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자식이 주는 십일조

동년기자 페이지 - 내 자식 혼사열전 1

 

 

“가형, 정말 고마워!”

“원장님, 왜요?”

“지난번 얘기해준 십일조 때문에….”

“그래서 뭐가 달라졌나보죠?”

“음, 덕분에 아이들한테 매달 용돈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 집안 분위기도 달라졌어!”

아침마다 체육관에서 보는 선배는 자식들한테 늘 불만이 있었다. 아들이 셋인데 국립병원장 출신이라 체면도 있고 해서 결혼할 때마다 강남에 집을 사주거나 전셋집을 얻어주느라 허리가 휘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본인은 칠순이 접어든 나이에 허리도 안 좋고 거동도 불편한데도 동네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결혼한 자식들이 그 정도 해줬으면 당연히 용돈은 물론 명절 때나 보너스를 탈 때 선물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감감무소식이란다. ‘아들은 사춘기 지나면 남남, 군대 가면 손님, 결혼하면 사돈집 아들, 손주를 낳으면 해외 동포’라고 했던가. 마음 한구석이 섭섭했는지 가끔 자식교육 잘못시킨 것 같다는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그런데 지난봄, 필자 집에서 오래전부터 실천하고 있는 ‘십일조 제도’를 지나가는 말로 소개했더니 바로 가족회의를 열어 자식들한테 공개적으로 얘기했단다. 그리고 그다음 달부터 십일조까지는 아니지만 세 아들이 각각 매월 20만원씩 용돈을 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10여 년 전에 아이들과 협의해서 십일조 제도를 시작했다. 매월 받는 월급의 십 분의 일을 그동안 키워준 엄마한테 용돈으로 주라고 한 것이다. 은연중의 압력이라고나 할까 약간의 강제성을 띤 제안이었지만 아들과 딸은 입사 첫 달부터 이를 실천했다. 보너스를 탈 때도 예외 없이 용돈이 왔다. 다만 결혼한 이후부터는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해 정액으로 감면해주었다. 이러한 십일조 제도는 우리 가족에게 생각보다 큰 변화와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줬다.

 

첫째, 자식들과 더 가까워졌다. 자식들에게 용돈을 받은 부모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 이상을 자식이나 손자들에게 되돌려주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받은 돈으로 맛있는 찬거리나 고기를 사다 냉장고에 넣어놓고 문자를 보내보시라. 냉장고 털이범들이 차를 타고 총알같이 달려온다.

둘째, 가족과의 대화가 많아졌다. 이번에는 무엇을 사줄까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되고 필요한 게 뭔지 자식들에게 묻다 보면 소통이 원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신뢰가 생긴다.

셋째,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의 관계가 달라졌다. 어느 집이든 고부간의 문제는 있다. 그러나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서로를 알게 되고 그만큼 배려하는 마음도 생겨 작은 오해 정도는 웬만하면 이해하고 넘어간다.

 

행복이란 나비와 같아서 좇으면 도망간다. 자식들한테 바라는 것들을 내려놓으면 불만이 사라지고 행복해진다.

십일조 학습 효과 덕분인지 결혼 후 아들은 장모한테, 딸은 시어머니한테 매달 용돈을 드리고 있다. 옛말에 ‘사돈집과 뒷간은 멀리 두라’ 했는데 우리 집안은 사돈집과 한집안 같은 분위기라서 자주 식사도 하고 망년회도 함께한다. 또 서로 역할 분담을 해 네 명의 손자도 보살펴준다.

어느덧 큰 외손녀와 손자는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이러한 행복은 부모 자식이 서로에게 한 약속을 잘 실천하고 있는 덕분이 아닌가 싶다.

글 가재산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천벽력 같았던 소식

동년기자 페이지 - 내 자식 혼사열전 2

 

필자는 직업군인으로서 젊은 시절에 전·후방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군대생활을 했다. 따라서 아이들도 필자의 이동에 따라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 부분이 부모로서 늘 미안했다. 그래도 다행히 공부를 곧잘 해 재수, 삼수라는 걸 모르고 대학에 들어갔다. 그런 아이가 대학 졸업을 불과 한 학기 남겨놓고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오겠다며 훌쩍 떠나버렸다. 기왕에 어학연수를 목표로 가는 것이니 가급적 교포가 많지 않은 곳으로 가야 목적 달성에 유리하다며 고르고 골라서 간 곳이 미국 콜로라도였다.

