했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이런 변수를 벗어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사회적 기업에 참여해서 무급 이사로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그곳의 청년들, 50플러스센터가 마련한 클래스에서 함께 공부한 사람들, 필자가 존경하는 선배가 운영하는 민간단체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만난 젊은 청년들을 통해 그런 경험을 했다. 다른 인생을 살아 간 사람들, 다른 세대에 속한 사람들과의 대화와 교류는 필자의 인생에 새로운 마디를 만들어 주었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통해 나를 다시 발견할 수 있었고, 그들을 통해 사람과 인생의 다른 면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다양성과 존중의 가치에 대한 나의 편협함을 깨는 시간이기도 했다.

 

 

시니어의 인간관계는 가족, 친구, 선후배, 동료에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즉, 인간관계의 범위를 넓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관계는 시니어의 삶에 다양한 맥락을 더해주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관계 속에서 우리의 인생은 다채로워지고 풍부해진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겠다. 지금 이 나이에(?) 새로운 교제가 얼마나 깊게 지속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 함께 생을 살아 온 사람들에게 성실한 것이 더 의미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 말이다. 물론 깊게 관계한 사람들은 소중하고 귀중한 존재다. 당연히 밀도 있는 우정은 지속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우정이 깊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 새로운 사람들과의 교제가 의미가 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깊지 않은 관계, 지속되기 어려운 새로운 관계에도 의미가 있다. 진한 커피가 매력적 인만큼 맑은 커피도 괜찮지 않은가? 새로 시작하고 만나는 관계는 나의 삶을 다채롭게 하는 생각과 문화를 경험하는 관계로서 의미가 있다. 사람들을 통해서 새로운 이야기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옥스퍼드 대학 교수인 시어도어 젤딘 (Theodore Zeldin)이 기획한 <뮤즈Muse>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그의 70 번째 생일을 맞아 친구가 모이는 파티를 열지 않고 언론 매체에 자신이 모르는 사람에게 초대장을 보내 대화를 나누는 행사를 개최한 것이 시초였고 이후 여러 도시와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이 만나 진지한 대화를 하는 모임으로 발전했다. 이 모임에서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만나 사전에 정해진 주제 중에서 골라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수십 개의 주제가 있는데, '사랑에 대한 당신의 철학 중에서 가장 바꾸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자신감은 어떤 역사를 통해 형성되었는가?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웠는가?"등이 있다. 참가자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인생에 대한 심도 깊은 주제를 낯선 사람들과 진정으로 할 수 있었다는 사실, 대화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새롭게 발견했던 경험,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듣고 정신이 확장되는 감동 등. 바로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과 과거에 머물러 있는 정신을 확장하는 경험이었다.

 

 

카페와 살롱

시니어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산에도 가지만 카페와 살롱에도 가보기를. 여기서 카페와 살롱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얘기하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곳을 말한다. 카페와 살롱은 실재했던 공간이다. 17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프랑스를 필두로 카페가 생겨나고, 이곳에서 사람들이 모여 커피도 마시고 대화를 나눴다. 어떤 학자는 프랑스 혁명은 카페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정도로, 카페는 시민들이 자신의 관심사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열린 소통의 광장이었다. 살롱은 처음에는 상류층이나 지식인이 문학이나 예술을 주제로 지인을 초대해서 대화하고 공연을 관람하는 지적 사교공간이었지만 점차 많은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주제로 토론하는 공간이 되었다. 특히 영국에서 살롱이 활발했는데, 당시 왕정에서는 이 불온한 공간(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한다!)을 통제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현대적 언론이 생긴 것도 살롱을 매개로 했다. 카페와 살롱은 사람들이 모여 열린 대화, 지적 교류와 만남을 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이런 곳이 있을까? 궁금할 것이다. 어쩌면 인터넷 카페를 상상할 수도 있겠다. 인터넷 카페는 과거의 카페나 살롱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지만 인터넷 카페는 진정한 대화를 하기가 힘든 공간이다. 대화라기보다는 주장이 앞서고 생각과 생각이 춤추는 공간이 될 수 없다. 페이스북같은 SNS는 다소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폐쇄적인 공간이다. 이곳에서 삶을 확장하는 새로움과 놀라움을 얻기는 힘들다. 카페와 살롱은 열린 공간이고 늘 새로움이 있으며, 낯섦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대화와 토론을 통해 삶을 확장하는 공간이다.

 

오늘날의 카페와 살롱은 아직은 미약하지만 점차 늘어나고 있다. 50플러스에서 운영하는 열린 토론장과 클래스, 서울시에서 종종 여는 시민공론장이 그런 곳이다. 또한 시니어들의 커뮤니티도 그런 공간이다. 비슷한 관심사를 주제로 결성되지만, 다양한 경험과 역사를 가진 사람들의 커뮤니티로서 새로운 대화와 교제가 가능한 곳이다.

 

과거의 삶이 만족스러웠다면 그것은 행복한 일이다. 앞으로 향하는 삶의 행복은 과거의 연장선이나 과거의 경계가 만든 거주지가 아니라 새로운 거주지에서 만들어 보기를 권한다. 그 거주지는 아마도 깊고 오래 살아갈 거주지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떤가? 다양한 인생을 살아 온 사람들이 모여 기대하지 못했던 생각과 경험을 나눌 때, 우리의 정신과 인생은 놀라고 깊어지고 다채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