 

2년여의 연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아이는 남은 한 학기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한 후 보따리를 싸서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군대를 막 제대한 아들놈까지 데리고 가버렸다. 당시에도 한국 사회는 고용불안이 심각했고 이로 인한 청년실업이 사회 문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좀 더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기지개를 한번 펴보겠다는 자식의 의지를 꺾을 부모는 없다.

빠듯한 월급으로 두 아이의 대학 및 유학 뒷바라지까지 한 필자 부부는 나름 자식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런데 아이들이 미국으로 간 지 1년 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딸아이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의 기대를 알고 있던 터라 죄송하다며 엄마에게만 살짝 알렸는데 아내가 필자의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한 달이 훌쩍 넘어서야 조심스레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필자에게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한 대사건이었다.

 

딸아이의 배신에 필자는 몇날 며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것도 한국에서 부모 따라 이민 간, 그야말로 불알 두 쪽만 달랑 찬 녀석이 뭐가 그리 좋다고 임신부터 덜컥 했단 말인가? 시대가 아무리 변했다 해도 결혼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근본이 되는 일이라는 뜻 아니겠는가?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고 얼마 후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과 함께 사진이 왔다. 사진 속 손자 녀석은 무럭무럭 잘 크는 듯했고 커갈수록 예쁘기만 했다. 필자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혼수 대신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한 끝에 안정된 주거공간이 필요할 듯해서 집을 사고 ‘블랙카우델리’라는 음식점을 개업하는 데 일정 부분을 도와주었다. 부모에게 실망을 안겨줬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더욱 열심히 노력한 딸네 부부는 사업을 잘 일궈 튼튼한 기반을 잡았고 ‘블랙카우델리 2호점’을 1호점 인근에 또 냈다.

 

필자는 직장 때문에 딸네 부부를 만나러 가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정년퇴직 후에야 미국행을 결정했다. 손자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2년 전 일이다. 미국에 가서 딸아이의 유학생활이 결코 녹록지 않았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 지금은 사위가 된 친구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무사히 유학생활을 마쳤고 이제는 단란한 가정까지 꾸려 행복하게 살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니 얼음장처럼 굳어 있던 필자의 마음도 서서히 녹아내렸다. 그리고 필자 앞에 늘 죄스러운 마음으로 움츠러들어 있던 사위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열심히 살 것을 당부했다.

원하는 삶을 당당하게 선택하고 자신이 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 실천하고 있는 딸 덕분에 이제는 해외여행도 자주 하고 풍요로운 노년의 삶을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혼사가 있을까 자위해본다.

 

김종억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너희, 동화처럼 아름다웠다

동년기자 페이지 - 내 자식 혼사열전 3

 

2010년 봄, 결혼을 하겠다는 아들의 말에 필자의 마음은 쉬지 않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아들은 2006년 4월에 전신 3도의 화상을 입었다. 주치의는 심한 열에 달궈진 아들의 몸과 마음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불길을 온몸으로 품은 듯 아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어려서는 말수가 적고 차분했는데 그렇게 조용하던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불기둥이 치솟는 마음의 병은 착했던 아들을 되돌려주지 않았다.

아들이 그럴수록 필자도 말수가 줄어갔다. 아들의 고통에 어떠한 말도 감히 할 수 없었다. 엄마라도 그 고통은 알 수 없을 거야… 그게 필자의 마음이었다. 조심 또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주치의의 말만 되새김질하는 날들이었다.

 

그런 아들이 어느 날 결혼을 하겠다는 소릴 한 것이다.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는 말에 놀라서 아들을 올려다봤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마치 병이 다 나은 듯 어린아이처럼 밝은 표정이었다.

필자는 덥석 손을 잡으면서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어깨를 다독여줬다. 그러자 아들은 “잘살게!” 했다. “어떻게 해주면 되지?” 하고 물으니 “엄마, 그동안 제가 너무 속만 썩였지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우리가 다 알아서 할게요. 결혼반지는 커플링으로 할 거고 결혼식장은 다 준비되었어요. 청첩장은 300장 정도 만들 거니까 엄마가 필요한 만큼 가져가셔요. 신부 쪽엔 친척이 거의 없어서 제 친구들과 형들만 초청할 거예요.” 집 걱정을 하니 그것도 걱정하지 말란다.

 

그날은 필자 귀를 의심하면서 눈물만 쏟았다. 필자에게 남은 단 하나의 아들 아닌가! 필자의 친구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축하해줬다. 그리고 드디어 주례도 없이 아들이 신부에게 직접 노래를 불러주며 아주 색다르고 멋진 결혼식을 했다. 이런 걸 보고 꿈같은 일이라고 하던가? 감동에 젖어 아들 결혼식을 무사히 잘 끝냈다.

주치의는 그래도 마음을 놓지는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아들과 며느리는 빈손으로 한 결혼이었지만 아무 불평 없이 딸아이 낳고 행복해하면서 잘 살았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작년 5월에 며느리가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그 해 12월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세 식구 똘똘 뭉쳐 행복을 만들며 살더니… 아내가 가자 아들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은 왜 그렇게 가혹한 걸까.

이제 모든 것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버린 것 같다. 부모에게 손 안 내밀고 저희들끼리 당당하게 결혼식을 올린 이 멋진 커플을 정말 사랑했는데… 부모의 마음을 넘어 존경하기까지 했는데… 또 얼마나 자랑스러웠는데….

그러나 동화처럼 아름다웠던 그날의 한강 선상 결혼식은 이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필자의 가슴에 아프게 못 박혀 있다.

 

육영애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자식은 거울이다

동년기자 페이지 - 내 자식 혼사열전 4

 

 작년 초, 딸아이의 남자 친구가 인사를 오겠다고 해서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2주 후 현대미술관 그릴에서 마주 앉았다. 어색하고 기분이 묘했다. 노트북을 펼쳐 몇 컷으로 정리한 자신의 풀 스토리를 전하는 예비사위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래도 비교적 차분하고 진솔하게 35년의 이야기를 전하는 표정이 진지했다.

만나서 심문하듯 묻고 답하는 자리보다는 온전하게 자신을 알리는 시간을 주는 게 좋겠다 싶어 필자가 주문한 것이 ‘나를 말한다’ 브리핑 PPT였다. 우리 아이와 결혼을 원한다면 예비 장인, 장모를 설득해보라는 일종의 작은 미션이었다고나 할까.

 

이후 까탈스러운 장모라는 주위의 비난이 있었다고 사위에게 전하니 나름 재미있었던 이벤트였다며 집안의 가풍으로 하잔다.

양가 부모 상견례가 걱정이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막막한 마음에 경험자들에게 물으니 형식적인 자리이니 인사 정도나 나누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 생각은 달랐다. 그동안 아들을 어떤 심정으로 키웠는지, 어떤 아이로 자라기를 소원했는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지 등등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자 모두들 극구 말렸다. 그러려면 너는 아예 상견례 자리에 나가지 말라는 충정 어린 겁박(?)까지 했다.

 

문득 ‘사돈끼리 그렇게 어려워해야 할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귀한 자식이고 사돈끼리 사이가 좋으면 아이들도 편할 텐데 왜 형식적으로 만나라고 하는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상견례 자리에서는 남편이 주로 이야기하고 필자는 경청만 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시간의 상견례 만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딸아이에게 “입을 꼭 다물고 싸늘하게 앉아 계시니 시베리아가 따로 없었다. 겨울 왕국 지으시느라 애쓰셨다”는 원망 섞인 비난을 들어야 했다.

상견례를 마치고 나니 혼례가 실감이 났다. 남편도 딸아이가 시집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한동안 잠을 뒤척였다. 장인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 이해하겠다는 고백을 시작으로 35년 전 우리의 결혼식을 떠올리며 새벽까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결혼이 통과의례나 속물적인 거래가 되지 않으려면 정직하고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최소한 자신이 납득할 만한! 결혼 당사자는 내게 결혼은 무엇인지, 왜 그 사람이어야 하는지, 나는 상대에게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둘이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등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부모 역시 새 식구를 받아들이는 기준이 무엇인지, 자녀가 어떤 가정을 꾸리기를 원하는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인지, 그럼에도 결정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욕심을 내려놓고 다양한 경우들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어느덧 딸아이의 결혼 1주년이 지났다. 여전히 재미있고 좋단다. 살아가면서 몇 가지 잘한 일 중 하나가 딸아이를 결혼시킨 것이다. 새 식구도 얻었지만 남편과도 변화가 생겼다. 부모이자 인생 선배로서 바람직한 부부의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기 시작한 거다. 조금은 성숙하고 의젓한 장인, 장모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다. 딸아이의 결혼으로 우리 부부를 비춰주는 거울이 생긴 것 같다. 사위가 아직도 낯설지만 결혼시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딸아이가 원하는 사람을 흔쾌히 맞아들인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어른다웠다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설레는 가슴으로 함께 꿈꿔나가는 젊은 부부의 모습이 아름답다.

글 윤영애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기발한 딸의 선택

동년기자 페이지 - 내 자식 혼사열전 5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해 졸업한 딸이 당연히 유학을 갈 줄 알았는데 안 가겠다고 선언을 했다.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 공부를 시작해 대충 한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열공을 해 수상 경력도 많고 어려서부터 유명세를 탄 딸이었다.

딸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으면 유학을 포기하겠다고 선언을 할까. 그 마음 헤아려 얼마 동안 하고 싶은 대로 놔뒀다. 그러는 동안 딸은 어느새 29세가 되었다. 이번에는 조바심이 난 필자가 딸에게 강력하게 선언했다. 시집을 가든지, 유학을 가든지 선택을 하라고.

 

딸은 쉬면서 취직도 해보고 다른 길을 모색해보려 했지만 흡족한 것이 없었던 것 같았다. 나이 들어가는 딸이 불안해 몰아치자 섬머스쿨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미국에서 섬머스쿨을 마치고 음악 도시들을 여행하며 재충전을 하더니 다시 피아노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유학을 결심했다.

두려운 마음으로 지원을 하고 유학을 떠난 딸이 드디어 대학원을 졸업했다고 전화를 해왔을 때 필자는 “이제는 결혼을 해야지!”라고 말했다. “네가 아무리 유명한 피아니스트라 해도 싱글은 안 돼”라고 하니 남자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서울로 와서 선을 보라고 했다.

 

고민해보겠다던 딸은 며칠 후 다시 전화를 해왔다. “엄마, 사실은 나를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다는 사람이 있어.” 누구냐고 물었더니 나이가 많이 어리다고 했다. 필자는 난감했다. 지금 ‘no’ 하면 혼기를 넘길 게 분명했다. 일단은 “그래? 그러면 결혼하면 되지 뭐”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겁이 덜컥 났다. 우선 마음을 진정하고 날을 잡아 보스턴으로 갔고 그곳 시청에서 시댁 식구와 우리 부부, 그리고 유학 중인 아들이 참석해 결혼식을 올렸다.

딸은 사위를 섬머스쿨 때 만났다고 했다. 그런데 유학을 가서 다시 만나게 되어 인연인가보다 했단다. 딸은 졸업을 했지만 사위는 아직 대학원 재학 중이라서 보스턴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둘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필자도 마음이 놓였다.

 

그 해 여름, 서울에서 다시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들은 신랑이 몇 살이냐고 물어왔다. 필자는 시침을 떼며 차이가 나는 나이의 반을 줄여 대답했다.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나 모국에 처음 온 사위는 매우 신기해하며 한국이 너무 좋고 맛있는 것도 많다며 서울에 와서 꼭 살고 싶다며 흥분했다.

 

경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딸네 부부는 바로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년 후 첫아들을 낳고 대학원을 마친 사위는 딸과 함께 서울로 왔다. 현재 대학 교수로 자리를 잡고 제자를 가르치며 연주생활에 열중하고 있다. 사위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이며 여러 악기를 다루고 작곡도 한다. 재주꾼에 꽃미남이다. 하루는 연주회에 참석한 기자가 “저 부부는 좀 이상하다”며 취재를 했다. 딸보다 8년 어린 사위의 정보는 곧 모두 공개가 되었다. 그러면서 딸네 부부의 인기는 더 올라갔다.

딸이 결혼할 때만 해도 연하 남자는 흔치 않았다. 지금은 연상·연하 커플도 많고 다른 사람 눈치 보는 시대도 아니다. 필자도 이제 사위의 나이를 더 이상 숨기지 않는다. 꽃미남인 사위가 가족모임에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 귀여워서 저절로 싱긋 웃는다. 우리 딸의 남편 선택은 정말 기발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글 윤정자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각서 쓰고 참석한 아들의 결혼식

동년기자 페이지 - 내 자식 혼사열전 6

 

 5년 전 겨울이었다. 30대 후반으로 접어든 아들의 결혼식 날짜가 정해져서인지 하루하루가 더디게 갔다. 12월 30일에 하는 결혼식 초청장은 다 보낸 상태였다. 사돈댁과의 혼사에 관한 모든 절차와 격식도 예법에 따라 잘 타협이 되었다.

그 해 크리스마스이브에는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 예비 신부인 며늘아기도 참석했다. 새 식구가 곧 가족이 됨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함께 즐겁게 시간을 잘 보내고 돌아온 그날 밤, 필자에게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밤새 복부 통증에 시달렸던 것이다.

 

다행히 크리스마스에도 진료를 하는 동네 병원이 있어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가벼운 장염쯤으로 여겨 간단한 약만 처방해줬다. 하지만 회복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응급으로 찾아간 큰 병원에서 ‘대장파열’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조금만 더 늦었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면서 수술을 서둘렀다.

갑자기 장 파열이라니 믿기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신경이 쓰인 것은 아들의 결혼식이었다. 혼주가 될 사람이 결혼 날짜를 코앞에 두고 큰 수술에 입원까지 해야 하는 환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인륜지대사인 아들 결혼식을 앞에 두고 벌어진 일이라 상심이 컸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천추의 한이 될 것 같은 죄의식이 밀려왔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결혼식장에는 꼭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수술과 입원, 치료를 받는 동안 결혼식 당일이 되었고, 필자는 비장한 각오로 담당 주치의를 찾아가 사정 얘기를 했다. 당연히 외출이 불가하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최후의 카드를 썼다. 필자가 의사에게 제시한 것은 각서였다. 어떠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병원 측과 담당 의사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겨우 허락을 받고 휠체어에 의지해 예식장엘 갔다. 아들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은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필자의 모습에 깜짝 놀라며 걱정을 했다. 즐거운 잔치 분위기가 되어야 할 결혼식에서 누구보다 아들과 며늘아기에게 미안했다.

 

필자의 친구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인라인을 타고 함께 둘레길을 트레킹하던 사람이 휠체어를 타고 아들 결혼식장에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구동성으로 “도대체 어찌된 일이야?” 하고 물었다. 필자는 그저 웃기만 했다. 사돈댁에도 죄송스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훗날 며늘아기를 통해 들은 얘기이지만 “그만하시길 다행이다”라고들 했단다.

 

옛날엔 새 식구가 들어와 우환이 생기면 불행을 예고하는 것이라는 속설이 있었다. 아마도 사돈댁에서는 혹여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을 한 듯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새 식구가 잘 들어와 더 나쁜 상황으로 가지 않고 수술도 잘되었다고 입을 모아 얘기했다.

필자가 수술한 다음 해에 손주가 태어났고, 아들 식구는 필자 부부와 가까운 곳에서 화목하게 잘 살고 있다. 손주 재롱은 온 집안의 청량제가 되었다. 수술 이후 필자에게는 큰 변화가 찾아왔다. 대장파열의 원인이 술과도 연관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끊은 것이다. 가족들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단주였다.

이젠 손주바보 할아버지로 매일매일 즐겁게 지내고 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상황이었지만 이렇게 웃으며 말할 수 있으니 시간이 흐르긴 흐른 것 같다.

글 윤종국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애들만 행복하면 돼”

동년기자 페이지 - 내 자식 혼사열전 7

 

책상 위에 놓은 휴대폰이 윙윙대더니 친구가 왔다.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친구는 아파트 가격이 왜 이렇게 비싼지 모르겠다며 툴툴거린다. 시내에 커다란 주택을 소유하고 있는 친구가 뜬금없이 왜 아파트 타령일까. 알고 보니 딸이 결혼을 한단다. 필자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왜? 아파트 사주려고?” “응.” 예상외의 답변이었다. 친구가 돈이 좀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출가하는 딸에게 아파트를 사줄 생각까지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사윗감이 대단한 사람인가보네 하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친구의 사윗감은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생이었다.

 

잠시 대화가 끊긴 것은 순전히 필자 때문이었다. 필자의 딸도 결혼 날짜를 잡아놓은 상황이었는데 아파트는커녕 아무것도 해줄 게 없어 미안해하고 있던 터라 얼마간은 불편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친구의 그다음 말이 필자를 놀라게 했다. 사윗감이 딸을 통해 아파트를 사달라 했다는 것이다. 친구는 한숨을 쉬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뭐? 학생 놈이 아파트를?” 목소리의 톤이 올라갔지만 곧 누그러뜨렸다. 아버지가 딸을 위해 아파트를 사주는 것이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년 반 정도가 흘렀다. 그 사이에 친구의 딸도 필자의 딸도 모두 결혼을 했다. 친구는 수원에서도 잘나간다는 광교 지역에서 32평짜리 아파트를 딸에게 사주었다. 어느 날 친구는 술이나 한잔하자고 했다.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음을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얼굴엔 고민의 흔적이 역력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친구가 어렵게 운을 뗐다. 사위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위가 돈은 안 벌어오고 집에서 룸펜이 되어 마누라 시집살이를 시키고, 딸은 그런 신랑이 못 미더워 임신중절까지 하고 자기라도 돈을 벌겠다며 직장에 나가고 있단다. 그런데 정작 사위는 딸에게 저녁마다 누구를 만났는지 왜 같이 있었는지 캐묻더니 요즘은 손찌검까지 한다는 것이다. 장인이 고심 끝에 몇 차례 만나 설득도 해보고 윽박질러보기도 했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단다. 결혼할 때 아파트 사달라고 했을 때 싹을 잘라냈어야 했다. 입에서 이혼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흘러나왔을 때 친구는 만취해 있었다.

 

다음 날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아내는 평소와 달리 몹시 화가 나 있는 듯했다.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온 죄로 꼬랑지를 바싹 내린 채 눈치를 살폈다. 잠시 후 아내는 눈칫밥을 먹고 있는 필자에게 이런 시국에 밥이 넘어가냐며 쏘아봤다. 그러고는 우리 딸을 어쩔 거냐고 묻는다. 아내는 한숨을 푸욱 쉬더니 사돈댁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아이들 전세비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려도 되는 거냐고요!”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졌다. 사돈이나 필자나 애들에게 집을 사주진 못했지만 조그만 아파트를 전세로 얻어 잘살고 있는데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내는 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면서, 사돈댁에서 전세를 얻어줄 형편이 못되어 1년만 기다리면 집을 옮겨서라도 부족한 전세금을 해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태 부족한 전세비를 월세로 대신하며 아이들이 감당하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사돈댁에서 전세비 마련이 어려우니 다시 내년까지 기다려 달라는 말에 아내가 결국 터져버린 것이다. 필자는 밥을 먹다 말고 아내의 걱정에 피식 웃고 말았다. “전세비는 내년에 해준다는데 뭘 그래, 이 사람아.” 친구가 떠올랐다. “집을 사주고도 얻어맞으며 사는 사람도 있더라고. 걱정하지 말어. 좀 부족해도 애들만 행복하면 된 거야.”

글 이찬만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